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칸> 카란 조하르 감독, 샤룩 칸, 까졸 출연, 필라멘트픽쳐스 배급, 상영시간127분, 인도영화

<내 이름은 칸> 카란 조하르 감독, 샤룩 칸, 까졸 출연, 필라멘트픽쳐스 배급, 상영시간127분, 인도영화 ⓒ 필라멘트픽쳐스

지난 13일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의 현장검증이 있었다. 그는 7월 22일 15시 22분 노르웨이 총리실과 정부 건물을 테러하고, 그것도 부족해 2시간여 후 우퇴위아 섬의 노동당 청소년캠프 행사장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그런데 76명이나 잔인하게 죽인 용의자치고는 현장검증에서 너무 태연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신념에 찬 얼굴을 하고 자신이 저지른 사건을 재현해 내는 것을 보고 세계는 경악했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이 브레이비크라는 젊은이를 '브레이크' 없는 악의 화신으로, 인면수심의 후안무치로 만들었는가? 바로 신념이다.

전투적 우익사상과 반다문화주의 성향, 거기에 더하여 기독교 근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반이슬람적이고 친이스라엘적인 글들을 인터넷에 자주 올릴 정도로 그 정도가 심하다. 우리사회의 극우주의와 기독교 기득권층의 안하무인과 닮은듯하여 씁쓸하다. 그의 정치적 신념도 한몫을 했겠지만 크리스찬인 나로선 그의 기독교적 근본주의 신념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념화한 종교는 마약이다

'신앙'과 '신념'은 다르다.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신념은 자신에게서 시작한다. 신앙은 사람을 살린다. 신념은 살릴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다. 종교가 신앙을 말한다면, 종교적 근본주의는 신념을 말한다. 신념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악용될 때 끝을 모르는 악으로 치달을 수 있다. 노르웨이 테러사건의 용의자 브레이비크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행동화한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종교는 민중의 마약이다."

칼 마르크스가 남긴 이 한마디는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마르크스 시대의 마약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부정적 의미인 마약 같은 개념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진통제여서 고통을 삭여 주는 기능을 가졌다는 것인데, 그렇더라도 진통제가 치료제가 아니고 보면 그리 종교에 호의적인 해석도 아니다.

어쨌든 마약은 마약이다. 요즘 같이 종교가 종교의 순기능을 감당하기보다 사회가 걱정해 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보면, 종교가 마약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늘 이슬람 테러리즘에 익숙하다. 대부분 비이슬람에 가해지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빈번히 매스컴에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 한 사람이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게 무슬림이든, 기독교도든, 불교도든, 종교가 얼마나 신념화하면 파괴적인 무기가 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쯤해서 올해 봄 극장가에 잔잔한 감동을 안겨 준 <내 이름은 칸> 이야기를 안할 수 없다.

영화 <내 이름은 칸>은 기독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민족종교 7개 종단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은 물론 무슬림들까지 함께 모여 상영회를 가짐으로써 세간에 주목을 받기도 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데 한 걸음 나아갔다는 평가다. 그러나 이런 일회적 행사로는 종교간 갈등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도그마에 갇힌 기독교에 사랑의 화살을 꽂다

 싱글 맘 만디라(까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맞고 있던 칸에게는 청천벽력인 9.11테러 사건. 그 사건이 터지면서 칸은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삶을 살게 된다.

싱글 맘 만디라(까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맞고 있던 칸에게는 청천벽력인 9.11테러 사건. 그 사건이 터지면서 칸은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삶을 살게 된다. ⓒ 필라멘트픽쳐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종교간 공통분모로 돌아가야 한다. 종교가 신앙이 아니라 신념화할 때 근본주의로 전락하고 이는 '사랑'을 뺀 '도그마(dogma)'에 갇히게 된다. 기독교 용어로 말하면, '도그마'가 아니라 '케리그마(kerygma)'가 되어야 '신앙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교조주의를 벗고 복음주의를 입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앙한다면 절대 사랑이 빠질 수 없다. 사랑이 있는데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이 빠진 종교의 신념화는 곧 살인병기다. <내 이름은 칸>은 IQ 168의 천재지만 아스퍼거 증후근이란 자폐증을 앓고 있는 무슬림 리즈완 칸(샤룩 칸)이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엮고 있다.

싱글 맘 만디라(까졸)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행복한 나날을 맞고 있던 칸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았던 9·11테러 사건. 그 사건이 터지면서 칸은 졸지에 테러리스트로 의심받는 삶을 살게 된다. 이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기독교 사회 미국, 과연 기독교는 무엇이고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묻게 만든다.

"내 이름은 칸입니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

칸의 절규는 미국이 다민족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기독교 도그마에 갇혀 있는지를 잘 알려 주는 외침이다. 칸은 무슬람교도라는 이유로 테러리스트가 되어 투옥된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태풍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미국인을 구조하는 활동을 펼친다.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는 기독교 세계(미국)에 사랑으로 다가가는 칸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그는 인종적, 종교적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은 극단적이며 신념화한 무슬림교도가 아니란 걸 말로, 몸으로 보인다. 종교의 공통분모가 사랑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칸의 이야기는 종교를 넘는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참 종교 이야기다. 참 종교는 바로 삶이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칸이 그것을 보여 준다.

칸은 사랑으로 도그마를 극복한다

 이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기독교 사회 미국, 과연 기독교는 무엇이고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묻게 만든다.

이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기독교 사회 미국, 과연 기독교는 무엇이고 미국이란 어떤 나라인가 묻게 만든다. ⓒ 필라멘트픽쳐스


대통령을 만나야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칸. 그 천진난만함 속에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집시 생활을 하고 돈을 버는 그의 순진함과는 달리 그를 대하는 기독교적 도그마(미국인)는 그를 회피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대통령을 만나는 대장정에 오른 그에게 다가오는 차가운 시선은 미국의 사회 기저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도그마와 엘리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그를 상대해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물론 무슬림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방인이기 때문인 것으로 영화가 이끌고 가는 듯하지만, 실은 기독교적 독선이 밑에 깔려 있다.

'힘든 세상에서 이 영화는 희망을 노래하고 교훈과 감동을 준다'는 <뉴욕 타임스>의 증언을 봐도 칸의 순진무구함에서 오는 사랑의 마력을 읽을 수 있다. 종교인이기 이전에 사랑이 뭔지 알고 있는 한 남자, 무슬림교도 칸을 통하여 보여주려고 했던 카란 조하르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종교적 신념도, 인종적 차별도, 사랑 앞에서는 무릎을 꿇는다는 것이다.

어수룩하지만, 고장 난 기계를 고친다거나, 한 번 보면 줄줄이 외우고, 퍼즐 대회에 일등을 하는 칸, 분명 천재성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나 큰 소리와 노란색을 싫어한다. 이는 슈퍼 센서티브 민감성 체질이다. 이런 칸의 양면성이 영화를 보는 내내 그에게 더 흥미로 다가가게 만든다.

"우리 엄마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셨죠. 좋은 행동을 하는 좋은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나쁜 사람, 저는 좋은 행동을 하죠."

칸이 어릴 때 어머니께서 들려 주셨던 이 말은 그의 인생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다. 칸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행동이 어머니의 계시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그것을 도그마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계시를 바탕으로 하지만 사랑을 잃지 않을 때 종교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게 바로 신앙이다.

"가족은 혈연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에요. 사랑으로 맺어지는 거예요"라는 말에서 칸이 도그마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도그마의 독선에 빠진 후안무치 브레이비크와 사랑을 잃지 않은 케리그마 선봉장 칸이 어떻게 다른지 가히 비교가 된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 종교적 갈등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강남 부자와 기독교는 소위 한통속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기득권의 종교 기독교, 정말 기독교가 기득권자들의 종교인가? 말도 안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가 기득권화 할 때 도그마는 극성했고, 그럴 때마다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그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 그 도그마의 장벽을 깨부수지 않는 한 사랑의 종교라는 위상을 찾기는 어렵다. 브레이비크와 칸은 각각 다른 방법으로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들이 어떻게 도그마의 독선을 버리고 사랑의 메신저가 돼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뉴스앤조이, 위키트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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