변호인

변호인 ⓒ 위더스필름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흥행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미 920만 관객을 넘었고, 곧 천만 관객을 동원할 것이 확실해졌다.

<변호인> 흥행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누가 뭐라 해도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재미'에 있을 것이다. 부림사건이나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을 굳이 기억하지 않더라도 재밌는 작품이다.

영화적 재미에 더해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다룬다는 점도 <변호인>의 흥행을 가속했다. 영화는 가상이다. 그 가상에 '실제'가 더해졌을 때, 설득력을 품게 되고 몰입도 또한 커지게 된다. 이렇듯 <변호인>에서 가상과 실제의 조합은 영화가 지닌 힘을 더욱 극대화 시켰다.

영화 안에서의 고문 장면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자각, 말도 안 되는 모함으로 청년들의 목숨이 실제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는 현실적 위기감, 절대 권력에 맞서보려 했던 변호인이 그래도 존재했었다는 안도감은 이 영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과 '실존 인물'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극대화될 수 있는 감정들이었다.

즉, 영화 자체의 재미와 영화의 바탕이 된 실제 이야기의 기막힌 조화가 <변호인>의 흥행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시대적 결핍이 곧 <변호인>의 큰 흥행 요소

 <변호인> 송강호 먹방

<변호인> 송강호 먹방 ⓒ NEW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천만 관객이 그것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천만 관객이 넘은 작품들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를 넘어서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특별한 무언가는 바로 무엇에 대한 '결핍'이다.

보통 천만이 넘은 작품들은 그 시대가 지니고 있는 '결핍'을 건드린다. 그 '결핍'의 해소야말로, 전 국민의 5분의 1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선 시대의 '결핍'을 다루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의 영화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광해, 왕이 된 남자>같은 경우는 '좋은 지도자의 결핍'을 다뤘고, 이에 천만이라는 관객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본다. 국민을 사지로 모는 것에 분노하는 그런 왕,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권력자들에겐 엄할 수 있는 그런 왕의 모습을 보며, 우리 사회 속 '지도자 결핍'의 해소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은 '가족애의 결핍'을 채워줬다. 2013년 1월 개봉한 <7번방의 선물>은 대선 이후에 상영되었다. 대선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에는 가족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이념적 갈등 등 온갖 갈등이 팽배해 있었다. 일부는 결과에 기뻐했겠지만, 나머지 일부는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과에 기뻐한 쪽도 마냥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그 과정 안에서 이미 심할 정도의 갈등이 있었고, 그로 인한 반목과 멸시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좌절 안에서 사람들은 결국 다시 가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에도 나만 사랑해주는 바보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갈등의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었고, 그 결핍의 해소로 인해 이 작품 또한 천만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러면 또 다른 천만 영화인 <도둑들>은 어떨까? 사람들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결핍을 해소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해소한 결핍도 있다. 바로 '한 방의 결핍'이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한 방을 꿈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까? 대한민국 사회는 일단 한 방 터지기만 하면 된다는 의식이 깊이 박혀있다. 한탕 해서 제대로 성공해 보고 싶다는 그 욕망을 <도둑들>은 분명히 건드렸다.

정의 결핍의 시대...<변호인>이 변호한다

 영화 <변호인> 한 장면.

영화 <변호인> 한 장면. ⓒ 영화 <변호인>


그렇다면 <변호인>은 어떤 결핍을 해소했을까? 답은 뻔하다. 바로 '정의'다. <변호인>에서 가장 감명 깊었던 대사를 물으면 꽤 많은 사람들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를 말할 것이다. 아니면 '대한민국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가란 국민입니다'라는 대사도 말할 것이다. 이 두 대사가 <변호인>이 건드리고 있는 결핍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의 해석에 따르면 '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혹은 '바른 의의'를 말한다. 영화는 죄없는 청년들을 빨갱이로 만들어 가는 모습들을 그렸다. 독서 청년들은 고문으로 온몸이 상처로 가득 찼다. 여기에 정의는 있는가? 없다. 영화는 그렇게 '정의'가 사라진, 올바름이 사라진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법정마저도 정의를 외면했다는 점도 묘사했다.

영화는 그 사라진 정의에 분노하기 시작한 변호인을 그린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는 말을 통해, 그는 '정의의 결핍'을 드러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의로운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대단한 일인가? 그렇지도 않다. '올바른 일'일 뿐이다. 결핍된 정의를 채우려고 하는 변호인은 영화 안에서 '대한민국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가란 국민입니다'라고 말하며 결핍을 해소한다. 당연한 정의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물론 영화는 단순하게 결핍의 해소로 끝나지 않는다. 해소된 줄 알았던 결핍은 여전히 이어진다. 죄 없는 청년들은 무죄 선고를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변호인'을 변호하려는 수많은 변호사들이 등장한다. 이들을 통해 영화는 '정의'를 혼자서 외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을 전달한다. 그렇게 결핍된 정의를 해소하기 위한 정의는 하나에서 여럿으로 확장된다.

이러한 <변호인>이 천만 관객을 돌파를 눈앞에 둔 것은 분명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다. <변호인>의 성공은 곧 지금 우리 시대의 '결핍'의 재확인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박지종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trjsee.tistory.com/),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변호인 노무현 송강호 임시완 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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