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돈이 많으면 화폐가치가 하락하듯이, 너무 남발되어 가치가 퇴색해버린 개념 중 하나가 정의(正義)라는 말이 아닐까. 너도 나도 정의를 말한다. 심지어 학살자조차 정의를 부르짖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사회이념은 '정의사회 구현', 30년이 지나자 이번엔 사기꾼이 '공정사회'를 떠들었다. 문제는 그들에겐 그 어떤 정의도 공정도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 정의를 부르짖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다. 정상적인 사법제도를 통해서는 정의를 찾을 수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정의를 세우겠다고 해결사를 자처하는 이 남자. 그런데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단테스 피크>(1997), <리크루트>(2003), <뱅크잡>(2008) 등을 감독한 로저 도널드슨의 새 영화 <저스티스>가 던지는 물음이다.

고등학교 교사로 아름다운 아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윌 제라드(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어느날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첼리스트인 아내 로라(재뉴어리 존스)가 연습을 끝내고 귀가하던 중 치한으로부터 끔찍한 폭행과 함께 강간을 당한 것이다. 분노로 괴로워하는 제라드 앞에 사이먼(가이 피어스)이라는 남자가 나타난다.

그는 로라를 그렇게 만든 자를 알고 있으니 대신 복수를 해서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제안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후에 자신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 선택은 제라드의 몫이다. 아무리 나쁜 짓을 했다고 해도 누군가의 죽음을 사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다. 그러나 결국 제라드는 이성보다는 감정의 손을 든다.

밤길이 걱정되는 미국이 선진국?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영화의 배경은 뉴올리언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쓸고 간 후 생지옥의 모습을 보여준 그곳이다. 당시 미국은 루이지애나 일대를 강타한 카트리나로 인해 1천800여 명이 숨지고, 1천800억 달러 이상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이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인간애와 이성이 사라진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사태수습에서 일순위가 되어야 할 인명구조보다도 치안유지에 인력을 돌려야 할 만큼 약탈, 살인, 방화, 강간이 이어졌고, 이웃 간의 정이나 친절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당시 뉴올리언스의 시장이었던 레이 내긴은 회고담에서 밝혔다. 카타리나 이후 뉴올리언즈의 자살률은 50%나 높아졌다고 한다.

세계 제일의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고작 3등급 태풍 앞에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이것이 이웃나라 쿠바와 확연히 차이 나는 대목이다. 경제로만 본다면 미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가난한 쿠바지만 쿠바에는 1년에 몇 번씩 찾아오는 카트리나보다 더 강력한 태풍에도 끄덕없는 신속하고 안전한 방재시스템은 물론 인간애가 있다. 

문제는 뉴올리언즈의 정신적 공황상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연일 이어지는 살인과 폭력 앞에 경찰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정부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다. 시민들조차 그게 뉴올리언즈라고 체념한다. 영화라고 하지만 밤길을 걱정해야만 하는 나라를 과연 선진국이라 할 수 있을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것이 정의?

결국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다. 영화에서 암호로 쓰인 '헝그리 래빗 점프스(배고픈 토끼가 뛴다)'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닌가. 정의를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자가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는. 따라서 멀리 있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이 있기에 기꺼이 스스로 주먹을 쥐고 나섰을 뿐이라는 것이 사이먼의 논리다.

"우린 그저 정의를 원하는 평범한 시민들일 뿐이오" 라고 사이먼은 말한다. 하지만 무엇이 정의란 말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꼭 복수를 해야 하는 것이 정의인가? 6개월 후, 윌과 로라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지만, 세상에 공짜란 없다. 사이먼이 약속을 지키라며 윌을 찾아온 것이다. 그 역시 누군가를 위해 대리 복수를 하라는 것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은 이렇게 뉴올리언즈를 지배한다. 한순간 분노로 대리 복수에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이 이제는 대리 복수의 볼모로 살인자가 되어 조직에 한 발씩을 담그게 된 것이다. 절망의 순간에 '세상에 정의는 어디에 있나'하며 터뜨렸던 분노가 정의를 더욱 먼 곳으로 보내버렸을 뿐이다. 정의를 원했지만 오히려 정의를 죽이는 꼴이 된 것이다.

정의란 사회적인 합의인 법에 의해서 실현되어야 한다. 복수는 그저 복수일 따름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복수가 정의로 둔갑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애와 이성을 갖춘 인간이 추구하는 정의인 것이다. 영화는 선택의 순간에 자신의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함으로써 인과되는 범죄의 악순환을 보여준다.

<저스티스>는 이처럼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가지고 관객들의 보다 깊이 있는 고민을 의도하였으나 실상 영화는 그다지 짜임새 있게 잘 만들어진 것 같지 않다. 영화가 의도했던 것에 비해 결말은 너무 평범하고 소박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름 반전을 주긴 했지만 치밀하지 못한 구성을 메우기에는 지극히 미약하다.

결국 <저스티스>는 골든 라즈베리상 3월 셋째주 최악의 영화에 선정되었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고군분투도 전혀 빛을 발하지 못했다. 영화는 그저 고수익을 미끼로 대학생들을 꼬드기는 불법 다단계조직처럼 정의를 미끼로 불의를 퍼뜨리는 집단을 통해 진정한 정의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이 모습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겹쳐 보이는 건 왜일까?

 영화 <저스티스>의 한 장면

영화 <저스티스>의 한 장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베트남을 비롯하여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벌였지만 그들의 목적이 진정 말그대로 세계의 평화와 안녕과 정의구현이었던가. 세계 평화를 운운하며 이란의 핵을 문제 삼고 있지만 세계에서 핵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한다면 모여앉아 핵 안보를 논의할 일이 아니라 핵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하지 않을까? 참혹한 후쿠시마가 보내는 눈물의 메시지를 뒤로 한 채 아직도 원전 르네상스에 목매고 있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핵의 정의(正義)는 도대체 무엇이냐고?

저스티스 로저 도널드슨 니콜라스 케이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