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감독의 너무나 유명한 작품, <밀양>(2007). 영화 분석을 배우며 제일 먼저 다뤘던 영화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기초로 한 이 영화. <밀양>이었다. 이야기는 아들 준(선정엽)이 차에 앉아 하늘의 빛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서른세 살.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이신애(전도연)은 아들 준과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이사를 간다. 그녀는 피아니스트란 꿈과 남편에 대한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하나뿐인 '희망'인 아들 준과 밀양에 내려가 작은 피아노학원을 연 후, 새로운 앞날을 기약한다.

남편과 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에 그녀는 뭔가 '있는 티'를 내려 애를 쓴다. 땅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아들 학원 사람들에게 한다거나 땅을 소개시켜 달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 준이 납치를 당한다. 유괴범은 그녀에게 돈을 요구하지만 그가 요구하는 돈은 그녀에게 없다. 그녀의 소문을 들은 아들의 학원 원장이 바로 범인이다. 그녀의 애원에도 아들은 그의 손에 죽고, 마지막 희망까지 잃은 그녀는 종교에 의지하게 된다.

기독교에서 '사랑'을 배운 그녀는 아들을 죽인 자를 찾아가 용서를 하고자 한다. 막상 찾아간 교도소 안의 그의 얼굴은 평온하며, 하나님께 '먼저' 용서 받았다 한다. 그 모습에 덮어두었던 상처가 한꺼번에 올라온 신애는 신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교회 장로를 꼬신다거나, 대형 집회의 음악을 바꾼다거나, 자살을 시도한다거나.

결국 그녀는 정신분열을 판정받고 정신병원에 간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을 해바라기처럼 사랑하는 종찬(송강호)의 도움으로 퇴원 후, 새로운 삶을 기약하며 머리를 자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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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애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지 않았다는 것은, 밀양으로 누나를 보러 내려온 신애의 동생과의 대화에서 포착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로 미루어 추측하건데, 아마 그녀의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좋아하다, 우연히 교통사고를 당해 죽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녀가 밀양에 내려와 산다는 것이 동생이 보기엔 마음 아프고 갑갑하고 화가 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부모님께 말씀도 안 드리고 내려와 산다는 그녀의 말을 통해 모든 추측이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 준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다. "밀양에 가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하지만 실제 스크린 속에서 그려지는 밀양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혹 센스 있는 사람은 발견했을지 모르겠지만, 신애와 아들이 벽에 피아노학원 전단지를 붙이러 다닐 때, 그 뒤에 어떤 풍경이 그려졌는지 기억나는가? 길가 어두침침한 곳에서 꼬마 둘이서 땅을 보며 놀고 있었다. 이렇게 밀양은 어린아이에게 놀 곳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런 척박하고 외로운 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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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그런 외로운 땅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려 노력했다. 자신에겐 하나뿐인 사랑, 희망인 아들 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 자신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녀는 돈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지만, 밖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논술학원 학부모 만남 자리에서 땅을 보러 다닌다는 이야기나 '나 돈 있는 여자에요. 그러니 무시 말아요. 나 이 정도 되는 여자에요'라고 무언의 이야기를 뿌리고 다닌다, 정작 가진 것은 없으면서.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과 낮은 자존감을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욕심이 (어쩌면) 그녀의 아들을 앗아갔다. 그녀가 돈이 많을거라 생각한 논술학원 원장의 손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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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녀는 종교를 갖게되고, 그 안에서 치유가 되어가는 듯해 보였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는 행복해요"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그녀는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관객은 알 수 있다. 바로 그녀가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모습에서 말이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 않고, 목숨을 잇기 위한 수단으로 먹는 것처럼 보인다. 싱크대에 서서 우걱우걱, 밥을 씹는 그 모습에서 말이다.

신애는 전, 혀, 행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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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녀는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하기로. 하지만 극은 여기서 또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신애가 용서하기 전, 살인마는 벌써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장면과 더불어 불편한 몇 장면이 있었다. 특히 이 두 가지 장면에서 나의 거부감은 더 커졌다.

첫째, 신애가 이사 오고 학원을 차린 후, 약사가 신애를 불러 말하는 장면. 신애는 참 불쌍한 사람이고 너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너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신애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상황이기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그 약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크리스찬이든 논크리스찬이든 '저 약사는 참 무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둘째, 신애가 감옥에 범인을 용서하러 갔을 때, 범인이 말하는 장면. 신애가 용서하기 전에 범인은 먼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단다. 눈물로 호소하며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빌어도 모자를 판에 그는 떳떳하게 자신은 용서받았고, 너도 내가 아는 하나님을 만나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신애는 경악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관객도 경악한다. 이런 '무례한 종교'가 어디 있나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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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애는 아들이 처음 죽은 시점으로 되돌아간다. 꽁꽁,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신과 대적하기 시작한다. '니가 뭔데, 내가 용서를 안했는데 네가 용서해?' 그러면서 그녀는 신과 대적할 것들을 찾는다.

첫 번째는, 신 앞에 신실한 '장로'를 꼬셔내는 것. 성적으로 유혹해 자신을 덮치게 만든다. 그리고 하늘을 노려보며 말한다. "보고 있어? 보고 있냐구."

두 번째는, 대형 기독교 집회에 노래를 틀어버리는 것. 그녀는 길을 걷다 대형으로 하는 기도회를 보게 된다. 그녀는 그 기도회 중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게 되고, 신실하게 손을 들고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과 함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모든 게 거짓말이야~"라는 노래가 울려퍼진다. 그 노래를 틀고 나온 신애는 또 한 번 하늘을 뚫어져라 노려본다.

그리고 세 번째, 과일 깎던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리는 것. 하늘을 노려보며, 넌 날 절대 이길 수 없다며. 하지만 그녀는 얼마 못 지나 도로로 뛰쳐나와 "살려주세요"를 외친다. 아마 신애도 죽음 앞에선 두렵지 않았을까? 그리고 주관적인 의견으론 죽음 앞에선 신애도 신에게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작은 인정을 했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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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참 많은 것을 담고있다. 무례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 사회에 대한 비판. 하지만 그보단 '기독교보다 더 기독교적인 종찬의 사랑'에 대해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있다.

밀양 속 종찬(송강호)는 속물로 나온다. 다방 여자를 은근슬쩍 보며 야한 단어를 던지는 모습, 전화로 엄마에게 화와 신경질을 서슴없이 내면서 신애와의 통화는 한없이 너그러운, 신애를 따라 찬양을 부르다 친구를 만나 담배를 피우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있다.

그런 '속물 종찬'도 신애 앞에서는 180도 달라진다. 신애만을 향한 순애보가 된다. 그녀의 그림자처럼 딱 붙어 다니며 그녀를 돕는다. 영화를 다시 찬찬히 생각해보면 신애가 힘들었을 모든 순간, 그 옆에는 종찬이 있었다.

신애가 맨 처음 내려와 만난 사람도 종찬, 아들을 잃고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도 종찬,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하러 갈 때 옆에 있던 종찬, 장로를 꼬시고 난 후 심적으로 괴로울 때 찾아간 종찬. 다 쓰지 못할 만큼 그녀의 옆에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인 '비밀스런 햇살(secret sunshine)' 같은 종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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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화는 정신없이 막바지에 이른다. 결국 정신분열이 온 신애는 정신병원을 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퇴원을 한 그녀는 제일 먼저 미용실을 찾는다. 하지만 그 미용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손질하는 어린 소녀는 신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의 딸이었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어디 있으랴. 신애와 그 소녀는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다. 신애는 먼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소녀는 머리를 손질하며 글썽인다. 머리를 한 반쯤 잘랐을 때, 신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린다.

여자가 머리 스타일을 바꾸고,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겠다는 것에는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내가 신애였다면 그 소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용실을 뛰쳐나갔을거다. 그것도 아니라면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거나 뺨을 때려버리거나. 하지만 그녀는 소녀가 머리를 반 정도 자르게 나둔다. 그것은 바로 신애도 사랑하는 준을 죽인 범인과 그의 딸인 소녀를 반 정도 용서했다는 의미다. 한 사람의 새로운 출발선상에 있어 그녀는 소녀에게 반이란 마음을 남겨준 것이다.

더 중요하고 가슴 찡한 사랑은 여기서부터 나온다. 신애는 머리를 반만 자른 상태로 집 마당으로 온다. 의자를 세우고 가위를 든다. 이때, 그녀가 보는 거울을 바로 종찬이 그녀 앞에서 들며 그녀가 머리를 자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돕는 것도 역시 '종찬'이다. 그의 사랑은 그녀가 남편을 먼저 보낸 여자였을 때도, 아들을 잃어서 미쳐갈 때도, 심지어 정신병원에 갔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스크린에서 그는 매우 속물적인 인간으로 그려지지만 종찬은 우리의 생각을 확 뒤집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비밀의 빛(secret sunshine)처럼 언제나 항상 따듯하게 그녀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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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속물'이자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종찬의 모습은 어쩌면 기독교인보다 더 기독교적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욕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는 기독교는 '말뿐인, 이론적인 사랑'만 말하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기독교란 종교는 불교나 천주교와는 조금 달리 지극히 현실적이라 영화에서 드라마 온갖 미디어에서 '리얼리티'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가 <벌레 이야기>를 재창조해낸 작품이기도 하지만 기독교라는 바탕을 끄집어낸 것은 바로 이런 이유기도 하다.

종찬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신애에게 있어 종찬은 해바라기이며 남편을 기다리다 굳어버린 돌상같은 존재다. 보이지 않는 빛이며 그 누구보다 그녀가 제일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준다.

바로 종찬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사랑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사랑을 잊고 있는 경향이 많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잊은, 리얼리티 없는 종교의 모습을 최근 들어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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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생각해보자, 기독교는 왜 그녀에게 '무례하게' 다가갔을까? 그렇다면 어떤 기독교적 사상이 그녀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약사가 신애에게 처음 '기독교는 사랑이다'라는 말로 다가갔다. 물론 기독교의 핵심 내용은 '사랑'이다. 하지만 신애에게 더 필요했던 메세지는 약사가 했던 메세지가 아니라 바로 십자가에서 아들을 잃은 '아빠 하나님'의 이야기여야 했다.

성경에선 하나님도 아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신애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아들, 금쪽같은 아들, 하나뿐인 희망의 아들을 누군가에 의해, 누군가의 실수와 죄로 인해 '죽임'당했다. 기독교가 참, 무례하게 그려졌던 이유 중 하나는 '한 사람이 처한 현실에 처철하게 들어가지 못한 이론적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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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영화는 아들 준이 차에 앉아 하늘 빛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신애가 머리를 자르는 곳 옆의 하수구로 카메라를 의도적으로 옮겨 스토리를 맺는다. 포스터에서도 나타나고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바로 이 이야기는 '감독이 의도하는 바'를 분명히 나타낸다.

주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옵시고." 하지만 지금 기독교는 하늘의 복음을 땅에서도 이루고 있는가? 리얼리티를 잃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진정한 복음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복음은 세상에 약하고 소외된 자, 아픈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밀양이 기독교에게 분명히 시사하는 바, 한국의 모든 크리스찬들은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배경들은 실제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종찬 같은 사랑을 하자.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그런 모습의 사랑 말고 상대를 위해 무조건 적으로 헌신하고 '비밀의 햇빛(secret sunshine)'같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상대를 사랑하자.

그 사랑이 진짜 세상이 기독교에게 원하는 '레알' 기독교의 모습일 것이고 종찬의 사랑이야말로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의 사랑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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