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하이는 자신들의 서사시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하는 상황을 맞았다.

에픽하이는 자신들의 서사시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하는 상황을 맞았다.ⓒ YG엔터테인먼트


모두 알다시피 에픽하이에게 지난 2년은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끝없는 의심이 그들을 괴롭혔고 한 명은 입대했으며 다른 한 명은 사랑을 잃었다. 사람들은 이들의 위기가 해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기도, 다음에 내놓을 앨범의 사운드가 이제까지의 앨범 중에서 가장 공격적일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진실은 하나지만 그 많은 추측은 그것을 덮어버렸다. 그렇게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그간의 넘쳐나는 추측을 생각하면 새 앨범 <99>는 상당히 의외의 결과물이다. 그들은 분노보다 웃음을, 증오보다는 용서를 택했다. "부질없는 착한 마음은 이 세상에선 결함이니까"를 외치던 독기에 찬 타블로는 이제 "날 사랑한다, 날 미워한다, 둘 다 고맙지 뭐"라고 말한다. 용서라는 길을 택할 줄은 알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예상을 깬 위트와 가벼움. 그것이 빈말이 아닌 이유

그들의 용서는 빈말이 아니었다. 편곡은 이전의 에픽하이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고 미디로 찍은 킥 드럼과 스네어는 리얼 드럼의 색을 입었다. 미디의 색을 반쯤 뺀 비트 위에는 셋이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감정적 여유가 채색됐다. 타이틀 곡 'Don't Hate Me(돈 헤잇 미)'의 비트와 멜로디 전개에서는 그들이 평소 좋아한다고 밝힌 위저(Weezer) 특유의 위트마저 느껴진다.

'아까워'의 위트는 'Don't Hate Me'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시작한다. 비트박스와 퍼커션을 루프한 상태에서 이뤄지는 랩과 머리가 울리는 두터운 베이스, 그리고 개코의 보컬이 겹쳐 만들어진 그루브는 의외로 흔하지 않은 아카펠라식 전개 때문인지 괜히 웃음이 난다. 여기에 "넌 아직 젊기에, 괜찮은 남자는 많기에"라고 말하는 깨알 같은 오마주까지.

래핑 스타일은 사운드의 색깔 그 이상으로 변화의 폭이 크다. 예전의 밀도 있고 섬세했던 라임과 바운스는 리듬을 큼직하게 가져가며 직선적인 느낌을 주는 스타일로 변했다. 타블로의 주특기인 영어 랩 역시 대부분 한국어로 채워졌다. 멜로디의 비중도 커졌다. '사랑한다면 해선 안 될 말'과 '악당'은 그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곡이다. 간단히 말해 전체적으로 노래가 많이 쉬워졌다. 과장을 조금 보태 이지 리스닝을 언급해야 할 정도다. 99%를 위한 앨범이라는 에픽하이의 언급은 확실히 허언이 아니다.

에픽하이의 또 다른 상처, 서사시의 단절

 새 앨범 99의 자켓 사진. 99%를 위한 앨범이라는 에픽하이의 언급은 확실히 허언이 아니다.

새 앨범 99의 자켓 사진. 99%를 위한 앨범이라는 에픽하이의 언급은 확실히 허언이 아니다.ⓒ YG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리스너들의 이질감이 증폭되는 부분 역시 이 지점에 있다. '팬(Fan)'과 '원(One)'의 음원 성적이 말해주듯, 이미 에픽하이는 대중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강력한 팝 센스를 갖고 있었다. 자신들의 스타일과 대중의 기호가 만나는 그 지점을 정확히 공략할 줄 알았다. 많은 대중이 선 공개된 '춥다'의 사운드를 듣고 4년 전 만들어진 '우산'을 떠올린 이유는 거기에 있다. 대중은 그들이 굳이 더 쉬워져야 하는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우산'이 들어있는 <Pieces, Part One> 앨범에는 '낙화'와 'The Future'같은 묵직한 래핑 트랙이 다수 포함돼 있지만 대다수의 대중은 그 트랙의 조합을 절대 비주류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앨범에는 상업적 성공과 함께 수작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99%를 표방한 에픽하이의 스타일 변화는 뭔가 새삼스러운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단절적이다. 전작과의 연관성을 통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고립된 느낌이다. 다작 스타일의 뮤지션에게 시간의 단절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랩은 노래의 일부라기보다 글에 가깝다. 순간 떠오르는 악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을 넘어선다. 글은 필연적으로 스토리텔링을 요구한다. 곡의 콘셉트를 잡고 가사에 스토리를 불어넣기 위해선 전작과의 연계성, 그에 따르는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그래야 전작의 앨범을 나침반 삼아 보완된 결과물을 내놓거나 지난 앨범의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른 경로를 찾아갈 수 있다. 다작 스타일의 래퍼일수록 이 흐름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Map The Soul>에서 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에픽하이의 디스코그래피는 에픽하이가 구축한 응용과 발전의 서사시, 그 자체였다. 그들은 6개월 간격으로 새 앨범을 내면서 자신들의 흐름을 일관되게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제 그 흐름은 끊겼다. 자신들의 서사시를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전작인 <에필로그>의 연장선상으로 앨범을 만들기엔 오랜 시간이 지났고 좀 더 새로운 경로를 찾기엔 기대치가 너무 높다. 하지만 재기를 위해서는 양자택일이 필요했던 상황, 그들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새로운 시도를 모색했다. 그리고 그것이 에픽하이가 새로 쓰는 서사시의 첫 문장이 됐다. 지금의 결과물이 고립된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에픽하이의 레슨 시리즈와 피해망상 파트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지금의 앨범은 확실히 불만족스러운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지금 에픽하이에겐 그 무엇보다 시간의 축적이 필요하다. 단 한 줄의 문장이 서사시가 될 순 없으니까. 그들의 첫 문장이 분노가 아닌 용서와 웃음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참 다행스럽다. 회복한 새의 날갯짓이 처음부터 능숙할 순 없는 법이다. 안타깝지만 새의 날갯짓에 힘이 붙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들의 회복이 생각보다 빠르다는 사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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