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와 여자'. 언제부터인가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이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됐다. 야구장에서 화려한 몸짓으로 흥을 돋우는 치어리더때문만은 아닐터. 야구는 더이상 '남자'들만의 스포츠가 아니다. 여자 야구심판과 여자 기록원, 사회인 야구단에서 활약하는 여자들의 야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기자말>

"스투-라잌-"
"아웃-"

SBS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신사의 품격> 속 서이수(김하늘 분)가 힘차게 외친다. 프로덱터라고 불리는 상체 보호대를 입고 무릎부터 발목까지 렉가드를 착용했다. 모자와 마스크는 물론, 팔 보호대까지 몸 전체를 심판 장비로 중무장했다.

극 중 윤리교사이자 아마추어 사회인 야구단 심판을 맡고 있는 서이수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심판 모션과 함께 "스트라이크"와 "볼"을 외친다. 그런 서이수에게 관심을 보이는 김도진(장동건 분)과의 러브라인도 이 야구장에서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SBS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고등학교 윤리 교사이자 야구심판 역할을 맡고 있는 서이수(김하늘 분)

SBS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고등학교 윤리 교사이자 야구심판 역할을 맡고 있는 서이수(김하늘 분) ⓒ SBS


드라마 <신사의 품격> 인기가 높아지면서 극 중 서이수가 열연하고 있는 야구심판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에 "야구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싶어요","야구심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등의 질문이 올라올 정도다.

현재 공인된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명지전문대학·한국야구위원회(KBO)·대한야구협회(KBA)·전국야구연합회(KBF)가 공동으로 설립한 야구심판학교를 나오거나 심판스쿨을 마쳐야한다.

명지전문대학·한국야구위원회(KBO)·대한야구협회(KBA)·전국야구연합회(KBF)가 공동으로 설립한 야구심판학교는 현재까지 3기 수강생들을 배출했고, 올해 11월 4기 수강생을 모집한다. 프로야구심판들이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미 배출된 심판만 300여 명이 넘는다. 그들은 각종 야구리그에서 심판으로 활동 중이다.

야구심판학교는 전문과정과 일반과정으로 나눠져 있다. 일반인들은 10주 일정의 일반과정 교육을 받으면 된다. 매주 금·토·일 총 160시간 동안 교육이 진행된다. 이론과 실기를 함께 배운다. 야구 규칙은 물론 야구사 등을 배우기도 한다. 수강료는 25만 원 정도다. 전문과정은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 각 지부 및 산하단체(리틀야구연맹 등), 국민생활체육 전국야구연합회 각 지부 소속 심판이 듣는 과정이다.

2년차 여자심판, 그녀는 왜 야구심판을 할까

야구심판학교 졸업생, 심판, 그중에서도 여자, 김혜정(41)씨를 만났다. 야구심판학교 2기 졸업생이다. 어느덧 심판 2년차란다. 지난 7월 26일 일요일, 배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사회인리그 경기가 있었다.

 심판을 보는 김혜정씨.

심판을 보는 김혜정씨. ⓒ 강혜란

김혜정씨는 야구를 했던 아들과 사회인야구리그를 뛰는 남편 덕분에 심판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다.

"신랑이 사회인 야구를 하고 있거든요. 가끔씩 구경을 가다 보니 야구에 빠졌죠. 집에 연년생 아들 둘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공터만 보이면 우리가족은 야구를 했어요. 게다가 우리집 둘째 아이가 2년 정도 야구를 하기도 했고요. 아들이 야구를 하던 그 시점에 '내가 야구를 더 많이 알면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생각했죠."

아이 교육을 위한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엄마 김혜정씨를 야구심판학교로까지 인도했다. 물론 야구를 좋아한 이유도 있었다. 가족들 몰래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공부가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단다.

"야구를 좋아하기는 해도 룰을 다 아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게다가 다른 (주로 남자)수강생들은 사회인리그에서 뛰던 분들이었는데요. 뭐 '콜'을 외치거나 '세잎','아웃' 판정을 내리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데 가령 이런 경우죠. 실제로 야구를 하던 분들은 공이 방망이에 맞으면 그 타구가 어디로 향할지를 압니다. 해봤으니까요. 저는 그런 부분에서 좀 버벅댔어요. 공이 어디로 갈지 몰라 고개만 도리도리했어요. 이제서야 공을 치면 '아, 저쪽으로 (공이)가니까 나는 여기에서 이쪽을 바라보면 되겠구나' 해요."

심판학교에 대해 더 물었다.

"필기수업과 실기수업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체계적이에요. KBO, KBA 프로심판들이 가르치기 때문에 이곳에서 수료만 하면 다들 '얘네들(수료생들)은 잘한다'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아, 실기시험이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생각보다 그렇진 않아요."

같이 졸업한 수료생들끼리 지금도 카페를 만들어 연락하고 지낸다. 모두들 심판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단다.

"학교 다니면서 정말 재밌었어요. 함께 배운 동기들은 리틀 야구단이나, 서울시야구협회 같은 곳에 소속돼서 일하고 있어요. 일단 야구심판학교를 수료하면 국민생활체육회 소속이 돼요. KBA나 KBO는 발탁돼야 하고요. KBA에서 1년 정도 뛰면 KBO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요."

기자도, 독자도 궁금해할 한 가지를 은근슬쩍 물었다.

"페이는 당연히 받죠. 주 업으로 삼기는 힘들고 투잡하시는 분들도 간혹 있어요. 얼마냐고요? 하하, 그건 노코멘트할게요. 요즘엔 여자 입학생도 많아요. 프로야구 인기가 좋잖아요. 종종 스포츠 아나운서 준비하는 분들도 들어오더라고요. 그만큼 야구인기가 좋다는 거겠죠. '신사의 품격'에서 김하늘씨 같은 여자심판들이 점점 많아지지 않을까요."

야구심판학교에서도 요즘 야구의 인기, 야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의 위상(?)을 알 수 있었다. 김혜정씨는 "여자는 생각보다 경쟁률이 세지 않으니 꼭 지원하라"고 귀띔했다.

"볼보다 먼저 뛰려고 노력합니다"

 사회인 야구단 탑 자이언츠와 마천위너스 경기.

사회인 야구단 탑 자이언츠와 마천위너스 경기. ⓒ 강혜란

"심판님, 소나기가 오는데 어떻게 할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경기 진행하죠."

인터뷰 도중 갑자기 내리는 소낙비에 오후 3시에 시작돼야 할 경기가 지체됐다. 곧 비가 멈추고 김혜정씨가 각 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김혜정씨를 가운데로 양 옆 일렬로 선 선수들. 라인업을 교환하고 서로 인사를 나눴다. 덩치 큰 남성들 사이에서 김혜정씨는 작아 보였다.

"라인업 준비하겠습니다. 자자, 즐겁고, 힘차게 야구합시다!!!!"

김혜정씨가 외친다. 목소리는 우렁차지만 그 덩치 차이를 보니 여자심판으로서 겪는 고충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있죠. 여자심판인 것 자체가 힘들어요. '여자가 야구도 잘 모르면서 판정 내린다'이런 생각들, '남자들 세계에 어디 감히 여자가 끼어들어'라는 생각들도 간혹 있더라고요. 그래서 늘 120%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들어갑니다. 열심히 뛰고요. 볼보다 빨리 뛰려고 정말 무던히도 노력하죠."

<신사의 품격>을 보냐는 질문에 '그걸 안보는 사람도 있냐'는 듯 "본다"고 답한다. 정말 드라마에서처럼 선수들이 강하게 어필하는지 궁금했다.

"그건 어필도 아닙니다 하하. 어필이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고 어디서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세이프인데 어떻게 아웃이냐, 아웃인데 어떻게 세이프이냐'하고요. 심하게 몸으로 들이대냐고요? 그런 건 없어요.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퇴장입니다. 사실 여자라서 만만히 보여 더 어필하는 경우도 아예 없진 않아요. 그래도 단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판정 얘기를 하다가 슬쩍 오심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많죠. 오심 많죠. 그런데 오심은 누구나 해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오심은 프로야구에서도 종종 나오잖아요. 전 오심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처음엔 (내가 맞다고) 우겼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정말 잘못 판단했다고 생각되면 판정 번복을 하기도 합니다. 아주 가끔이요. 하지만 정말 신중히 하는 게 중요해요."  

하루 5경기 소화...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주말마다 경기에 나서는 김혜정씨를 보며 가족들은 뭐라고 할까 궁금해졌다.

"원래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방문교사였어요. 지금은 디자인 출력실에서 남편과 함께 일을 합니다. 야구심판이요? 이젠 제가 주말에 나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라고요. 아이들은 저를 자랑하고 다닙니다. 혹시나 그만둘까 봐 걱정할 정도인걸요.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 얘네들 때문이라도 못그만 두겠다 싶기도 해요. 한여름에 하루 동안 5경기까지 뛴 적도 있어요. 땡볕에 경기를 치르다 보니 끝나고 난 후 더위를 먹기도 해요. 입술에 물집이 잡히기도 하고요. 마침 어제부터 포진이 생겼어요."

몸이 아프면서까지 굳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야구를 좋아하기도 하고요. 심판일을 마치고 선수와 감독님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참 좋습니다. 수고로움이 흐뭇함으로 바뀌어요. 그리고 남편 경기 나가는 게 그렇게 재밌더라고요. 남편을 아웃시킬 수 있잖아요? 아직 남편에게 '아웃' 콜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하하."

 사회인야구에선 프로야구와 다르게 2명의 심판이 뛰는 2주심제다. 심판이 모자랄 때는 1명이 심판을 보기도 한다.

사회인야구에선 프로야구와 다르게 2명의 심판이 뛰는 2주심제다. 심판이 모자랄 때는 1명이 심판을 보기도 한다. ⓒ 강혜란


야구심판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교육 중에 배운 덕목이에요. '수용적이 되어라','솔직해라', '리더가 되어라', '정열적이 되어라' '용감해져라', '악착같이해라', '자기 단련을 해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져라' 라고요. 거기에다 제가 생각하는 중요한 것은 인성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심판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날이 높아져 가는 야구심판학교의 인기에 서류합격 팁을 살짝 물었다.

"사회인 야구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지망하시더라고요. 그 사랑하는 마음을 입학원서에 정성껏 적어주세요. 본인이 알고 있는 야구 지식은 버리고 경청하는 마음으로, 스펀지가 된다는 마음으로요. 그러면 길이 열릴 겁니다."

약간의 요령을 기대했건만, 정석이다. 하지만 정석이 곧 진리인 셈이다. 야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으로 김혜정씨도 야구심판학교에 입학했고 심판이 됐고 경기를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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