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문학가 이적요, 허나 정신만은 생생하게 육체를 꿈꾸는 작가

늙은 문학가 이적요, 허나 정신만은 생생하게 육체를 꿈꾸는 작가 ⓒ 렛츠 필름


영화 <은교>는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을 환기한다. '노인도 사람'이라는 것을…. 극 중 이적요는 성공한 인생이다. 살아있는 시인, 아니 문학가로서 최고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추앙을 벗은 이적요는 서지우와 은교가 없다면 쓸쓸하게 끼니를 때워야 하는 고독한 늙은이일 뿐이다. 화려하지만 외피를 벗으면 외로움 안에 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죽음은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렇기에 서지우의 존재가 이해되기도 한다. 사실 서지우는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이다. 별이 다르다는 것을 10년 만에 안다는 것은 그가 문학가이기보다는 공학적 인물이 더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문학에 대한 동경으로 스승 이적요의 곁에 있기를 자청한다. 사실 스승과 제자라고는 하지만 서지우가 과연 제자인가? 아마도 이적요 입장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홀로 있기 너무 외로워 먼저 다가온 그를 내치지 않았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현실 속에서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존재 '은교'

현실 속에서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도 사랑스러운 존재 '은교' ⓒ 렛츠 필름


시간 속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이적요, 성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은교

이러한 일상에 은교가 갑자기 뛰어든다. 그들의 나이의 차이는 50년을 뛰어넘는다. 처음에 이적요가 은교에게 보았던 것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젊음이었다. 자신은 이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데 은교는, 아직도 성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정 반대의 극단에 선 존재이다. 만약 작품이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적요는 그저 어린 육체를 갈구하는 것만으로 그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서지우와 다르게 은교는 이적요의 문학적 깊이를 공유할 수 있다. 은교는 선천적으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고, 이 문학적 재능과 은교의 젊음은 이적요를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 셈이다. 그래서 비록 상상 속이지만 이적요와 은교가 펼치는 육체적인 사랑은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관객들도 있겠지만.

반면에 느닷없는 은교의 출현은 서지우에게 충격이다. 서지우는 자신이 스승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스승이 새파랗게 어린 애와 정신적 공감 나누고 있다. 10년 넘게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일을 단번에 해내고, 자신보다 문학적 재능이 있는 은교를 서지우는 당연히 용납할 수 없다. 더구나 아버지같은 스승이 쌓아 놓은 모든 업적이 은교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역시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물론 스승의 그 외피가 자신에게도 영광이기에 무너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은교에게 지속해서 구박받던 서지우는 은교를 품에 안은 건 두 가지 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자신도 은교를 안으면 스승과 같이 대단한 문학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이 하나요, 둘째는 스승은 상상할 뿐 현실로 옮기지 못할 뿐이지만  그는 현실 속에서도 가능한 젊음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극 중 노인과 여고생이라는 주된 줄거리 때문에 서지우와 은교의 정사가 윤리적으로 크게 거부감이 와 닿지는 않으나 어른(이미 그도 40을 전후한 나이이다)과 여고생의 정사 역시 사회적으로 보자면 허락될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다. 이 지점이 바로 스승과 제자의 차이점이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는 한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스승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는 한 사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인물이다. 이 같은 그의 모습은 스승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 이상호


영화의 마지막 대사 "잘가라. 은교야 "...어쩌면 "잘가라.. 청춘!"

관객은 서지우를 보면서 답답함을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이적요를 보면서도 답답함을 느껴야 한다. 그저 외로운 노인일 뿐이지만 그는 자신이 쌓아온 '국민 시인'이라는 외피를 스스로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쓴 소설을 그저 '세경'이라는 명목으로 제자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정신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젊음을 지녔다고 고집한 그가 다시 써낸 역작 <은교>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밀지 못한다.

세상이 자신에게 준 명예가 껍데기이고 문학관을 짓겠다는 제안에도 못 내켜 하면서도 그 껍데기를 스스로 벗지 못한다. 아마 제자인 서지우였다면 스스로 외피를 벗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독한 천재 이적요는 천재이기에 그 외피를 스스로 벗지 못한다. 어쩌면 마지막까지도 은교를 품지 못했던 이유 역시 스스로 이 외피를 벗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은교>로 이상 문학상을 받게 된 제자에게 보내는 축사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명대사지만 영화 안에서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제자인 서지우일 뿐이다(그나마도 100% 이해 하지 못했겠지만). 아마도 시상식에 나타난 것은 '내 작품이다'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싶어서였지만 결국 아무도 알아 들을 수 없는 대사를 세상에 선포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결국 이적요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육체적으로는 늙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청춘이며, 외로움으로 자신도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를 갈망하지만 노인의 이러한 욕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 탓을 하는 셈이자. 이러한 이적요의 모습은 영화 중간과 마지막의 대사가 상징한다.

"잘가라 은교야."

 시인의 따스함으로 상처가 아물어가는 은교

시인의 따스함으로 상처가 아물어가는 은교 ⓒ 정지우필름


영화 속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서지우와 은교...하지만

물론 반쯤은 스스로 껍데기를 깨지 못한 이적요 자신의 문제이지만 다른 반은 세상이 이적요에게 그렇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돌아와서 이적요의 내면을 다 이해하고 공감한다 해도 이적요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노인과 여고생의 사랑을 그저 사랑이니까 인정해야 할까? 서지우의 "쟤는 여고생이에요"라는 질문은 현실에서 우리에게 자문해 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특히 이전과 달리 사람 대부분이 노인으로서 삶을 일생의 상당부분을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이 질문은 그저 환상이고 판타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스스로도 먼 훗날에 스스로 갈등하게 되는 문제일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장점은 철저하게 이적요의 관점에서 영화를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노인이 아니지만 이적요가 겪고 있는 내면적인 갈등을 그저 노인의 탐욕이 아닌 인간이기에 지닐 수 있는 욕망임을 설득시키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이적요에게 집중함으로써 극을 이끌어가는 다른 두 명, 서지우와 은교는 굉장히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가 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왜 갑자기 서지우와 은교가 현실에서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는지는 이적요와 은교가 환상 안에서 서로의 육체를 허락하는 것 같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개인적인 해석은 서지우의 입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듯이 은교를 안으면 자신도 스승과 같은 문학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욕망이라고 보인다.

반면에 은교는 '은교'의 저자가 서지우임을 오해한 상황에서는 자신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린 서지우가 외롭다면 자신의 육체를 바쳐서라도 그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다. 또한, 그 역시 외로운 상황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한 서지우에게(물론 그 이해는 서지우가 아니라 이적요이지만) 충분히 감정적인 교감을 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지우와 은교 역시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에 관한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이적요만 부각시킴으로써 이적요 이외의 캐릭터들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굉장히 아쉽다. 물론 영화라는 제한된 시간에 모든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 정지우필름


<은교>가 던진 욕망에 관한 딜레마, 충분한 가치 있다

다음 문제는 '은교'의 캐릭터이다. 이 캐릭터는 남성의 입장에서 바라본 판타지적인 캐릭터일 뿐이다. 서지우조차도 최소한의 내면적 갈등이 있지만 은교의 경우는 무슨 갈등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여고생이라는 설정 역시 이 판타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적요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애'가 아니라 '젊음'의 최전성기인 20대 초반의 설정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으로서는 20대만 되어도 분명 정신적 교감이 아니라 목적성이 있다는 시선을 가질까 봐 일부러 여고생으로 설정한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게 설령 여고생이라고 할지라도 그저 순백의 순수함을 지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은교의 캐릭터는 극중에 이적요가 서지우에게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누가 자네에게 별이 아름답다고 알려 주었나?"

이 영화의 최고 장점은 욕망이지만 그 욕망이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는,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욕망을 들어냄으로써 관객들로 가치판단의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대목이다. 이적요나, 은교나 서지우 그리고 우리 모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최근 생물학을 강타한 주장 중 하나인 '이기적 유전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살아간다는 게 핵심이다. 즉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는 것만이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저 인간의 욕망이 내 후손을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딜레마적인 질문은 가치가 충분하다.

은교 이적요 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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