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배우 박호산

뮤지컬배우 박호산ⓒ 안산문화재단


<주군의 태양> 9회를 비롯하여 침대 CF 음악에 은은하게 흐르는 음악이 있다. 에릭 사티의 음악이다. 뮤지컬 <에릭 사티>는 당시 시대의 기류에 부응하지 않고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고수한 음악인 에릭 사티의 일생을 전기적인 시점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뮤지컬 <디셈버>의 연습도 병행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다. 8일 대학로에서 <에릭 사티>의 주인공이자, <디셈버>에서 주인공 김준수의 친구 훈을 연기할 박호산을 만났다.

- 2011년에 <에릭 사티>의 출연 제의를 받았다고 들었다. 이 작품이 마음에 든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의 절반은 같이 공연하는 배우들의 합이라고 본다. 팀워크를 중요시한다. 당시 캐스팅 제의를 받은 배우들을 보니 작품이 잘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캐스팅에 만족하던 차에 대본을 보았다. 읽어 보니 일반 뮤지컬이나 연극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음악에 맞춰 대사가 들어간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 <에릭 사티>와 <디셈버>에 출연한다.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달라.
"<디셈버>에는 1990년대와 현재가 공존한다. 제가 연기하는 훈은 1990년대 운동권 학생이다. 군대에 입대해서 한쪽 다리를 잃는다. 제대 후 다리를 무기로 정치를 하는데 본인의 정체성과는 반대로 보수 여당 정치인이 된다. 시대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에릭 사티>는 정반대다. '한 사람이 처음에 공을 굴리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 모두 공을 굴린다. 나는 그 공을 굴리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라는 건가?'라는 대사처럼 에릭 사티는 시대와는 반대되는 길을 걷는다.

19세기는 공연장에 가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어야 하는 시대였다. 음악의 퍼레이드가 펼쳐지던 시대에 에릭 사티는 거꾸로 음악이 깔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음악가다. 가구처럼 뒤로 배치되는 음악의 선구자가 에릭 사티다. 당시 에릭 사티는 각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음악이 대중적인 시대가 오면서 재조명됐다.

배우마다 연기하는 스타일이 제각각이지만 나는 캐릭터와 제 성격이 맞는 부분을 남기고는 모두 뺀다. 그리고 남은 부분을 확대해서 연기한다. 에릭 사티는 소극적이고 자기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강단이 있는 사람이다. 음악적인 소신을 굽히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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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도 모자라 <디셈버>까지 연습하고 있다. 무리하는 것 아닌가.
"공연과 연습이 겹치면 공연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연습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처럼 연습이 겹치면 양쪽 모두에게 미안하다. 작품이 언제까지 러브콜을 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배우는 꽃이다. 언제 질 지 모른다. 출연 제의가 들어오면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배우를 꽃에 비유했는데, 가령 봄꽃 축제에 특정한 꽃만 보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꽃이 예쁜 게 아니라 꽃이 핀 나무의 전경이나 그림이 예쁜 것이다. 배우는 작품에 녹아서 꽃을 피우는 존재다. 관객 역시 연기뿐만 아니라 배우의 진심을 보러 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오래된 팬들이 많다. 박호산이 하는 공연이면 볼 만한 공연이라는 걸 보여드리고 싶다.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

- 관객을 실망시키는 배우의 태도는 무엇일까.
"자기 역할에 게으른 것이다. 자기 일을 잘 할 수 있는 분이 공연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몇 시간을 투자해서 몇만 원의 공연료를 내는 관객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 분들이다. 배우와 관객이 유대감을 형성하려면 서로 성실해야 한다."

- 관객은 공연을 일종의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하기 쉽다. 요즘 대학로에 로맨틱 코미디물이 많은 것도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반면 박호산씨가 출연하는 작품은 관객을 생각하게 하는데. 
"예술은 관객을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자기 생각을 글로 만들고, 연출가는 자신의 생각을 무대 위에 표현한다. 배우는 작품에서 자기 역할을 연기한다. 그러다 보니 제 생각을 연기로 반영할 수 있는 작품을 선호하게 되었다. 창작물에 많이 출연하는 것도 아마 이런 성향 때문이 아닌가 싶다.

대학로에 트렌디한 공연이 많다. 색안경을 쓰고 보기보다는, 예전처럼 실험 정신도 많이 갖추면서 작품성 있는 공연과 공존했으면 한다. 지금은 창작지원금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IMF 전인 1990년대 말 이전에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공존했다. 홍보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아도 관객의 성향에 맞는 다양한 공연이 있었다. 입소문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은 순식간에 공연 정보가 흐른다. 정보를 보고 관객이 선택하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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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계가 힘들었을 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생각은 없었나.
"다른 매체로 옮기고 싶었지만 러브콜이 없었다. 열심히 프로필을 돌려야 했건만 그러지 않았다. '필요하면 찾겠지'하고 생각했는데 찾아주지 않더라.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3년 동안 지게차를 운전하고, 건물 유리창을 닦았고, 카페에서 노래도 했다. 꿈이 계속 바뀌었다.

중3 때 '연극배우가 되어야지'하고 생각해서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작품이 계속 있는 게 아니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에 질리면서 작품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었다. 감사하게 작품이 끊이지 않고 들어와도 결혼생활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다. 작품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이제는 작품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 그러니까 꿈이 변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욕심이다. 욕심내지 않고 계속 좋은 작품만 만났으면 좋겠다."

- 박정환이라는 이름을 갑자기 박호산으로 바꿨다. 
"10살을 주기로 인생의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10살에는 첫사랑의 설렘이 있었고, 20살 입시를 끝내고는 세상에 이렇게 많은 직업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학창시절 동안 속고 살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배우라는 꿈만 갖고 대학에 진학했는데 '도대체 뭘 했지'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실하게 대학 생활을 했다.

서른에 들어서는 작품 섭외에 어려움을 겪었다. 새벽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편하게 친구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노래방에서 서른 번이나 부를 정도로 서글펐다. 마흔이 다가오면서는 '대체 뭐가 다가올까'하는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꿈에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호산이'라고 부르더라. 왜 호산이라고 불렀을까 의문이 들었다. 3~4개월 후 이름을 바꾸려는 찰나에 꿈에서 할아버지가 부른 이름이 생각났다. 그래서 부를 호에 뫼 산으로 이름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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