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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영화감독이자 배우 겸 작가인 우디 앨런은 1935년 생으로 올해 77세를 맞이하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를 속일 수는 없는지 머리에는 백발이 성성하고 그렇잖아도 왜소했던 체구는 구부정하게 축 늘어져 이제는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대개 은퇴를 맞이하여 안정된 노후를 준비하는 노년기, 우디 앨런은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한 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올해도 이탈리아에서 촬영한 신작 <로마 위드 러브>를 지난 18일부터 국내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우디 앨런의 영화계 입성 초창기는?

스탠딩 코미디언 출신으로 영화 시나리오 집필을 통해 할리우드에 입성한 우디 앨런은 1966년 <무슨 일이야, 타이거 릴리?>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는 일본의 첩보영화를 싼 가격에 사들여 음성 트랙을 제거한 후에 우스꽝스러운 대사를 더빙하여 짜깁기한 것으로, 우디 앨런 감독의 '정식데뷔작'으로 인정하기에는 다소 민망한 수준의 작품이다.

감독으로서 그의 본격적인 데뷔작으로 통칭되는 작품은 1969년에 개봉한 <돈을 갖고 튀어라>로, 코미디작가 겸 배우로서의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코미디 영화다. 어느 어수룩한 좀도둑의 일생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이 영화에서 우디 앨런은 스스로 주인공 버질 역을 맡아 발군의 슬랩스틱 연기를 보여줬다.

초창기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들은 이렇듯 가벼운 코미디물을 지향했다. 그 자신이 코미디 영화의 집필과 연출에 자신이 있을뿐더러, TV 토크쇼 등으로 널리 알려진 코미디언으로서의 명성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제작자의 산업적 이해관계도 어느 정도 작용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70년대 중반까지 그는 <바나나 공화국>, <당신이 섹스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모든 것>, <슬리퍼>, <사랑과 죽음> 등 SF와 시대극, 정치풍자를 버무린 실험적 성격의 코미디영화로 할리우드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된다.

우디 앨런이 평단의 인정을 받은 최초의 작품은?

 영화 <애니 홀>의 한 장면

영화 <애니 홀>의 한 장면 ⓒ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우디 앨런에 대한 세간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 작품은 1977년에 개봉한 <애니 홀>이었다. 스탠딩 코미디언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만 매사에 비관적인 염세주의자 앨비 싱어(우디 앨런)가 당차고 쾌활한 여성 애니 홀(다이앤 키튼)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헤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다룬 이 로맨틱코미디 영화는,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의 삶을 사유하고자 한 70년대 이후 우디 앨런 필모그래피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우디 앨런의 자전적 영향이 강하게 드리워진 주인공 앨비 싱어 또한 이후 만들어진 무수한 영화들에서 약간의 변형을 가하며 숱하게 등장한 남성캐릭터의 원형이 된다. 개봉 당시 미국의 평단과 관객들은 이 영화에 환호했으며, 그저 웃기는 영화를 만드는 코미디언으로만 치부됐던 우디 앨런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는 계기가 된다.

여담이지만, <애니 홀>의 성공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애니 홀>은 1978년 제5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각본상 등 총 4개의 주요 부문에서 수상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는 모든 감독들이 꿈꿀만한 최고의 영예이건만, 우디 앨런은 정작 이 날 시상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시상식이 거행된 월요일이 공교롭게도 그가 정기적으로 재즈 클럽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날과 겹쳤는데, 이에 우디 앨런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포기하고 평소처럼 연주에 참여하기 위해 클럽으로 향한 것이다. 수다스럽고 우유부단한 영화 속 이미지와 달리 진중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우디 앨런의 실제 성격을 드러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겠다.

80년대, 우디 앨런의 전성기

<애니 홀>의 성공 이후, 그의 영화적 실험은 더욱 예측 불허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코미디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무겁고 진지한 영화 <인테리어>, 지금까지도 <애니 홀>과 더불어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맨하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인 페데리코 펠리니의 <8과 1/2>에서 강한 영향을 받은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등 일관된 범주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듯 한 우디 앨런의 행보는 평단과 대중들 사이에서 점차 논쟁의 대상이 된다.

코미디 영화로 명성을 얻었지만 더 이상 웃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 감독의 이야기인 <스타더스트 메모리즈>는 이 시기 우디 앨런의 심정을 어느 정도 대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영화들을 곡해하며 엉뚱한 해석으로 대중들을 호도하는 지식인, 평론가들을 조롱 섞인 시선으로 그려내기도 하였다.

뉴욕을 벗어나지 않으며, 철저히 미국을 살아가는 현대 도시인들의 삶을 영화 속에 담아내고자 한 우디 앨런이었지만 그 영화적 형식에서는 점차 전통적인 미국영화의 자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도 밝힌 바, 우디 앨런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닮고 싶어 하던 감독들은 미국보다는 유럽의 시네아스트들이었다.

80년대에 이르러 내놓은 일련의 영화들-<한나와 그 자매들>, <9월>, <범죄와 비행>-은 그가 평소 존경해 마지않던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들에 강한 영향을 받은 작품에 속한다. 그가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보다 인정받는 작가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도 80년대에 내놓은 영화들 덕분이었다.

우디 앨런의 개인사적 위기, 그리고 90년대의 영화들

 영화 <부부일기>의 한 장면. 이 영화를 끝으로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는 결별하게 된다.

영화 <부부일기>의 한 장면. 이 영화를 끝으로 우디 앨런과 미아 패로는 결별하게 된다. ⓒ 소니픽쳐스 코리아


90년대에 접어들어 우디 앨런은 어쩌면 그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위기에 해당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당시 그는 자신의 영화 몇 편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하였던 배우 미아 패로와 사실혼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슬하에는 사첼이라는 이름의 친자식이 있었고, 두 명의 아이를 새로 입양하기도 하였다. 미아 패로는 이미 전 남편 앙드레 프레빈과의 결혼생활 중 몇 명의 아이들을 입양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훗날 우디 앨런과 스캔들을 일으킨 한국 출신의 순이 프레빈이었다.

순이가 스무 살이 되던 무렵, 미아 패로는 집에서 우연히 그녀의 누드 사진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찍은 장본인이 다름 아닌 우디 앨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때 이미 우디 앨런과 순이 프레빈은 성적인 관계를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한 단계였다.

충격적인 사실에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미아 패로가 세 자녀의 자녀양육 소송을 제기하면서 기나긴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소송 결과가 어찌되었건 이 스캔들로 우디 앨런의 대중적 이미지는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인터뷰와 언론을 극도로 기피하여 매년 발표하는 신작 소식으로나 간간히 얼굴을 비추던 우디 앨런은 이 사건으로 연일 매스컴에 노출되었고, 그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근친상간을 연상시키는 외설스런 조롱의 대상이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러한 개인사의 곡절에도 불구하고, 우디 앨런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예년처럼 매년 한편의 영화를 내놓는 꾸준함을 보인다. 미아 패로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던 <부부일기>와 <맨하탄 살인사건>,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마이티 아프로디테>, <해리 파괴하기> 등은 이 시기 만들어진 우디 앨런의 수작에 속한다.

그 가운데 90년대 중반에 만들어져 그의 후기작에 속하는 영화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마이티 아프로디테>는 그의 세계관에 가해진 일련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시기 우디 앨런은 미아 패로와의 관계를 청산한 후, 순이 프레빈과 부부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생물학적 나이와 개인사의 큰 변화는 비관론과 염세주의로 점철되었던 그의 영화들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듯, 인생에 관한 조심스런 낙관론과 희망이 막연하게나마 엿보인다.

뉴욕을 떠나기로 한 우디 앨런, 새로운 방향성 제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한 장면 ⓒ 더블앤조이 픽쳐스


우디 앨런의 꾸준한 영화 작업은 2000년대에 이르러서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영화들은 점차 식상한 도식을 반복하는 범작이라는 평가와 함께 90년대에 이르러 제기되기 시작하였던 매너리즘에 관한 지적이 한층 거세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4년에 개봉한 <멜린다와 멜린다>의 미지근한 반응 직후, 우디 앨런은 평생의 영화적 배경이 되었던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의 나이는 당시 70세였다. 뉴욕을 벗어나고자 결심한 것이 변화에 대한 갈망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때로부터 우디 앨런의 기나긴 '유럽 방랑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런던이라는 전혀 낯선 환경에서 만든 그의 서른네 번째 장편영화는 이전까지 우디 앨런이 만들어온 영화들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범죄스릴러 영화, <매치 포인트>였다. 전면적으로 제기되는 계급갈등의 문제, 팜므파탈을 연상케 하는 여성 캐릭터의 등장, 파격적 섹스 신과 범죄 묘사는 과거 우디 앨런의 영화들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 있어 충격에 가까운 변화였다. 150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만든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23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성공을 거두었고,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며 우디 앨런의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한 작품이 되었다.

<매치 포인트>의 성공에는 당시 스물 한 살의 나이로 도발적인 매력을 자아냈던 여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공이 적지 않았다. 그녀는 주인공 놀라의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함으로써 우디 앨런 감독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이후에 만들어진 두 편의 영화-<스쿠프>,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도 연거푸 출연하며 다이앤 키튼, 미아 패로에 이은 '뮤즈'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영국 런던에서 <매치 포인트>와 <카산드라 드림>, <환상의 그대>를 만든 우디 앨런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를 만들었고,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미드나잇 인 파리>를 찍는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뉴욕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십 년간 만들어온 우디 앨런은, 이 시기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배경으로 영화를 찍으며 철저한 외지인의 시선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특히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와 <미드나잇 인 파리>는 그 배경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관광지 홍보영상으로도 무방해 보일 정도다. 우디 앨런은 2012년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로마 위드 러브>를 만든 후, 뉴욕으로 건너가 현재 <블루 자스민>이라는 제목의 차기작을 촬영 중이다.

우디 앨런의 신작, <로마 위드 러브>

 영화 <로마 위드 러브> 포스터

영화 <로마 위드 러브> 포스터 ⓒ (주)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로마 위드 러브>는 우디 앨런의 마흔 한 번째 장편영화이며, <스쿠프> 이후 6년 만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 작품이다. 우디 앨런 영화에 상당수 출연하였던 배우 주디 데이비스가 오랜만에 그와 호흡을 맞췄으며 연기파 배우 알렉 볼드윈과 페넬로페 크루즈, 떠오르는 신예배우 제시 아이젠버그와 엘렌 페이지가 출연하였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인 우디 앨런의 신작을 극장에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슬프고 아쉬운 일이다. 물론 이러한 아쉬움을 그에게 털어놓더라도 그는 한마디 냉소적인 농담으로 응수해버리고 말 테지만 말이다. "나는 죽음에 반대할 뿐이다!" <로마 위드 러브>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이어 노장감독이 선사하는 유쾌한 웃음을 즐길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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