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원>의 한 장면. 천재마술사였던 이튼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후  전신마비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천재마술사였던 이튼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후 전신마비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인간으로서 존엄성의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스스로 자신의 삶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도 존엄성의 일부분으로 보장받아야 할까? 물론 자살을 허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나라나 문화도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락사는?

어떻게 묻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결과는 비슷한 것 같지만 과정은 전혀 다르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반응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사안이지만, 절대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 '당당하게 죽게 해 달라'고 사회 제도에 청원하는 한 인간의 고뇌 앞에 안쓰러움을 느끼는 순간, 무조건적인 부정보다는 뭔가 이해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죽게 해 달라'는 청원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타게 죽음을 갈망하는 한 남자의 청원 앞에,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 권리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의 청원은 막연함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다.

영화 <청원>은 인간의 삶에 대해 고민을 던지는 작품이다. 안락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는 삶 속에서 느껴지는 애환이 더 크게 다가온다. 때문에 '이제 그만 세상의 끈을 놔버리고 싶은 한 남자'의 고뇌에 2시간 넘게 몰입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뭉클한 감정이 복받쳐 눈시울을 붉히는 관객이 많은 것은 바로 '심정적 공감' 때문일 것이다.

14년 간 누워있던 천재 마술사의 '청원'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안락사 청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기자들이 청원을 제기한 전신마비 환자 이튼의 심정을 묻고 있다.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안락사 청원에 대한 법원의 판결을 앞두고 기자들이 청원을 제기한 전신마비 환자 이튼의 심정을 묻고 있다.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이튼 마스카레나스(리틱 로샨 분). 한때 세계 최고의 마술사였던 그는 더 이상 마술사가 아니다. 화려한 대저택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겉모습일 뿐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중증 환자일 뿐이다. 마술 공연 도중 불의의 사고로 전신마비 환자가 된 그의 생활은 14년째 침대 위에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그의 신체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직 얼굴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는 단조로운 삶을 보내지만 고정 청취자를 확보하고 있는 라디오 방송을 틈틈이 진행하기도 한다. 책도 쓰고, 강연도 하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때도 있지만 이는 극히 부분적인 일이다. 실제로 그의 삶은 그저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수준이다. 12년째 그를 돌보고 있는 헌신적 간호사 소피아(아이쉬와라 라이 분)가 그의 곁에 없었더라면 더욱 버티기 힘든 나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딱히 어떤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투석을 받아야 할 만큼 악화된 건강은 호전의 기미는커녕 의사가 보기에도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마치 그가 마술 소재로 활용하던 촛불처럼 보이기도 한다. 촛불 마술이 그를 한 순간의 사고로 절망의 늪에 빠지게 했지만, 꺼질 듯 꺼지지 않고 신비한 생명력을 이어가는 촛불은 그의 삶을 보여주는 은유다.

예전에 그는 마술사로서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었다지만 이제는 '아 옛날이여'를 되뇐다.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할 만큼 시간은 그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다. 결국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것은 안락사 청원. 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변호사 친구를 통해 정식으로 법원에 안락사를 청원하기에 이른다. 그의 요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달라는 것'.

이튼은 재판을 통해 자신이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진행하는 방송을 활용해 자신의 결심과 생각을 널리 알린다. 시큰둥하던 여론은 중증 환자의 절박한 호소에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재판부 역시 예전처럼 가볍게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존엄한 죽음을 인정할 수 있는 획기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을지 사회적 관심도 높아간다. 과연 그의 청원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환자 입장에서 던지는 안락사에 대한 고민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영화 <청원>의 한 장면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영화 <청원>에서 소피아 역을 맡은 인도 여배우 아이쉬와라 라이

영화 <청원>에서 소피아 역을 맡은 인도 여배우 아이쉬와라 라이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안락사는 영화로 다루기에 다수 무거운 주제 같지만 <청원>은 마술이라는 요소가 어우러져 경쾌하게 흘러간다. 과거 전성기 시절 이튼의 마술쇼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마술을 처음으로 보여줄 때와 제자에게 마술을 가르치는 플롯에서는 판타지적 요소도 가미된다. 이튼이 찾아간 식당에서 펼쳐지는 소피아의 현란한 춤은 영화의 가장 압권인 장면으로 뮤지컬 영화를 연상시킨다. 

감성적인 부분이 강조되면서 애잔한 느낌을 주지만 안락사 청원을 놓고 벌이는 검사와 변호사 간의 논쟁은 안락사 문제를 영화 밖으로 이슈화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전신마비 환자 이튼과 그를 지극 정성 간호하는 소피아의 러브 라인은 멜로적 감수성도 자극한다. 인도영화의 매력이 이 영화 속에 모두 담겨 있는 듯한 인상이다.

비록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인도지만 존엄하게 죽기를 원하는 이튼의 청원은 지난 2009년 한국 사회에도 있었던 '안락사(존엄사)'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법원은 2009년 5월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에게 가족들은 연명치료 중단을 요구했으나 병원이 거부하면서 대법원까지 간 소송은 결국 '인공호흡기 제거'로 판결이 났다. 법원의 판결이 있은 후 201일이 지나서야 환자는 존엄사했지만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인정하느냐'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졌다. <청원>의 문제제기가 전혀 다른 나라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이튼의 청원을 놓고 판사 앞에서 벌이는 양측의 공방은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치밀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감성적인 면을 더 자극한다. 판사 앞에서 펼치는 이튼의 '마술'이 대표적이다. 단 1분 동안 검사를 불러내 보여주는 마술은 죽음을 청원하는 절규처럼 들린다.

아들(이튼)의 청원에 동의하는 어머니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반응은 사실 뜻밖이다. 그러나 이상하거나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어쩌면 최선의 배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는 안락사에 대해 논리나 이성이 아닌 실제적인 상황과 감성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튼의 청원을 무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의 청원은 그만큼 절박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사랑, 우정, 용서, 연민이 교차하는 뒷맛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전신마비 환자가 된 마술사 이튼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간호사 소피아

영화 <청원>의 한 장면. 전신마비 환자가 된 마술사 이튼과 그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간호사 소피아 ⓒ 씨너스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연출한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은 국내 관객들에게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인도를 배경으로 각색한 감동적 수작 <블랙>(2009)으로 국내 관객들의 관심을 샀다.

영화 <블랙>으로 잔잔한 감동과 눈물샘을 자극했듯 <청원> 역시 잔잔함 속에 마음 여린 사람들의 눈물샘을 건드린다. 이튼과 간호사 소피아 사이의 애절한 사랑, 죽음을 도우려 하는 친구와의 우정, 시기와 질투 속에 사고를 일으켰던 상대를 향한 용서, 주변 지인들의 시선 속에 보이는 연민의 눈빛 등등…. 웃음과 울음, 슬픔과 연민이 교차하는 것은 <청원>이 남겨주는 '뒷맛'이다.

영화는 따뜻함과 웃음을 통해 이를 최대한 감싸려 한다. 마지막 장면은 감수성 풍부한 사람들이 무감각하게 지나치기 어려울 것 같다.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는 이튼의 모습에 장엄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랄까.

이튼 역을 맡은 리틱 로샨과 소피아 역을 맡은 아이쉬와라 라이의 빼어난 연기는 영화를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게 한다. 이야기의 흐름 속에 낙엽 같은 쓸쓸함과 애틋함, 사랑이 버무려진 잔잔한 감동이 길게 여울진다. 멋진 삶을 살던 사람이 안락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더욱 그럴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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