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월화드라마 <울랄라 부부>의 기세가 매섭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작품이지만 독특한 소재와 특유의 코믹한 전개로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경쟁작이 MBC의 100억 대작 <마의>라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인 결과다. 초반 판세가 중요한 시청률 싸움에서 <울랄라부부>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셈이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울랄라 부부>의 성공에서 배우 신현준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신현준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 '배우 신현준'의 23년 연기 내공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 영화 <장군의 아들>의 하야시 역할로 데뷔한 배우 신현준 ⓒ 태흥영화사
흥행실패에 스캔들까지...슬럼프를 겪다1990년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에서 하야시 역을 맡으며 데뷔한 신현준은 카리스마 있는 외모와 강렬한 캐릭터로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무명생활이 없이 바로 인기배우가 된 그의 연예계 생활은 매우 순탄했다. 하는 일마다 잘됐고, 출연하는 작품마다 큰 흥행을 거뒀다.
<젊은 날의 초상> <화엄경> <장군의 아들2> <장군의 아들3>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작품에 출연하며 착실히 커리어를 쌓았던 신현준은 1996년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황 장군 역을 맡으며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집착과 갈망을 농도 짙은 연기력으로 소화했다.
▲ 영화 <맨발의 기봉이> 포스터 ⓒ 태원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신현준 역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8년 <퇴마록>의 흥행실패는 치명타였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걸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작비인 15억 원을 쏟아부었던 영화 <퇴마록>은 관객의 외면을 받으며 손익분기점도 채 넘기지 못했다. 신현준의 흥행력에 의문부호가 붙은 것이다.
같은 해 출연했던 드라마 SBS <백야 3.98>의 시청률 저조 역시 뼈아픈 상처로 남았다. 당초 <백야 3.98>은 <여명의 눈동자><모래시계> 신화를 만든 김종학이 연출을 맡고 신현준을 비롯해 심은하, 최민수, 이병헌, 이정재, 진희경 등 국내 내로라하는 인기스타가 총출동한 드라마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과 빈약한 스토리 전개로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고 제작비 대비 가장 실패한 드라마라는 오명을 썼다. 신현준으로선 야심 차게 출연을 결정했던 영화와 드라마 모두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방만한 그의 사생활 관리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같은 작품에 출연하는 여배우들과 스캔들에 휩싸였던 신현준은 구설에 오르는 일이 잦았다. 특히 2001년 물의를 빚은 삼각 스캔들은 신현준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임권택 감독이 "이제 스캔들 좀 그만 일으켜라"고 진지하게 충고할 정도로 그의 사생활 관리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코미디 배우로의 전향, 그리고 부작용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비천무><싸이렌><블루><페이스> 등 그가 선택한 대부분의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드라마 출연 역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SBS <천국의 계단>(2003)으로 반짝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이미 모두 권상우에게 뺏긴 뒤였다. 위기라면 큰 위기였다.
이 상황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바로 '코미디'였다. 대중성과 흥행성이 어느 정도 담보된 코미디 장르는 신현준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2005년 <가문의 위기>를 시작으로 신현준은 과거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를 모두 포기한 채 '코미디 배우'로 확실히 전향했다.
신현준의 파격적인 시도는 흥행 면에서 큰 효과를 봤다. <가문의 위기>(2005), <맨발의 기봉이>(2006), <가문의 부활>(2007) 등의 연속 흥행으로 그는 오랜만에 단맛을 맛봤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선택한 이미지 전복 전략이 주효하게 먹혀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부작용은 적지 않았다. 우선 <가문> 시리즈를 비롯해 작품성을 따지지 않고 여러 코미디 영화에 무차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티켓 장사'에 몰두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진지한 작품이나 캐릭터를 연기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흥행성이 회복되는 대신 배우 이미지가 추락하고 연기력이 평가 절하되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신현준으로선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잡으라'는 대중의 과제를 받아든 셈이다.
신현준의 부활, 그 속의 단순한 진리결국 2012년, 절치부심 끝에 신현준은 드라마 SBS <바보엄마>, KBS 2TV <각시탈><울랄라 부부>를 통해 대중이 부여한 과제를 확실히 해결했다. SBS <바보엄마>에서 다소 괴팍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지고지순한 교수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 시청자들의 갈채를 받은 그는 <각시탈>의 이강산 역으로 23년 연기 내공을 폭발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바보인 척 살아가지만 실은 대한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는 1대 각시탈 이강산 캐릭터를 강렬하게 표현한 그는 양 극단을 오가는 야누스적 연기로 '신현준의 재발견'이라는 호평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동생 주원(이강토 역)에 의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는 희극과 비극, 코미디와 정극을 넘나드는 유려함으로 <각시탈>을 흔들림 없이 견인했다.
<각시탈>을 성공리에 끝마친 신현준은 최근 <울랄라 부부>에서 다시 한 번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여자 영혼이 들어간 남자 역할을 실감 나게 연기하는 그는 완벽한 캐릭터 분석과 맛깔나는 대사 전달, 치밀한 애드리브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가히 신현준의 원맨쇼라고 할 만큼 <울랄라 부부>에서 신현준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넓고도 깊다.
▲ 최근 빼곡한 메모로 화제를 모은 신현준의 대본 ⓒ KBS
이렇듯 신현준은 이 세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활을 모두에게 선포했다. 시청률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을 뿐 아니라 그동안 평가 절하됐던 연기력 역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흠 잡을 데 없는 부활이다. 평단, 대중 할 것 없이 신현준이 2012년 가장 빛난 배우 중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신현준의 부활은 '배우는 연기와 작품으로 승부한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는 대중의 요구를 회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오로지 좋은 작품과 자신의 실력만 갖고 보란 듯이 정면돌파했다. 신현준의 용기 있는 선택이 오늘날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 것이다.
지금의 신현준은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도, <맨발의 기봉이>의 신현준도 아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배우라는 이름을 되찾은 그는 예전보다 훨씬 성숙하고, 예전보다 훨씬 깊이 있는 품격을 자랑한다. 변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장르를 가리지 않는 이 배우의 '오늘'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이유다.
원로배우 박근형은 "지금도 대본을 받으면 가슴이 떨린다"고 했다. 신현준 역시 그런 배우로 영원히 대중 곁에 머무르길 바란다. 멋진 오늘을 살아가는 배우 신현준의 '내일'이 어떠할지 자못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