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2003년 9월 27일, 8회로 접어든 경기 후반, 1사 2루 상황에서 삼성의 3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두 점 차로 뒤져있긴 했지만 추격의 의지를 아직 놓지 않고 있던 상대팀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대행 김용철은 투수 가득염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다. 한 점이라도 더 내준다면 뒤집기 어려운 상황에서 절정의 타격감을 자랑하는 타자를 피해가며, 동시에 병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정석에 가까운 작전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삼성의 3번 타자가 이승엽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틀 전 광주에서 55호 홈런을 날리면서 일본 요미우리의 오 사다하루가 1964년에 기록한 한 시즌 최다홈런기록(그리고 2001년 긴테스의 로즈와 2002년의 세이부의 카브레라가 낸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었다. 당장 그 날이라도 한 개의 홈런만 추가한다면 역사적인 56홈런의 신기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남겨진 기회는 그 날 경기까지 포함해서 여섯 경기가 있었다.

이승엽은 기록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그 날 1회와 4회, 5회에 각각 타석에서 정면승부의 기회를 잡았지만 삼진과 땅볼, 뜬공으로 물러나며 부진했다. 그래서 네 번째였던 8회의 그 타석은 그 날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마지막 기회가 고의사구로 허망하게 사라지자 역사적인 기록 작성의 순간을 목격하기 위해, 그리고 혹시 운이 좋다면 엄청난 가치를 가지게 될 그 56호 홈런볼을 손에 넣기 위해 저마다 잠자리채를 들고 내야석을 비워둔 채 외야석부터 빼곡히 채워 앉은 1만 2천 여 명의 관중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결국 이승엽이 네 번째 공을 지켜보다가 1루로 걸어 나가는 순간, 흥분한 관중들은 그라운드로 무수한 오물과 불붙은 신문지들을 던져대기 시작했고, 결국 1시간 43분 동안이나 경기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이 이승엽과 삼성의 홈구장인 대구가 아닌 원정지 부산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롯데 감독과 투수를 질타하며 분노를 터뜨린 것은 보통 때라면 롯데 선수를 향해 던져지는 견제구 하나를 향해서도 벼락같은 '마' 함성을 질러댔을 사직의 야구팬들이었다는 점이다.


잠자리채 관중 2003년에 한해서는, 막대풍선보다 먼저 챙겨야 할 야구장 나들이의 필수품은 잠자리채와 뜰채였다.

▲ 잠자리채 관중 2003년에 한해서는, 막대풍선보다 먼저 챙겨야 할 야구장 나들이의 필수품은 잠자리채와 뜰채였다. ⓒ 삼성 라이온즈


암흑기의 빛, 홈런

2003년에도 한국프로야구의 '암흑기'는 계속되었다. 월드컵이라는 대형태풍에 휩쓸리며 239만 명까지 줄어들었던 관중들은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다시 야구장에 발길을 주지 않았다. 삼성과 현대와 기아의 세 재벌 구단과 나머지 다섯 구단이 각각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이루며 딴 세상 야구를 하는 모습도 변함이 없었고, 구단마다 '돈 안 되는' 어린이 회원은 원년의 수십 분의 1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등 팬서비스에 아무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모습도 여전했다. 2003년 5월 말까지 관중 수는 오히려 전년보다도 25%나 감소하며 역대 최저관중기록을 세울 기세였다.

하지만 5월 하순에 들어서면서 돌발변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벌써 생애 다섯 번째 홈런 타이틀에 도전하고 있던 스물일곱의 젊은 홈런왕 이승엽이 5월 15일에 대구에서 열린 연속경기에서 각각 두 방씩, 하루 동안 네 방의 홈런을 몰아친 데 이어 28일과 31일에도 각각 두 개씩의 홈런을 몰아치며 가뿐하게 20개를 넘긴 것. 그러더니 만 26세 10개월 4일이 되던 6월 22일에는 '세계최연소 300홈런기록'이라는 이벤트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종전기록은 오 사다하루의 27세 3개월 11일). 게다가 늘 봄이면 등장하는 '단순계산'에 의하면, 그런 페이스가 시즌 막바지까지 이어진다면 이승엽의 홈런은 60호를 돌파할 가능성마저도 점쳐질 정도였다.

홈런이 관중을 불러 모은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야구가 국민스포츠로 자리를 굳히는 과정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존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1994년의 선수노조 파업으로 바닥을 쳤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계기가 1998년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왕 대결이었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다.

홈런은 복잡한 룰이라든가, 작전이라든가, 미묘한 불문율 따위의 야구가 가지는 난삽한 진입장벽들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점수결정방식이며 그 자체로 모든 관중들을 한 순간에 폭발하게 만드는 감성적인 순간이다. 그 홈런이 가장 많은 이들에게 야구라는 경기의 매력을 간결하고도 강인하게 보여준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이승엽의 홈런은 '로또보다 확률 높은 대박의 가능성'이라는 색다른 즐거움을 더했다. 어디까지 뻗어갈지 모를 유망한 홈런타자가 때려내는 홈런공은 그 하나하나가 새롭고 의미 있는 기록의 증거물이었고, 그래서 혹시라도 그 홈런 공을 손에 넣는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수천만 원 이상의 가치를 확보하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300호 홈런공을 주운 이는 삼성 구단의 '29인치 TV와 야구장 연간회원권' 제안을 뿌리치고 직접 거래에 나서 1억2천만 원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 400호, 혹은 500호의 기록으로 갈아치워질 300호에 비해 한시즌 최다홈런기록을 만드는 55호와 56호 홈런공의 가치는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되었고, 야구팬들은 본격적으로 야구장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승엽이 등장하는 경기라면 내야석보다 외야석이 먼저 채워지는 게 상식이었고, 방망이 풍선보다는 잠자리채나 뜰채를 챙기는 것이 야구장 나들이 준비의 정석이었다.

조연이 아닌 라이벌, 심정수

그런 홈런 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심정수라는 멋진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6월과 7월 내내 6,7개의 차이를 유지하며 이승엽을 추격하던 심정수는 8월 들어 이승엽이 폭행시비에 휘말려 2경기 출장정지 처분까지 받으며 보름 넘게 손맛을 보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 틈에 8월 13일에는 1개 차까지 추격했다. 그로부터 한 달 여 동안 피 마르는 1, 2개 차이의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나갔던 것이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입문했던 두산 시절부터 '소년장사'라 불렸던 그는 나이를 먹으며 '헤라클레스'로 진화해 있었다. 각각 재계 라이벌 삼성과 현대의 얼굴이기도 했던 이승엽과 심정수는 각자 뚜렷한 개성과 스타일을 가진 홈런타자였는데, 이승엽이 정확한 타이밍과 유연한 스윙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공을 흩뿌리는 우아한 장면을 연출했다면, 심정수는 엄청난 근육량에서 나오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어떤 공이든 잡아당겨 왼쪽 펜스를 넘길 수 있는 사나이였다.
헤라클레스 심정수 심정수는 이승엽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고, 2003년 홈런왕 대결의 2인자였지만, 그 해 투수와 감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타자는 오히려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였다.

▲ 헤라클레스 심정수 심정수는 이승엽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고, 2003년 홈런왕 대결의 2인자였지만, 그 해 투수와 감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타자는 오히려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였다. ⓒ 현대 유니콘스

심정수는 통산기록 면에서도 이승엽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앞뒤에 늘어선 동료 타자들의 지원사격도 이승엽만큼 받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홈경기 때마다 찾아와 열광적으로 응원해줄 팬들을 가지지 못한 수원 '임시거주팀'의 소속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엽처럼 잠자리채 관중을 몰고 다니지도 못했고, 홈런행진 역시 끝내 53개에서 멈춤으로써 그 해의 승자가 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심정수를 단순한 '조연'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가 투박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간결한 스윙을 바탕으로 이승엽보다도 훨씬 높은 타율을 기록한 정확성 높은 기술적인 타자였다는 점, 그리고 단 세 개 차이로 멈춰선 홈런포도 '비거리'라는 면에서는 오히려 이승엽을 능가하는 양질의 것들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타격 3관왕에 도전했던 그는 .335(2위), 53홈런(2위), 142타점(2위), 110득점(3위), 154안타(6위), 124볼넷(1위)라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시즌 기록을 남긴 타자 중 한 명이 되었지만, 결국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그에게 한 가지 위로가 된 것이 있다면, 그 해 한국프로야구 선수협의회에서 동료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것은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라는 점이었다.

극적인 마침표, 56홈런

10월 2일의 경기는 삼성의 그해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그제껏 이승엽의 홈런 수는 55에 머물고 있었고, 이제 나라 안팎의 기대와 이목은 이승엽을 경기 전날 가위에 눌리게 할 만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날 경기가 열린 곳은 대구였고, 상대팀은 또다시 롯데 자이언츠였다.

1회 초에 롯데에 먼저 두 점을 빼앗긴 뒤 1회 말 반격에서 김종훈이 몸에 맞는 공으로 진루했지만, 3번으로 나선 양준혁이 병살타로 물러나며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그날따라 3번이 아닌 4번에 배치된 그의 첫 타석이 돌아온 것은 2회였다.

상대투수는 2년차 신인 이정민이었고, 이승엽과는 첫 대결이었다. 하지만 경기상황으로나, 야구장 안팎의 상황으로나, 그에게도 정면대결 말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 상황에서 이정민은 1,2구로 연거푸 직구로 스트라이크와 볼을 하나씩 던졌고, 3구 역시 직구였다. 다만 최대한 낮은 코스였고, 최대한 바깥 쪽을 노린 공이었다.

그 순간 이승엽의 배트가 돌았고, 정확히 걸리긴 했지만 맞아나가는 타구의 궤적이 너무 낮았다. 자칫 내야수에게 직선으로 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직선의 타구였다. 하지만 그 공은 좀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빳빳하게 날았고, 순식간에 대구구장 좌중간쪽 외야 펜스 뒤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펜스와 전광판에서는 폭죽과 불꽃이 솟구쳤고, 관중석에서는 관중들의 함성이 폭발했다. 따지고 보면 '비공인'이긴 하지만, '아시아 시즌 최다홈런기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해 홈런쇼의 거대한 마침표였다.

56홈런, 그 이후

56호 홈런의 순간 극적인 56호 홈런의 순간, 축포가 터지고 있다

▲ 56호 홈런의 순간 극적인 56호 홈런의 순간, 축포가 터지고 있다 ⓒ 삼성 라이온즈


그해 심정수가 날린 홈런은 53개였다. '아시아 신기록'이 되기 위해 도달해야 했던 56개에 세 개 모자랐고, 종전까지 이승엽이 가지고 있던 '한국 신기록'을 깨기 위해 필요했던 54개에도 한 개가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이승엽을 제외하면 50홈런 고지를 넘어선 유일한 기록이었고, 그해 모든 투수와 감독들이 가장 두려워한 타자는 이승엽이 아닌 심정수이기도 했다.

마지막 경기에서도 되새겨볼 만한 장면들이 있었다. 이승엽의 56호 홈런이 터져 나오는 순간 대부분의 기자들도 취재를 중단했고, 사실상 그해의 시즌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운데 최하위 팀 롯데는 이승엽과 양준혁에게 홈런을 맞고도 차곡차곡 점수를 챙겨가며 그 날의 승리를 가져가 간신히 3할 승률을 채웠고, 이정민은 56호 홈런의 제물이 된 얼떨떨한 충격 속에서도 5이닝을 3실점으로 버텨 프로데뷔 첫 승의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불꽃놀이를 통해 불러모은 관중들은 길게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이듬해, 자유계약선수 자격과 함께 '아시아 홈런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나고, 라이벌을 잃은 심정수도 허탈감에 사로잡힌 듯 절반 이상 떨어진 홈런 페이스로 몸살을 앓자, 야구장은 다시 휑하니 비어갔다. 2004년 한국프로야구 총관중은 최악이라던 2002년보다도 오히려 6만 명이 적은 233만 명으로 주저앉았고, 특히 대구는 2003년의 절반 수준인 19만 명으로 격감하고 말았다.

홈런과 스타가 관중을 불러 모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약발이 길지 못하다는 점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오히려 한국프로야구에 제대로 다시금 핏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홈런이 줄고 확실한 스타도 없었지만 구단들이 비로소 절박함을 느끼고 팬들을 향해 눈을 돌린 2007년과 2008년 무렵 이후였다는 점과 비교해 곱씹어볼 만한 지점이다.  

이승엽 심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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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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