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이적요의 서재를 정돈하는 은교. ⓒ 정지우필름


 영화 <은교>의 공식포스터.

영화 <은교>의 공식포스터. ⓒ 정지우필름

<은교>는 하나의 영상시(詩)같다. 촬영과 편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결말에 이르게 된다. 본디 감정선을 따라가는 영화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법.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재미없을 정도로 지루하진 않다. <은교>는 멜로영화다. 말하자면, 복수극으로 끝난 조금은 아쉬운 삼각관계다. 흔히 삼각관계는 한 사람이 선택받게 된다. 이 영화는 누구도 선택받지 못한다. 아니, 애초부터 선택해야 할 꺼리가 없었다. 이 영화도 여느 멜로처럼 사랑이라 여기며 타인의 마음을 넘겨짚는다. 그리고 아픔을 겪은 뒤에야 성숙해진다. 쉽게 말해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했다.

극 중 인물인 서지우처럼 70대 노인과 여고생의 사랑을 사랑으로 보지 않는 건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것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라는걸 보여준다.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보여준다. 영화는 불현듯 다가온 첫 만남에서부터 멜로의 공식을 잘 따른다. 결국, 멜로라는 게 두 사람이 고백하고, 결혼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때 느껴지는 애타는 마음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관객들은 세 주인공 중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은교였고, 이적요였고, 서지우였으니까. 단순히 생각해 당신보다 어린 나를 대하는 어른들에게 우리는 은교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누군가 사랑해선 안될 걸 이미 알면서 그래도 기대를 쉽게 접지 못했던 경험을 해봤다면 이적요였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보다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걸 겪었다면 서지우였던 것이고.

결국,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서 이 영화의 모든 걸 다 경험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은 이 영화가 나이가 들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은 이적요의 명대사인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로 요약된다. 정치불안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격했고, 그 갈등이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 이 대사는 시의적절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젊음이란 무엇인가. 젊다고 생각하면 젊은가.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나이들어가는 걸 꺼려하는가.

 서재에서 생각에 잠긴 이적요 .

서재에서 생각에 잠긴 이적요 . ⓒ 정지우필름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늙는다는 건, 조금 어둡고 주름진 피부를 가지게 된다는 것 외에는 없지않을까. 본 기자는 평소 노인분들의 얼굴에서 늘 소년소녀의 표정을 본다. 다만 그들이 힘이 없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원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다. 이적요는 은교가 잃어버릴 뻔 했던 소중한 걸 되찾아 주기도 한다. 은교의 선의를 받아들여 준다. 누가 먼저 다가가지 않은 이적요와 은교의 관계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행동들을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영화라서 절정과 결말을 위해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 외에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건 그저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그 자체일 뿐이다. 은교와 이적요의 정사신이 환타지처럼 연출되었고, 두 사람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두 사람이 서로 대하는 동안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상대방을 대했다는 것보다 중요하지않다. 탐욕, 질투, 오해, 엇갈림... 모두 그런 두 사람의 관계를 안타까워하는 표현들로 쓰이고 있다.

은교는 비어있는 듯 꽉 차있다. 그녀가 고등학생인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늘 변한다. 사람의 감정은 때에 따라 표정으로 표현되고, 몸가짐이나 행동으로도 표현된다. 은교에게 악의가 있어보이지 않지만, 악의가 있었더라도 그건 이적요의 선에서 이해될만한 악의다. 이적요는 그런 이해를 가능케할만큼 은교를 소중히 생각했으니까. 머리로는 알지언정 가슴으로는 알지못하는 일들이 살면서 참 많다.

나이 불문하고 이런 일들은 새롭게 경험하고 경험해야 겨우 내 것이 된다. 우리는 가끔 내가 아는 게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게 훨씬 많다. 그래서 오히려 서지우에 비해 은교가 더 유식한 것이다. 자신이 무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지식이란 내 입에서 나오면 그저 내 주관이거나 타인의 주관일뿐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서지우라는 인물이다. 보통의 매력적인 삼각관계라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삼각관계에서 어느 정도 좋은 점이 돋보여야 할 서지우는 그렇고 그런 모습을 대부분 보여준다. 물론 그게 영화의 밸런스를 위해 필요했겠지만, 그래도 좀 너무 매력과 거리가 먼, 좀 우습게 표현하자면 얼굴만 잘생기지 않았어도, 으이그, 할 인물이다. 서지우는 이적요에게서 자신의 작품을 할 것을 권유받는다. 그러나 은교를 대하는 서지우를 봐도 그렇고, 아직 서지우는 인생을 이야기하기엔 미숙하다. 서지우가 모르고 있는건, 자기 자신도 현재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비난하는 이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기에, 비난하기보다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는걸 모르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모르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이 영화에서 서지우는 껍데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롤리타 플롯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어떤 장치와 같다는 느낌이다. 여하튼, 사랑은 두사람이 서로에게 좋은걸 주는것이다. 내가 남에게 드는 모든 생각이 실은 다 나에게 해당되는 생각일뿐이라는걸 기억해야 한다. 예쁘다, 못생겼다, 착하다, 못됐다는 식의 사람에 대한 가치판단은 함부로 하지않는게 좋다는걸 서지우라는 인물을 보며 깨닫게 된다.  

 제자와 스승이면서 애증의 두 사람.

제자와 스승이면서 애증의 두 사람. ⓒ 정지우필름


서지우와 은교의 관계들로 이적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좀 부자연

외로워서 은교에게 사랑 아닌 욕정을 보내는 건 사실 파렴치한 짓이다. 은교의 입에서 외로움이 나왔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어른으로서 현명한 건 아니다. 어릴 땐 대부분의 생각이 관념적이다. 관념적인 생각으로는 그 어떤 엄한 말도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말들에 소울이 담겨있느냐다.

은교가 외로움을 얘기하는 것에는 소울이 담겨있을지언정, 서지우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에도 그러할까? 관념과 행위의 간극이 마치 이승과 저승처럼 멀기만 한게 은교 또래인 대부분의 아이들 상태인데?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잘못한 것이, 이적요와 은교의 사랑부터가 관객들에겐 다소 거부감이 있었는데다가 서지우라는 존재가 은교와 얽히는걸 과하게 나타냈다는 거다.

서지우는 은교에게 악감정이 없었다. 이적요에게 서운함이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 그가 영화 내내 거슬린 건 이 영화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관객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영화를 볼 것이라는 걸 정해놓고 그에 맞춰서 클라이맥스를 이끌어가는데, 정작 관객들은 그런 생각으로 보지않는다. 자유롭게 윤리적인 걸 좋아하는 관객들은 이런 부자유스러운 비윤리적 정사신을 이해는 하지만 유쾌하게 여기진 않는다.

원작에 비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것도 서지우와 은교의 관계들로 이적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게 좀 부자연스러워서 일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목이 마르다. 가슴이 먹먹하고, 시를 쓰게 된다. 그런데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20대 관객이 보기엔 어렵거나 이해가 안될수도 있다. 어쩌면 30~40대 이상의 여성 관객에겐 이 영화 세 주인공 중에서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인 서글픔 또는 슬픈 애틋함 같은 건 있다.

여러 명대사들이 있지만, 본 기자가 보기에 단연 돋보인 대사는 '헐.' 이다. '헐'은 놀랍다, 예상밖이다, 라는 뜻의 신조어인데, 실제 본 기자의 여섯 살 조카도 이 말을 쓰고, 조카의 어머니인 형수도 이 말을 쓰고, 형수의 시모이신 본 기자의 어머니도 이 말을 쓴다. 이 말이 국어를 훼손한다는 논쟁은 별론으로 두고, 다만 이 '헐'로 세대간의 벽을 넘어설수도 있을거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끝으로 이 영화, 생각대로 야하다. 생각만큼 그저그렇기도 하다. 아침보다 저녁에 관람할 것을 권한다. 다음날이 휴일인 토요일에 보는것도 나쁘진 않겠다. 박해일의 노인연기는 어딘지 조금 어색한 듯 익숙해지고, 김고은의 은교는 흠잡고 싶지 않다. 그녀가 스타가 되기보다 배우가 되어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김무열은, 서지우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듯 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 영화의 아킬레스건은 서지우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 영화의 색감과 조명, 중간중간 나오는 대사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 사랑이라하기엔 가볍고, 탐욕이라 하기엔 정결한 은교와 두 남자의 이야기 <은교>. 전부터 온다온다하던 <은교>가 드디어 어느새 이렇게도, 우리 곁에 찾아왔다. 

덧붙이는 글 영화 <은교> 상영시간 129분. 청소년 관람불가. 4월 25일 개봉.
은교 박해일 김고은 김무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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