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댄싱 퀸 김추자와 한국 록의 살아있는 전설 신중현이 합심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노래가 있습니다. 3선 개헌과 유신 전야의 시대에 뇌쇄적인 눈빛에 육감적인 엉덩이를 흔들어대며 당시 한국사회를 들었다 놨던 '님은 먼곳에'입니다. 모름지기 노래라 하면 트로트풍에 이미자처럼 다소곳이 불러야했던 시절에 소울 풍의 노래를 더군다나 불온한 창법으로 불러 젖히는 김추자는 요주의 대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김추자는 간첩설 등 온갖 곤욕을 겪으며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신중현 또한 유신정권의 표적이 됩니다. 그의 대표곡 '미인'은 퇴폐적 가사와 저속한 창법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됩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번 보고 두 번 보고…"라는 가사를 저잣거리에서 "한번 맞고 두 번 맞고'식으로 바꿔 부르며 군사정권을 씹어댔기 때문입니다. 유신정권으로부터 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지시를 거부했던 신중현은 결국 1975년 '공연정화대책' 발표 이후 혹독한 물고문을 당한 뒤 구속 수감됩니다. 

여성들의 치마가 무릎 위로 조금만 올라가도, 남자들의 머리카락이 귀만 덮어도 가위를 들이대던 시절로서는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릅니다. 그 수상한 시절 유신정권은 베트남에 파병한 지 10년 만인 1973년 한국군의 철수를 완료합니다. 그리고 베트남전이 끝나고 33년이 지나 한 편의 영화가 개봉됐습니다. 지금까지 전쟁 영화의 화자가 대부분 남성이었던데 비해 여성이 화자로 등장한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2008년 개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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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어느 시골 마을 종갓집. 애인이 있던 상길(엄태웅)과 결혼한 순이(수애)는 매서운 시집살이에 종종걸음을 치며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헌데, 하나가 비었습니다. 삼대외독자인 남편의 대를 잇지 못한 겁니다. 하지만 상길은 순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다 도망치듯 입대해 버립니다. 그런 순이에게 유일한 낙은 동네 아낙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 시어머니는 "남편 군대 보내고 노래가 나오냐"며 연신 구박합니다.

씨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시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그 날'에 맞춰 면회를 가라며 순이의 등을 떠밉니다. 후줄근한 여인숙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소 닭 보듯 멀거니 건너보던 상길은 "니, 내 사랑하나?"라며 가슴에 비수를 꽂습니다. 그런 상길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순이. 하늘은 봤지만 별은 따지도 못하고, 상길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버립니다. 시댁에서 쫓겨나 친정으로 발길을 돌리지만 아버지는 "그 집 귀신이 돼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오갈 데 없는 순이는 남편을 찾아 전쟁의 한복판으로 떠나기로 작심합니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플롯으로 나뉩니다. 봉건적 가부장제의 잔재가 똬리를 틀고 있던 시대에 순박한 시골 아낙 순이가 어떻게 당대의 규범들에 맞서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가는지를 천착합니다. 다른 하나는 남자들이 저지른 전쟁에 대한 반성과 용서입니다. 그것은 이준익 감독이 지적했던 것처럼 폭력과 광기로 점철된 20세기의 '히스토리'를 사랑과 평화라는 이름의 21세기 '허스토리'로 포용하는 시퀀스입니다. 

순이가 뛰어든 베트남 전쟁은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이루지만 그에 비해 총체적 규명을 위한 한국사회의 노력은 빈약하기 그지없습니다. 32만 명이 참전한 한국군 중 5천여 명이 전사하고 베트남 민간인 2백만 명이 사망한 전쟁임에도 영상이든 문학이든 인색합니다. 베트남 특수로 불리며 '용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차관과 군사원조에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받은 달러를 더해 이른바 박정희식 '근대화'를 이뤘음에도 말입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 이후, 특히 여성의 눈으로 베트남 전쟁을 성찰한 <님은 먼곳에>를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여필종부의 순이에서 위문공연의 꽃 써니로 변신하다

남편 찾아 삼만리에 나선 순이가 처음 찾은 곳은 국방부 정문 앞.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곡절 끝에 순이는 삼류 밴드를 이끄는 정만(정진영)을 만납니다. 정만은 베트남에서 동료의 돈을 털어 먹고 도망쳐온 날라리로 순이로부터 돈을 받고 베트남 위문공연단을 다시 꾸립니다. 순이는 와이낫 밴드의 보컬로 영입(?)된 후 베트남행 배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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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라는 이름으로 첫 공연을 하지만 몸은 얼어붙고 조롱과 야유만 바가지로 얻어먹습니다. 그러나 베트콩 소녀가 눈앞에서 사살당하고, 공연 중 부대를 습격한 폭격에 아연실색하는 등 전장의 한복판을 통과하면서 순이는 차츰 써니로 변신해 갑니다. 과감한 의상에 도발적인 몸짓으로 무대를 누비며 병사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써니 덕분에 와이낫도 인기밴드로 자리를 잡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베트남에 온 순이가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하는 모습이 단 한 장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건적 잔재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또한 애초 순이가 베트남에 온 목적은 상길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호이안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남편을 만나러 가느냐"는 물음에 순이는 늘 엷은 미소로 답합니다. 과연 순이가 베트남으로 간 이유는 뭘까요?

대신 영화는 순이가 써니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케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발산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도 터득하게 합니다. 비록 위문공연의 꽃이 되어 뭇 사내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지만 써니는 자신의 무대를 마음껏 즐길 뿐입니다. 마치 상길의 애인을 빗대 "남편 사랑은 첩에게 넘겨주고 니는 아들 낳아 내 사랑 받을 생각이나 하라"던 시어머니의 엄명에 맞서기라도 하듯이.

써니가 반라의 차림으로 육체를 드러내고 병사들의 욕망에 불을 지피지만 순이에게 그것은 욕망의 찌꺼기나 유희의 노리개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화의 포스터인 스콜이 쏟아지는 속에서 병사들이 환하게 웃는 써니를 허공으로 들어 올린 장면처럼 전쟁을 해체시키려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자신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남편 찾기는 명분에 불과하고 사실은 자신의 삶을 즐기려는 그녀만의 서사를 보란 듯이 펼쳐 놓는 것처럼.

이렇게 순이가 무대에 올라 써니가 되면서 이전의 순이는 두 개의 인물로 분화를 촉진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여필종부의 순이와 위문공연의 꽃이 된 써니를 뛰어넘는 새로운 여성성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영화의 한계이자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입니다.

여전히 집단무의식을 작동시키고 있는 한국사회

영화는 전쟁의 폭력과 광기에 대해서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들춰냅니다. 상길이 극한의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미처 날뛰는 것이나, 써니에게서 억눌린 남성을 갈구하는 병사들의 성적 판타지는 모두 전쟁이라는 극대화된 폭력의 공포가 낳은 사생아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남성적 폭력이 전쟁 밖에서도 발현된다는 점입니다. 밴드의 보컬이었던 제니를 사랑으로 구슬려 임신시켜 놓고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주먹을 휘두르는 정만은 우리 안의 폭력의 또 다른 모습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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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영화는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조명합니다. 월맹군에게 사로잡혀 지하 땅굴에 갇힌 정만 일행이 "돈 벌러 왔을 뿐"이라고 하자 월맹군 장교는 "그렇다면 한국군과 목적이 같다"고 응수합니다. 국가에 의해서든 개인이든 한국의 베트남 행은 외화벌이 즉, 미국의 '용병'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셈입니다. 이후 정민 일행은 땅굴 속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며 미래를 준비하는 그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월맹군에게 한국은 주적이 아님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반면 미군은 탐욕과 욕정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상길의 실종 소식을 접한 순이는 호이안으로 가는 방법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지만 방법은 하나뿐, 미군의 도움을 받는 것. 미군 장교는 소재 파악의 대가를 요구하고 순이는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교의 방에 남습니다. 순이의 이 결정은 시어머니의 등쌀에 베트남행 배에 올랐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또한 남자들이 저지른 전쟁의 폭력을 끌어안는 용서이며, 히스토리와 허스토리의 교차 속에 허스토리에 방점을 찍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정만 일행은 죽기 살기로 모았던 달러 뭉치를 전부 불태워버립니다.

상길의 따귀를 갈기는 영화의 엔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관객의 몫으로 남습니다. 지고지순한 남편 찾기의 신파로 이해할 수도,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순이에서 써니로 살기 위한 독립선언으로, 그도 저도 아니면 조강지처를 박대한 상길의 회개로 바라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순이의 그 손은 아들이자 남편을 베트남으로 보내야만 했던 뭇 아내들과 어머니들의 새카맣게 타들어간 가슴 속을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말인즉슨, 이렇습니다.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당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에게 고통과 상처로 각인된 전쟁. 권력과 자본에게는 더할 수 없는 독점적 수혜를 누리게 했던 전쟁. 종전 36년을 맞았음에도 한국사회로 하여금 애써 '용병의 역사'를 지워버리도록 집단무의식을 여전히 작동시키고 있는 전쟁. 순이의 시선으로 바라 본 베트남전쟁은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권력과 자본은 호시탐탐 해외파병의 검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때만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사랑하는 '님을 먼곳에' 보내는 추악한 용병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는 것. 추석 연휴인 오는 12일 MBC 특선영화를 통해 안방을 찾는 <님은 먼곳에>를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님은 먼곳에 베트남 전쟁 추석 특선영화 하얀전쟁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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