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의자를 잃는 것보다 괴로운 것은 동료를 잃는 것입니다."

기억하시나요? 지난 5월 종영한 KBS 드라마 <직장의 신> 대사 중 일부입니다. 미스 김이 친구의 기획안을 가로챈 장규직에게 쏘아부친 말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정규직을 대표한다는 장규직도 막상 월급날이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이번 달도 무사히 버텼다"라고. 

헌데, '참 더럽고 치사한 세상'의 축소판인줄로만 알았던 드라마 속 직장 '와이장'을 생판 남의 일처럼 치부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국사회에서는 비정규직조차도 꿈꾸기 힘든 정신장애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다만, 그들의 직장이 '와이장'과 같은 기업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라는 사실이 다릅니다. 

정신장애인과 의사들이 1981년에 설립. 현재 6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이 연대와 협동으로 새로운 삶과 희망을 개척하고 있는 곳. 이탈리아의 대표적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꼽히는 '논첼로'(noncello)의 실화를 생생하게 스크린 위에 수놓은 영화, <위 캔 두 댓>입니다.

'넬로의 태도'... 협동조합의 주인은 '사람'

 영화 <위 캔 두 댓> 포스터.

영화 <위 캔 두 댓> 포스터. ⓒ Rizzoli Film


1983년 이탈리아 밀라노. 협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넬로(클라우디오 비시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펴다 동료들은 물론 애인에게서까지 물을 먹습니다. 그가 좌천된 곳은 아뿔싸! 정신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안티카 협동조합 180'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우표 붙이기 등 간단하지만 그마저도 뒤죽박죽입니다. 망연자실하던 넬로는 병원 이사장인 벨키오의 소개로 이들과 독특한(?) 첫 인사를 나눕니다.

이들의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해 넬로가 조합원 회의를 열지만 험악한 인상의 루카로부터 얼굴에 주먹세례만 받습니다. 다음 날, 넬로는 다시 회의를 열고 두 가지 안을 투표에 부칩니다. 조합원들은 힘은 들지만 쏠쏠하게 돈 벌 수 있는 일을 채택합니다. 이제는 무슨 일을 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무마루 까는 일을 하기로 하고 사부를 초빙해 일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해당하는 여기까지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넬로의 태도'입니다. 주먹을 휘두른 루카에 대해 징계대신 동료끼리 해결할 문제라고 선을 긋고, 우표를 괴발새발 붙인 지죠에게 독창적인 디자인이라며 칭찬하고,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황당무계한 제안도 일일이 기록하며 존중하고, 벨키오의 눈치를 보는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조합의 결정은 조합의 주인인 여러분들이 하는 것'이라고 못을 박습니다.

영화가 막을 내릴 때까지 변함없는 이 같은 '넬로의 태도'는 협동조합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협동조합의 중심은 '사람'이며, 정신장애인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쳤는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니다"라던 루카의 단언처럼, 그들 역시 우리처럼 가능성과 요구를 지니고 있으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하는 생활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또한 '넬로의 태도'는 우리 몸에 질기게 붙어있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도전이자 인권의 지평을 확장하는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가 사회적 협동조합을 배우고 준비하려는 이들만이 아니라 사람을 동원과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이유입니다.

'평등한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들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우표 붙이기 등만 하던 ‘안티카’ 조합원 루카와 지죠가 바닥에 나무마루 깔기 시공을 하고 있다.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우표 붙이기 등만 하던 ‘안티카’ 조합원 루카와 지죠가 바닥에 나무마루 깔기 시공을 하고 있다. ⓒ Rizzoli Film


첫 수주로 '안티카'는 흥분의 도가니에 빠지지만 넬로가 현장을 비운 사이 사고가 터집니다. 목재를 운반하러 간 차량이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사이 결국 폐목재로 임시 땜방을 합니다. 현장으로 돌아와 마룻바닥을 본 넬로는 기겁을 하지만 가게 주인은 '환경미술품?', '개념예술?' 등의 찬사를 쏟아내며 나머지 점포도 맡깁니다. 대박이 터진 것입니다. 이어 걷잡을 수 없이 주문이 밀려들고, 난생 처음 평등하게 분배받은 월급을 받고 조합원들은 환호작약합니다.

이 와중에 독한 정신질환 약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루카가 태업을 하자 넬로는 조합원들의 건강과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벨키오에게 투약량을 줄이자고 제안하지만 정신질환은 치료되지 않으며, 평범한 생활은 위험하다는 경고만 듣습니다. 이윽고 넬로는 조합원 총회에 모종의 안건을 회부하고, 그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채택됩니다.

마침내 그들은 정신병원에서 나와 그룹 홈을 만들고, 투약량을 절반으로 줄이며, 독창적인 나무깔기 일로 시장원리에 맞서고, 벨키오를 해임한 후 자폐증을 앓는 로비를 새 이사장에 세웁니다. 특히 절대적 권력을 휘두르던 의사 벨키오를 환자인 조합원들이 투표를 통해 해임시키는 이 결정은 협동조합의 7대 원칙 중 하나인 '조합원에 의한 관리'가 무엇이며, 조합이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같은 파격적인 결정은 정신과 의사 프랑코 바자리아가 주도한 정신보건 개혁의 결실인 '바자리아법'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는 1978년 정신장애인의 인간적인 요구가 실현되도록 '바자리아법'을 제정, 정신병원을 폐지하고 거주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영화에서 환자들이 모여든 공간이 '안티카'였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치료한다'는 이 법의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해낸 이가 바로 넬로였던 것입니다(넬로는 실존 인물입니다).  

넬로가 새로운 모범을 세울 수 있었던 힘은 '평등한 시선'입니다. 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편견의 벽에 격리됐던 그들에게서 개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괴이한 모습 이면에 감춰진 재능을 살찌우고, 협동조합이라는 조직을 통해 발현해 내는 리더십은 모두 평등한 시선에서 출발합니다. 그 결과 조합원들은 각자의 방을 단장하고, 축구를 하고, 카페에 가고,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도 배우는 등 그동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인간적인 삶'을 만끽합니다.

행복한 순간도 잠시, 사건이 터집니다. 시공 나간 집의 여인에게 푹 빠진 지죠가 꿈같은 연애 끝에 실연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안티카'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웁니다. 조합은 최대 위기에 봉착하고, 넬로는 떠나고 맙니다. 하지만 예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법. 영화는 감동적인 클라이맥스를 스크린에 펼쳐 놓습니다.

넬로 대 벨키오... 협동조합과 주식회사

 지죠의 자살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에 넬로는 ‘안티카’를 떠난다. 그가 없는 조합,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죠의 자살이 자신의 탓이라는 죄책감에 넬로는 ‘안티카’를 떠난다. 그가 없는 조합, 그러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 Rizzoli Film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해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한 사람들의 자율적인 조직체다."

국제협동조합연맹(ICA)이 정한 협동조합에 대한 정의입니다. 협동조합도 이익을 내기 위해 '사업체'를 통하지만 기업처럼 자본의 논리를 실현하기 위해 혈안이 되진 않습니다. 단지 조합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공동 소유와 민주적 운영'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1주 1표'의 의결권으로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신조로 삼는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1인 1표'의 연대와 협동으로 '자조자립'을 추구하며 사회적 책임을 신조로 삼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넬로와 벨키오는 협동조합의 가치와 주식회사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대변합니다. 넬로가 나무마루 깔기 사업을 시작하자 벨키오는 착각과 무책임한 희망을 심어준다며 반대합니다. 넬로가 조합원들의 변화 가능성을 찾고 서로 다른 차이를 인정하며, 내용이 풍부한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반면 벨키오는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불변의 철칙아래 감시와 통제로 지배하며 군림합니다.

조합원들의 변화와 성장은 협동조합의 기본 가치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넬로는 사업이 탄력을 받자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총회에서 반대표를 던지며 제동을 겁니다. 더 많은 이익도 좋지만 인간적인 삶을 위한 필요와 욕구를 채워 나가는 현실 또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조합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는 점입니다. 기피해야 할 대상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개척해 나가는 주인으로 변화된다는 것,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이와 함께 영화는 '관계'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안겨줍니다. 기업으로 치면 사장격인 넬로는 총회에서 자신의 사업 제안이 결렬되자 당혹스러워 합니다. 하지만 이내 겸허히 따릅니다. 조합원들이 '1인 1표'에 따라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 민주적 절차의 당연한 결과니까요. 그리고 '관계'를 통한 상호 변화는 벨키오를 통해서도 발현됩니다. 해임된 그가 넬로의 활동을 인정하고 붙잡으려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 없는 양질의 일자리는 없다

 무기력한 일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안티카’ 조합원들이 총회에서 서로 먼저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려고 한다.

무기력한 일상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안티카’ 조합원들이 총회에서 서로 먼저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려고 한다. ⓒ Rizzoli Film


바야흐로 사회적 협동조합이 시대의 화두가 됐습니다. 지난 한 해 노동부가 인증한 사회적기업이 600개가 넘고, 지난 6월 말 현재 1461개의 협동조합이 설립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대안의 경제'가 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협동조합 7대 원칙에 '조합간의 협동'이 명시되어 조합을 넘어서 지역과 전국 그리고 국제적인 협동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직은 맹아적, 실험적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얼마 전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고용률 70% 달성'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회적 협동조합 붐을 새롭게 조명하게 합니다. 정부는 2017년까지 238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고, 그중 40%에 이르는 92만개를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에 할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대로만 된다면 바랄 게 없습니다. 헌데, 이름부터 이명박 정부 때 시행했던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를 베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반듯한'이 남겨 놓은 것은 저임금 비정규직의 양산이라는 '반듯하지 못한' 결과뿐이었으니까요.

현대경제연구원은 현재의 시간제 일자리를 '양질'로 바꾸려면 연 평균 8%대의 경제성장이 필요하고, 연간 7조 원대의 채용지원자금이 필요하다고 분석했습니다.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방법은 하나. 일자리 쪼개기로 갈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고용 질 저하, 생산성 저하, 노동시장 왜곡으로 귀결될 게 뻔합니다. 그러다보니 공공부문으로 눈을 돌리지만 세금으로 고용을 늘리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이 반대하는 비대한 정부를 만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떨까요? 쌍수를 들고 환영할까요? 고용 없는 성장에 취해 있는 재벌대기업이 고용을 위해 투자를 확대할 리 만무합니다. 더욱이 질 낮은 시간제 노동자와 전일제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마당에 누가 비용 부담이 큰 양질의 시간제 노동자를 채용하려들까요? 결국 시간제 일자리는 실질적인 고용 증가를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제 아무리 '양질'이라고 우겨도 그것은 '질 나쁜 시간제 일자리' 즉 저임금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균형 있는 사회경제발전의 새로운 모델로서 사회적 협동조합이 주목받는 이유입니다.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의문이라고요? 영화의 모델 '논첼로'는 이후 원예업, 청소업, 가구수리, 도예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베네치아의 라 베니체 극장,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전 지하 수리 작업 등에 참여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량적 업적주의에 연연하지 않고, 땀과 노동의 가치가 존중되고,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들의 인권까지 회복하고, 열린 연대와 협동으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해 내는 것. 그럴 때 양질의 일자리는 창출되고, 그것이 일자리 창출의 정도(正道)라고 <위 캔 두 댓>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위 캔 두 댓> 관람 안내
영화 <위 캔 두 댓>은 예비사회적기업인 (사)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http://blog.naver.com/kobaff)에서 공동체 상영신청을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상영료는 1명당 5500원이며, 최소 신청인원은 30명이상이다. 문의 070-8725-8339.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는 '장벽을 없앤다'는 뜻이다. 베리어프리 영화란, 기존 영화에 시각장애인을 위해 음성해설을 삽입하고 청각장애인을 위해 소리 정보를 자막으로 표시한 영화를 말한다.

2011년 이후 <7번방의 선물> <엔딩노트> <도둑들> 등 모두 11편의 배리어프리 영화를 만들어 문화소외계층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위 캔 두 댓 논첼로 사회적 협동조합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 고용률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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