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방영된 MBC 드라마 <질투>(극본 최연지, 윤명혜 연출 이승렬)

1992년 방영된 MBC 드라마 <질투>(극본 최연지, 윤명혜 연출 이승렬) ⓒ MBC



드라마! '드림(dream)'이라는 단어를 그 어원으로 하며 대중에게 꿈과 이상을 제공하는 간접 인생!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꿈을 드라마를 통해 들여다보고, 자신을 대입시켜보는 은밀한 쾌감은 세대를 불문한 영원한 오락이다. 대중이 열광하는 드라마에는 비단 재미뿐 아니라 그 시절 사회 모습도 담겨 있다. 그러므로 지금과 다른 그 시절만의 생각과 유행은 지나간 드라마를 지금에서 더 재미있게 해주는 요소가 된다. 이에 한국 드라마사에서 가장 영향을 발휘한 작품 중 하나인 <질투>를 통해 그때 그 시절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질투>,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시작

1992년 여름에 방영된 MBC <질투> 는 '신세대', 'X세대', '신인류'라는 신조어로 해석되던 그 당시 젊은이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오늘날 한국 드라마 체계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킨 '트렌디 드라마'라는 용어를 최초로 사용하며, 이전의 대다수 드라마와는 다른 관점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전 드라마가 흔히 다루던 '재벌가의 감춰진 비극', '버림받은 여자의 복수극', '화목하지만 바람 잘 날 없는 대가족의 일상' 같은 레퍼토리를 거부했고, '인과응보', '권선징악' 이라고 불리는 우리 고전과 동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교훈성'이라는 주제를 박차버린 채, 스물 중반에서 서른 초반 남녀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그려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트렌디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함이다. 단 몇 명의 등장인물이 극을 이끌어 간다는 표면적 특징 뿐 아니라, 그 안에 담고 있는 스토리 역시 단순하다. 그 시절 최고의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먹고살고, 일하고 연애하는지에만 관심을 둘 뿐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드러내지 않는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대다수 드라마가 <질투>에서 출발한 '트렌드'라는 법칙 위에다 이전 드라마가 주로 다루던 '재벌가 이야기'라는 두 개의 코드를 혼합한 복합형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과거 김수현 작가 표 재벌드라마'에다 '질투' 표 트렌디 드라마의 전형을 합친 듯한 드라마가 최근에 등장한 것을 말한다. 극중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모두 잘생기고 화려하고, 일에서는 냉철하고 강직하며, 마음에선 열망이 가득한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와 달리 20여 년 전 드라마 '질투'는 특별한 줄거리 없이 그 시절 문화와 젊은이들의 생각을 덤덤한 시각으로 보여주는 등, 순수하게 트렌드에만 집중해 지금과는 큰 차이점을 보인다.

단순한 줄거리, 오히려 인기 비결

 <질투>에서 최진실이 맡았던 역할은 '여성적 매력은 없지만 귀염성 있는 여행사 직원' 하경이었다. 하경과 영호(최수종 분)는 오누이만큼 허물이 없는 탓에 오랜 친구다.

<질투>에서 최진실이 맡았던 역할은 '여성적 매력은 없지만 귀염성 있는 여행사 직원' 하경이었다. 하경과 영호(최수종 분)는 오누이만큼 허물이 없는 탓에 오랜 친구다. ⓒ MBC

작은 평수의 중류층 맨션에 이혼녀 엄마(김창숙 분)와 딸 하경(최진실 분)이 살고 있다. 여성적 매력은 없지만 귀염성 있는 딸 하경은 여행사 직원이고, 호방한 성격의 엄마는 잡지사 편집장이다. 친구처럼 서로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은 직장에서는 똑 부러지는 전문직 여성들이고, 하경과 남자친구 영호(최수종 분)는 오누이만큼 허물없는 탓에 오랜 친구다.

그 가운데 연상의 피자집 여사장(이응경 분)이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여성미에다 신비함 그리고 재력까지 갖춘 연상녀에게 마음을 뺏긴 영호를 보며 하경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어느 틈에 은근한 질투심에 빠진 하경은 이제 변호사가 된 고교 시절 과외 선생(이효정 분)을 우연히 만나서 그에게 마음을 열려던 차, 그마저도 깍쟁이 여고 동창 채리(김혜리 분)에게 뺏기고 만다. 자신과 다르게 주위에선 다들 뭔가 잘 돼 가는 듯해서 혼자 애가 타는 하경. 힘에 부쳐서 모든 감정을 접으려고 할 때쯤, 영호의 고백이 이어진다.

"나 이제, 더 이상 질투하기 싫어."

<질투>, 인스턴트 문화의 시작을 알린 드라마

그 당시 서울 번화가 몇 곳에만 존재하던 편의점이 이 드라마에 등장하자, 수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밤중에, 그것도 음식뿐 아니라 생필품까지 갖춘 '이상한' 가게에서 라면과 김밥을 먹으며 데이트를 하는 주인공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이 나누는 '신세대' 느낌 풀풀 나는' 대화나 그들의 의식주를 따라 하고 싶은 욕구는 젊은이들 사이에 서서히 끓어올랐다.

편의점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일하는 하경은 영화에서나 보던 뉴요커를 연상시켰다. 편의점에서 면 팬티를 사가는 하경의 모습 역시 도시 문화가 가져올 더 많은 편리함을 기대하게 했다. 피자가 대중화되기 전이던 그때, 피자집 여사장은 '넓적하고 커다란 종이 상자'를 배달원에게 건네며 '식기전에 어서 빨리!'를 외친다. 낯설어서 깊은 호기심을 가지게 한 새로운 문화들이 이 드라마에서 쏟아져 나왔고, 이는 시청률 상승에 가장 크게 공헌했다.

트렌디 드라마, 일본 문물에 대한 과잉 추종?

1990년대 초 중반까지 일본 문화는 그 매력에 빠진 청소년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유통되고 있었다. 불법 복제된 'X-Japan', '안전지대'의 노래를 듣는 것이 그들에겐 자랑이었고, 남과 다른 자신만의 감성을 소중히 하며 일본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나갔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논노>, <앙앙> 같은 패션 잡지들은 멋쟁이 청소년들의 필수품이어서, 그 안에서 본 패션 스타일이나 헤어·옷 만들기 법을 통해 스스로 멋을 내는 청소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 십 대들이 마약 주사 자국을 가리기 위해 한여름에도 긴 윗도리를 입고 그 대신 하의는 매우 짧게 입던, 이른바 오늘날의 '하의 실종 패션'이 유행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본 여가수 '자드'나 '쿠도 시즈카'와 비슷한 분위기로 인기를 끌던 강수지와 그 라이벌 하수빈이 왕성한 활동을 한 것도 이때였다. 그녀들은 큰 리본 핀을 머리에 꽂고 일본풍의 패션과 노래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텔레비전에선 일본 것을 그대로 베낀 광고나 쇼 프로그램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산뜻한 일본풍 라이프스타일의 달달한 이야기가 드라마 <질투>엔 한가득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최진실이 하고 나온 은색 리본 머리띠는 동대문에서 출발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질투>, '작가 최연지'를 대중에 알리다

 몇몇 논란에도 불구하고 <질투>는 58%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작가 최연지는 명실공히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한 획을 긋게 된다.

몇몇 논란에도 불구하고 <질투>는 58%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고, 작가 최연지는 명실공히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한 획을 긋게 된다. ⓒ MBC


<질투>는 작가 최연지가 마흔을 목전에 두고 쓴 것이다.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녀는 공부하러 가는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살다 온 후 드라마 작가로 새 출발을 했다. 그녀가 일본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드라마 <질투> 에 고스란히 녹아들었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 신문화 전파자의 역할을 하기에 이른다.

그 가운데 1991년 방송된 일본 드라마 <도쿄 러브스토리>의 내용과 구성 및 캐릭터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것과 주제곡이 일본 그룹 '하운드 독'의 'Fly'와 많은 소절이 비슷하다는 것이 드러나 <질투>는 여러 번 난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드라마 방영 중에 주제곡의 일부 소절이 바뀐 채 전파를 타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달콤한 질투의 유혹'에 마음을 뺏긴 시청자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58%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해서 제작자들의 불안감을 가뿐히 누그러뜨려 주었고, 작가 최연지는 명실공히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한 획을 긋게 된다.

<질투> 이후로 1993년 KBS 주말 드라마 <연인>(신애라·김주승·이효정 주연)에서는 변호사·검사·의사·화가·기자 같은 전문 직업군의 일상을 그렸고, 1996년 <애인>(유동근·황신혜· 이응경 주연)에서는 중년의 아슬아슬한 러브 스토리를 통해 '애인 신드롬'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후 몇 개의 화제작들을 거쳐 올가을 방영될 김희애 주연의 격정 멜로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연지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현재를 담은 또 다른 트렌디 드라마를 기대하며

드라마 <질투>의 방영 후 20여 년이 흐른 지금, 주인공 최진실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당시 젊었던 배우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하며 중년 연기자가 되었다. 그와 함께 드라마 문법도 변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신진 작가들은 초기 트렌디 드라마 <질투>의 장점을 잘 캐치해서 자신들의 드라마에 녹여내려 애쓰고도 있다.

각박한 세상에서 꿈을 잃어가는 대중들에게 잠시나마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하는 드라마! 대중들은 꿈과 희망이 담긴 이야기를 그 시절의 정서와 함께 담아내는 드라마를 통해 잠시 잠깐의 행복한 꿈을 꾸고, 이는 먼 훗날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기기도 한다. 1992년 드라마 <질투>! 이제 주인공이 떠나간 그 자리엔 그때의 추억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질투 최진실 최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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