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1년 대우 자동차 부평 공장(낮)

"경찰은 지금 노조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노동자 여러분, 현행범을 체포하십시오."

법원 판결문을 손에 든 남자가 메가폰을 들고 소리친다. 노동자 3백여 명이 진입을 시도하지만 공장은 3만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된 상태. 며칠 전 법원은 '노조 활동 방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으므로 경찰의 행동은 불법적 공권력 집행이었다.

"씨발놈들이 법원 결정문이 있는데도 지들이 가로막아!"
"노동자 여러분, 경찰을 죽지 않을 만큼 패줍시다."

남자는 이내 웃통을 벗어던졌고, 하나둘 남자를 따라 옷을 벗은 노동자들은 바닥에 드러누워 연와시위에 돌입한다. '죽지 않을 만큼' 맞은 것은 그러나 노동자들. 남자는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황망하게 지켜봐야 했다. 후에, '폭력 선동 논란'에 휩싸이게 된 남자의 이름은 박훈, 정체는 변호사였다.

#2. 2007년 1월 15일 아파트 계단(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집앞에 초조하게 서있는 또 다른 한 남자. 손에는 석궁이 쥐어져 있다. 이튿날, 신문의 헤드라인은 판사를 향해 석궁을 쏜 남자가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는 뉴스로 장식된다. 수학과 입학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한 뒤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남자는 교수지위 확인 1, 2심과 항소심에서 패소한 데 불만을 품고 담당 판사의 자택을 찾은 것이다. 남자의 이름은 김명호, 전 수학과 교수다. 그는 과연 판사에게 석궁을 쐈을까.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 ⓒ 성하훈


두 '꼴통'의 만남

두 '꼴통'이 만났다. 박훈은 박준으로, 김명호는 김경호로. 영화 <부러진 화살>이 그 무대다. 2007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른바 '석궁 사건'이 영화를 통해 재구성된 것.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데뷔한 이래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등 문제작 들을 연출하다 1998년 <까>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영화 현장을 떠났던 노장,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부러진 화살>은 지난 14일 막을 내린 제1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거장의 신작을 소개하는 갈라프레젠테이션에 초대돼 관객과 처음 만났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800여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박자에 맞춰 박수치는 관객의 표정에서 묘한 '통쾌함'을 읽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불편한 진실을 여과없이 그려낸 영화, 최고의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출연한 영화,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 김민웅 교수, 조돈문 학술단체협의회 회장, 서유석 전 교수노조 위원장,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등 수많은 사회 인사들이 기꺼이 카메오로 출연한 영화, 총 제작비 4억의 저예산 영화 <부러진 화살>의 정지영 감독을 만났다. 갈라프레젠테이션에서 열광적인 관객을 만난 탓인지 감독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다음은 감독과 나눈 일문일답.

-<부러진 화살>로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갈라프레젠테이션 상영 후에 관객들 반응도 열광적이었는데.
"상당히 감회가 깊다 해야 마땅한데 그리 떨리지는 않았다. 나는 영화를 쉬지 않고 계속해온 것 같다. 관객과 만나지 못했을 뿐 영화 작업은 계속해 와서 그냥 오랜만에 관객과 만나는구나 싶다. 관객반응으로 말하면, 내가 예상한 것보다 백 배는 뜨거웠다. 영화제 관객은 그러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 영화에 반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니 그들이 보여준 열띤 반응의 절반 정도가 아마 일반 관객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즐거워하는 관객의 반응이 재밌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영화 <부러진 화살>의 한 장면 ⓒ 정지영


-이른바 '석궁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나. 배우 문성근씨가 동명의 르포를 감독에게 제안했다고 들었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서형 작가가 쓴 <부러진 화살>이라는 르포가 있다. 제목이 같고 비슷한 내용이 있어, 영화가 그 책을 원작으로 했다고 언론에는 오르내리지만 사실이 아니다. 문성근 씨가 그 책을 내게 제안했는데 무척 재밌게 읽었다. 서형 작가를 만나 책에 쓴 내용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느냐 물었더니 갖고있던 자료를 보여주더라. 또 '김명호 교수 구명운동본부'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많은 자료를 얻었고 박훈 변호사에게 연락해 그의 공판 기록을 세 상자 정도 넘겨받았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1년 정도 걸렸다."

-4억이라는 적은 예산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 배우들도 개런티 없이 참여했는데.
"예산을 줄여야 했다. 전주, 제천 영상위원회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았고,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실내 장소 즉 아파트, 술집, 카페 등 모든 장소는 공짜로 촬영이 가능한 데만 물색했다. '돈 달라' 그러면 사정을 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 찍었다. 장소가 맘에 들어도 일단 돈이 들어가면 포기하는 식이었다.

법원 장면이 문제였는데, 서울시 교육청에 가서 보니 유리창에 있는 교육청 마크를 법원 마크로 바꾸면 법원 청사가 될 것 같았다. 서울 영상위원회를 통해 행정 절차를 밟았고 교육청에 공문을 보냈지만 아무 소식이 없는 거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곽노현 교육감을 점심 식사 자리에서 만나 사정 설명을 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곽 교육감이 그 자리에서 비서에게 공문을 확인하게 하고 검토한 뒤 적절한 조치를 취해줬다. 돈이 없어서 스태프와 연기자가 고생했지 내가 고생한 건 없다."

왜 박훈 변호사와 김명호 교수를 영화 주인공으로 삼았냐면...

-성역으로 불리는 사법부에 정면 도전한 영화다. 이 영화에 사법부가 긴장한다는 소문도 있다.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영화가 민감한 문제를 건드렸다고 하는데, 이 민감한 문제를 다시 건드려 시끄럽게 할 이유가 사법부에 있을까. 물론 사법 당국이 이런 영화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방해를 한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가 사법부의 구조적인 문제를 건드린다면 그것도 하나의 문제 제기 아닌가. 감독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개봉이 어려울 것 같지도 않다. 누군가가 시비를 건다면 표현의 자유를 거스르는 거다. 만에 하나 사법 당국이 이 영화에 시비를 건다면 그들은 바보겠지."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 ⓒ 민원기

-영화의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나 박훈 변호사는 영화만큼 독특한 인물들이다. 김 교수는 지난 1월, 만기 출소했는데 영화 상영에는 안 나타났다. 박훈 변호사는 영화를 본 뒤, '철학이 있는 생양아치 변호사를 기대했는데 덜 철학적이고 덜 양아치였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김명호 교수가 부산까지 와서 영화를 보기는 번거롭고 해서 서울에서 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김 교수만 만나서 사건을 영화화 하려 했는데, 취재차 박훈 변호사를 만나 술 먹으며 얘기를 나눠보니 박 변호사자체가 정말 흥미로운 거다. 김 교수와 박 변호사, 둘이 함께 가면 영화가 재밌어지겠다 싶어서 그의 캐릭터를 살렸다. 원래의 박훈에다 더 보태거나 뺄 것 없이 근접하게 표현했다.

보고, 느끼고, 같이 아파하고, 아픈 이야기를 통쾌하게 할 수 있었던 힘은 내가 만난 김명호 교수의 캐릭터를 어떻게 구현해낼까 고민하는 와중에 생겼다. 투쟁으로 말하면 지칠대로 지쳤을 텐데 아직도 의지를 잃지 않고 있는 김 교수를 보면서 통쾌함을 얘기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았다. 박훈 변호사도 마찬가지였고."

박근혜 커터 상해, 이명박 BBK 왜 언급했냐고?

-배우가 들고 있는 신문에 "이명박, 'BBK 문제되면, 대통령직 걸겠다'는 제목이 크게 나오거나 박근혜 의원 커터 상해 사건도 잠시 언급된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안청수, 임영락이라는 교도관의 이름도 의미심장한데.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된, 당시 신문에 난 사건을 딴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서 집어넣은 것은 아니다.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라 생각한다. 교도관의 이름은 그냥 재미로 썼다."

-박 변호사가 "그 판사, '꼴통' 보수예요"라고 하자 김 교수는 "나랑 맞겠군. 나도 보수고, 별명이 '꼴통'이거든"이라 되받아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감독의 보수론인가.
"철학이라고 해두자. 김명호 교수가 기득권과 싸우는 형국이어서 그가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이려니 생각했었다. 사회 통념상 그렇게 넘겨짚은 건데, 만나서 직접 이야기 들어보니 그는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김 교수 본인은 보수적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그는 분명 원칙주의자다. '원칙을 지키자', '원칙을 지키면 좋은 사회가 된다' ... 우리가 약속한 원칙을 지키는 게 진정한 보수다. 우리 사회는 그러나 그런 보수를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보수는 사회가 약속한 걸 지키는 거다. 그리고 약속은 했지만 그것을 개선시켜 나가는 게 진보다."

-감독과 같은 노장 감독들이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풍토인 것 같다. 감독 또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비롯한 투쟁 현장에만 있다 보니 내 정체성에 의문이 간다'고 말한 바 있는데.
"지금은 자본이 우리를 검열하는 시대다. 자본과 내 세대가 만나는 게 상당히 어렵다. 과거에도 몇 차례 시도했지만 내가 직접 만나는 것을 그들(자본)이 꺼리고 젊은 사람이 대신 만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소통이 되는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른' 대접하기가 어렵고 불편하다는 거다. 일 잘하면 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어른 아이가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시나리오 들고 투자 심사를 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게 어렵다.

현장에서 점점 밀려나다 보니 그들은 우리더러 감각이 낡았다고 한다. 아직도 한국은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게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의 정서는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가 힘들다. 그러나 할리우드의 노장들은 젊은 영화 말고 보편적인 영화를 만든다. 보편적인 영화가 필요하지 않나. 내가 오랜만에 영화를 만드니까 동료 감독들이 그러더라. '정 감독 작품이 잘 되면 우리도 영화 만들 수 있겠지'. 내가 염려했던 건 내 영화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끌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것. 기우였다. 중학생이 재밌다고 하더라. 그러니 20대 젊은이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신인 감독의 새로운 피도 좋지만 검증받은 감독의 관록도 무시할 수 없다."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 ⓒ 성하훈


"관객이 내 영화 좋아하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감독은 갈라프레젠테이션에 한진 해고 노동자 10인을 초대한 바 있고, 지난 8일에는 영화인 희망버스를 타고 김진숙씨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땠나.
"희망버스를 타고 갈 때만 해도 우리가 경찰과 실랑이만 하다 말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인들이 머리가 좋은 건지 뛰어난 섭외력으로 경찰들을 설득했다. 85호 크레인 가까이에서 비록 김진숙씨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통화라도 할 수 있어서 감동적이었다. 예상 못한 만남이었는데 그의 건강한 목소리를 들으니 다행스러웠고. 김진숙씨와 함께 노숙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마음으로 함께 한 데 만족했다."

-갈라프레젠테이션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창동 전 장관 등 참여정부 옛 각료들의 모습도 보였다.
"내게는 뜻밖이었다. 영화 개봉을 언제 할지도 모르고, 상당히 늦게 개봉하는 걸로 결정된 까닭에 일반 관객들이 먼저 봐주기를 바랐다. 정치인들은 오피니언 리더라 그들이 말을 하면 여론이 형성될 테니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정동영 의원이 부산에 온 김에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만류했다. 문재인 이사장과 이창동 감독은 문성근씨가 초대를 해서 만나게 된 거다." 

-독립운동가 김산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리랑>을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으로 안다. 작업은 계속되는 건가. 계획이 있다면.
"<아리랑> 준비하다 영화를 떠난 건데, 준비 기간 8년 동안 중국을 몇 번이나 다녀왔는지 모른다. 그 사이 나는 늙어버렸다. <부러진 화살>이 가시적으로 성공하는 걸 보면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겠나. <부러진 화살>은 저예산 영화라 엄청난 관객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관객이 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감독 그만 둘 수 있다. 미련 없다. 영화라는 게 보다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 만드는 건데, 관객으로부터 외면 당하면 언제든지 영화 그만둔다. '소수 내 마니아만 봐도 된다'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나는 예술영화처럼 어렵게 영화 만드는 것 안 한다. 무거운 영화라도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나는 관객을 끌어가는 게 아니라 관객과 호흡한다."

 <부러진 화살>의 첫 상영 이후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부러진 화살>의 첫 상영 이후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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