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기자말

2010년 8월 14일 광주에서 열린 기아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는 일찌감치 롯데 쪽으로 흐름이 기울었다. 다승왕에 도전하던 기아의 좌완에이스 양현종이 등판하자마자 뭇매를 맞으며 2회를 채우지 못하고 3실점했던 것이다. 하지만 4위 싸움의 맞상대 롯데를 그냥 놓아 보낼 수 없었던 조범현 감독은 일찌감치 김희걸로 마운드를 교체해 새출발을 시도하고 있었다.

2회 초, 주자 1, 2루 상황에서 롯데의 4번 타자 이대호가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1회 초에도 주자 1, 2루 상황에서 선취점을 올리는 적시타를 때렸던 이대호였다. 기아로써는 경기 초반인 상황 1, 2루에서 또다시 주자를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김희걸은 무조건 땅볼을 유도한다는 생각으로 포크볼을 결정구로 선택했다. 어지간한 내야 땅볼이라면, 느린 이대호의 발 때문에 병살타 유도가 가능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대호 역시 그 정도의 상황은 읽어낼 수 있는 타자라는 점이었다.

빅보이 이대호 나름대로 졸라 맨 벨트 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9경기 연속홈런기록과 타격 7관왕 기록을 세운 2010년의 이대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됐다.

▲ 빅보이 이대호 나름대로 졸라 맨 벨트 위로 무게감이 느껴진다. 9경기 연속홈런기록과 타격 7관왕 기록을 세운 2010년의 이대호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한 타자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됐다. ⓒ 롯데 자이언츠


초구를, 밖으로 빠지는 느린 체인지업으로 유인하려던 김희걸은 2구째 낮은 쪽 포크볼을 던졌고, 카운트를 잡기 위한 공이 들어오리라고 예상했던 이대호의 배트가 거침없이 따라나섰다.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배트와 충돌한 공은 까마득히 높은 하늘을 비행했고, 좀처럼 타구가 넘어가기 어려운 무등경기장 중앙펜스의 '그린몬스터'를 훌쩍 넘어갔다. 공식 비거리 125m의 대형홈런이었다. 그리고 한·미·일 프로야구사를 통틀어 처음 기록된 9경기 연속홈런의 대기록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투수 유망주, 거포가 되다

경남고 출신으로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지명 1번으로 입단할 당시만 해도 이대호는 투수였다. 본격적으로 투수훈련을 시작한 것은 다소 늦은 고교 2학년 시절이었지만, 당당한 체구에 유연한 몸을 갖췄고, 어깨도 강한 데다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포크볼과 슬라이더 같은 변화구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도 빨랐다.

하지만 프로 입단 직후 전지훈련에서 어깨를 다치면서 직구 구속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고, 굳이 성공가능성도 불분명한 구속 올리기에 몰두하기에는 청소년대표팀에서도 4번 타자를 맡을 정도였던 타격 능력이 아까웠다. 그 해 5월 이대호는 곧장 타자로 전향했고, 1군 무대에서도 6경기에 출장하며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날렵하던 시절의 이대호 2004년.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 자리잡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대호. 거구이긴 했지만,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날렵한 턱선이 살아있다.

▲ 날렵하던 시절의 이대호 2004년.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 자리잡기 시작하던 시절의 이대호. 거구이긴 했지만,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날렵한 턱선이 살아있다. ⓒ 롯데 자이언츠


이대호가 본격적으로 타자로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그가 신인 투수로 입단했던 당시 투수코치였고, 그의 타자 전향을 돕기도 했던 양상문이 감독으로 활약하던 2004년부터였다. 그 해부터 그는 타율은 낮지만 해마다 20개 이상의 홈런을 치는 거포 유망주로 발돋움했고, 2006년부터는 파워에 더해 정확성까지 겸비한 타자로 한 단계 올라서게 된다. 바로 그 해 그는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넘어서는데, 그 해의 성적이 바로 .336, 26홈런, 88타점으로 세 부문 타이틀을 석권한 '트리플 크라운'이었다.

이대호의 성장은 롯데 자이언츠가 길고 긴 '암흑기'를 빠져나와 2008년 이후 확고부동한 상위권 팀으로 자리잡는 과정의 핵심적인 변수였다. 그를 축으로 삼아 군에서 복귀한 조성환과 2007년 시즌 후 FA로 영입한 홍성흔이 자이언츠가 수년간 가지지 못했던 '중심타선'이라는 것을 구축했고, 거기에 호세 이후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히는 타점왕 가르시아가 가세하며 8개 구단 최강의 공격라인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이대호는 8월 4일과 5일 잠실 두산전에서 김선우와 임태훈을 상대로 한 개씩의 홈런을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한화(정재원, 안승민, 류현진), 삼성(배영수, 안지만), 기아(로페즈, 김희걸)의 투수들을 차례로 두들겨 세계 신기록인 9경기 연속홈런을 빼앗아냈다.

그렇게 불과 열흘만에 쓸어 담은 9개의 홈런을 포함해 그가 그 해 때려낸 홈런은 모두 44개에 달했고, 그 외에도 .365의 타율과 133개의 타점이라는 기록적인 성적이 곁들여졌다. 2006년 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였던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작성한 데 이어,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7관왕(타율, 타점, 홈런, 최다안타, 최다득점, 출루율, 장타율)에 오르며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 타자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이대호의 대기록은 롯데 자이언츠를 강팀으로 끌어올린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프로야구의 중요한 고민거리 하나를 해결한 쾌거이기도 했다. 한국프로야구는 2007년에 다시 400만 관중을 회복한 것을 기점으로 각종 국제대회에서의 호성적, 각 구단의 적극적인 팬서비스와 SK-두산의 라이벌 전 등의 흥행요소들이 떠오르며 부흥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승엽이 2003년 56홈런 신기록을 작성한 직후 일본으로 떠난 뒤 확실한 홈런타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고민이 있었다. 류현진과 김광현을 필두로 한 젊은 에이스들이 줄 수 있는 우아한 미감, 그리고 이용규와 정근우 같은 송곳 같은 톱타자들이 줄 수 있는 격렬한 즐거움이 있는 반면, 투수들과 외길 승부를 벌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축포를 터뜨려줄 대포의 존재 또한 흥행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5년 사이에 작성된 이대호의 3관왕과 7관왕 기록, 그리고 그 사이 곁들여진 9경기 연속홈런 이벤트는 한국프로야구를 지켜보는 동시대 팬들에게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그대로 한국프로야구의 두 번째 중흥기를 이끈 결정적인 한 방이 되었다.

위업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010년 시즌 뒤 롯데는 7억 원의 연봉을 요구하는 이대호에 '팀 내에서 더 고과점수가 높은 다른 선수보다 높은 인상률을 적용할 수는 없다'는 불가사의한 논리로 맞섰다. 그리고 결국 KBO의 연봉조정신청까지 거치는 살풍경 끝에 6억3천만 원이라는 구단 제시안을 관철시키는 뚝심을 발휘하고 말았다.

1982년, 프로야구를 출범시키던 당시 출범 계획을 직접 작성하고 추진했던 이용일 초대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은 당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30만 원짜리 가수가 부르는 노래하고, 100만 원짜리 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청중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다르다."

가수의 능력 이전에 무대의 가치가 가지는 힘이 있음을 간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책정한 선수 연봉의 기준은 '제일 낮은 급의 선수라도 실업야구 최고 스타였던 김봉연보다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그리고 스타급 선수라면 그 김봉연이 10년간 벌 수 있었던 돈을 1년에 벌 수 있도록'이었다. 원년 최고연봉선수 박철순이 당시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강남의 중형 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었던 4400만 원을 받았고, 그 이듬해 최동원이 다시 그 두 배인 1억 원의 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창업자들의 그런 혜안 덕분이었고, 그 결과 다소 무리하게 시작된 프로야구는 한국사회에 일찌감치 뿌리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7천만 원을 놓고 흥정을 벌이며 '9경기 연속 홈런'과 '타격 7관왕'이라는 위업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는 구단의 행태는 영 가벼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창업한 지 무려 30년이 흐른 오늘날 구단과 야구계의 배포는 오히려 창업을 준비하던 시절에 비해서도 쪼그라들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7관왕 이대호 2010년, 이대호는 도루를 제외한 공격부문 타이틀 7개를 휩쓰는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했다.

▲ 7관왕 이대호 2010년, 이대호는 도루를 제외한 공격부문 타이틀 7개를 휩쓰는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했다. ⓒ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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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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