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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신발이 작아 물집이 생긴 인디아. 그녀에겐 새 신발이 필요하다.

▲ 인디아 신발이 작아 물집이 생긴 인디아. 그녀에겐 새 신발이 필요하다. ⓒ CJ E&M


고전 발레처럼 아름다운 스릴러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를 보았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고전 발레의 시청각적 운율이 느껴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스릴러였다. 미장센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웠고 적재적소에 배치된 음악은 서사적 긴장을 활시위처럼 당겨주었다.

<스토커>는 박찬욱이 할리우드에서 찍는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시나리오를 쓰지 않은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석호필'로 친근하게 불리는 웬트워스 밀러의 각본은 스토커 가(家)라는 부유하지만 광기가 핏속에 흐르는 미친 가문의 연대기다. 이쯤 되는 각본이라면 감독으로서 연출력을 한껏 보여주기에 적절하다고 하겠다.

장례식 남편을 잃은 이블린과 아버지를 잃은 인디아

▲ 장례식 남편을 잃은 이블린과 아버지를 잃은 인디아 ⓒ CJ E&M


열여덟 살 생일에 인디아 스토커(미아 바시코브스카)는 자동차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장례식에 그동안 존재도 모르고 있었던 삼촌 찰리 스토커(매튜 구드)가 찾아온다. 왜 그런지 명확히 제시되지 않지만 죽은 남편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이블린 스토커(니콜 키드먼)은 젊고 친절한 찰리에게 호감을 느낀다.

스토커 가의 저택에서 기묘한 동거

도시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는 큰 집에 이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동그랗고 커다란 돌덩이가 군데군데 놓인 널따란 정원이 있고 테니스장도 딸린 이 집은 중세의 성(城)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커다란 집을 이블린이 직접 관리하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집안일을 돌본 늙은 가정부 맥게릭 부인(필리스 소머빌)이 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찰리가 온 직후 맥게릭 부인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다. 맥게릭 부인은 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하다.  

기묘한 동거 셋 사이에는 관능적 긴장이 흐른다

▲ 기묘한 동거 셋 사이에는 관능적 긴장이 흐른다 ⓒ CJ E&M


이 영화의 제목인 '스토커'는 그 유명한 <드라큘라>의 작가 브람 스토커의 성(姓)에서 따왔고,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모티프 중 몇 가지를 빌려왔다. 찰리는 연령을 초월하여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피아노 연주 실력도 수준급이다. 죽은 성주의 아내와 딸은 장례식에 찾아온 이 남자에게 금세 빠져든다. 그뿐인가. 찰리는 혈육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피를 은유하는 포도주를 마시는 찰리의 눈빛은 매혹적으로 빛난다. 찰리의 권유로 포도주를 처음 마시는 인디아는 또 어떤가. <스토커>는 <드라큘라>를 매우 능숙하고 우아하게 변주한다.

비밀을 알고 있으면 위험하다

찰리가 마성적 매력으로 스토커 가의 안주인과 외동딸을 유혹하고 있을 때, 역시 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진 고모(재키 위버)가 도착한다. 그녀는 맥게릭 부인 만큼은 아니지만 늙은 여자다. 찰리가 있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한 진 고모는 그를 보자마자 겁에 질려 떤다. 그녀 역시 찰리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에블린에게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다고 하지만 에블린은 진 고모가 자꾸만 뭔가를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거절한다. 에블린이 간섭받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 숨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찰리에 대한 관능적 욕망이다.

공중전화 씬 <스토커>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 공중전화 씬 <스토커>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 CJ E&M


에블린의 신경질적인 거절에다 그녀 자신의 엄습한 두려움 때문에 진 고모는 넓은 스토커 가의 저택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와 허름한 모텔에 투숙한다. 그 다음은 예상대로이다. 찰리는 진 고모가 두고 간 핸드폰을 가지고 그녀를 찾아온다. 찰리를 다시 본 그녀는 사신(死神)을 본 듯이 겁에 질린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진 고모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다가 찰리와 조우하는 공중전화 박스 씬은 압권이다.

<드라큘라>와 <햄릿>과 <빨간 신>의 모티프 변주

<스토커>는 <햄릿>의 모티프를 역전시켜 가져오기도 한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였다고 의심되는 숙부와 자신의 어머니가 재혼하자 '사느냐 죽느냐'하는 번민에 빠진다. 햄릿은 어머니를 저주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숙부를 죽인다. <스토커>의 인디아는 삼촌과 어머니의 관능적 사랑을 저주하는 대신 억눌려 있던 본능에 눈떠 또래 청년과 육체적 유희를 시도한다. (청년의 입술을 뜯어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드라큘라>의 모티프인 흡혈의 변주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의 초반에 인디아는 유약하고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로 등장하지만 찰리만큼이나 마성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통제를 받던 인디아의 본능이 찰리와의 접촉을 통해 폭발하는 것이다. 찰리와의 동질성을 보여주는 인디아의 샤워 씬은 진 고모의 공중전화 씬과 더불어 이 영화의 또 다른 압권에 해당한다.

스토커 가 저택 외따로 떨어진 중세의 성 같은 극적 공간

▲ 스토커 가 저택 외따로 떨어진 중세의 성 같은 극적 공간 ⓒ CJ E&M


인디아의 아버지 리처드는 새 사냥을 통해서 딸의 본능을 통제시켰다. 그리고 찰리와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찰리가 인디아에게 보낸 편지를 모두 감추고, 해마다 생일선물로 인디아가 받아보는 구두를 누가 보내는 것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이 구두 역시 <빨간 신>의 모티프를 뒤틀었다고 볼 수 있다. 빨간 신은 신발을 신는 사람이 통제 불가능한, 멈출 수 없는 욕망을 은유한다. 찰리가 인디아의 성년 기념으로 신겨주는 하이힐은 그녀에게 내재된 욕망을 폭발시킨다.

찰리는 이블린의 몸이 달아오르게 유혹해 놓고는 인디아에게 함께 떠나자고 제안한다. 왜 이블린이 아니라 인디아인가? 왜 스토커 가의 저택을 남겨두고 뉴욕으로 떠나자고 하는 것일까? 드라큘라는 이제 갓 성년이 된 젊은 여자를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피를 나누어 마신 여자를 사랑한다. 인디아는 찰리의 비밀을 알아차리고도 그와 떠나기로 한다. 무엇보다 둘은 피를 나누어 마신 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블린이 딸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관능의 싸움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할 수가 없어 찰리를 마지막으로 유혹할 때, 인디아는 일종의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분출된 본능에 의지해 최종적 선택을 한다.

찰리와 이블린 딸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유혹

▲ 찰리와 이블린 딸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유혹 ⓒ CJ E&M


섬세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이 영화에서 박찬욱의 섬세한 연출력은 여러 장면에서 돋보인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인디아가 달걀껍질을 벗기는 장면은 표현주의적인 음향과 함께 등장인물의 불안한 내면심리와 음산한 극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찰리와 인디아의 동질감을 확인시켜주는 피아노 연주 장면 역시 그렇다. 둘의 연탄곡은 처음에는 경쟁적이지만 나중에는 인디아로 하여금 성적 흥분을 느끼게 할 만큼 에로틱하다.

관능적 연주 찰리와 인디아의 연탄곡 연주는 관능적 체험이다

▲ 관능적 연주 찰리와 인디아의 연탄곡 연주는 관능적 체험이다 ⓒ CJ E&M


또한 <스토커>는 박찬욱의 어떤 영화보다도 음악의 배치와 활용이 뛰어나다. 이를테면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의 아리아는 스토커 가의 시각적 인상과 더불어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정서를 드러낸다. '일 트로바토레'는 음유시인 혹은 무예와 문예에 모두 뛰어난 기사란  뜻을 갖고 있어서 찰리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래서 인디아가 보안관이 던진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자 찰리가 '일 트로바토레'라고 대신 대답하는 장면은 흥미롭다. 찰리의 대답은 거짓이면서 동시에 참이 되기 때문이다. 작지만 즐거운 극적 아이러니를 찾아볼 수 있는 사례다.

디렉션하는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이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연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디렉션하는 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이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연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CJ E&M


할리우드로 날아간 박찬욱이 들고 온 <스토커>는 그의 장점이 고스란히 들어간 데다 우아함은 배가되었다. 그의 콤비인 정정훈 촬영감독의 유려한 촬영도 돋보이고, 조연을 포함해서 연기자들의 앙상블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성공적인 작품으로 귀환한 박찬욱 감독의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스토커>, 2013년 2월 28일 개봉. 박찬욱 감독, 미아 바시코프스카, 매튜 구드, 니콜 키드먼 주연. 청소년 관람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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