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2002년 여름, 한국인들은 바로 눈앞에서 사상 첫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달아올랐고, 축구장 밖으로 흘러넘친 인파는 전국의 모든 '광장'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는 공간들을 붉은 물결로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프로야구 경기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려웠고, 한국야구위원회(KBO)마저 월드컵 한국전이 벌어지던 날에는 경기를 취소시켜가며 바짝 몸을 낮추고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 탓만을 할 일은 아니었다.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확연하게 갈라진 구단들 간의 빈부격차가 경기력으로까지 영향을 미치며 승부에 대한 호기심을 무참히 짓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 그랬듯, 프로야구 역시 삼성과 현대라는 두 재벌그룹의 대리전으로 불을 뿜었고, 나머지는 힘겹게 구색을 맞춰가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 해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239만 명에 불과했다. 그것은 7개 구단 시절이던 1989년보다도 적은 숫자였고, 225만 관중을 기록했던 1983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수준이었다. 3만 명 이상이 앉을 수 있는 부산 사직구장에 10월 16일과 19일에 96명과 69명만이 자리를 지키는 서늘한 풍경이 연출된 것도 그 해의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해의 야구장 역시 가을에는 어김없이 달아올랐다. 각자의 불운과 정면승부해야 했던 두 팀이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그 승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땀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야구사의 암흑기라 불리는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역설적인 최고의 명승부로 남게 되었다. 

1990년대 최강의 팀 'LG 트윈스'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김응용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음지의 야구인', 김인식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서민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의 성적을 끌어내는 것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수로 통했다. 하지만 늘 '우승과 인연이 없는' 감독으로도 꼽혀왔는데, 2007년 SK와이번스에서 첫 번째 우승을 맛본 뒤로는 또 하나의 왕조시대를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맞수였던 김응용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듯 하다' 고 감탄했던 일로부터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김응용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음지의 야구인', 김인식 감독과 비교하면서는 '서민감독'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재일교포 출신으로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의 성적을 끌어내는 것으로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수로 통했다. 하지만 늘 '우승과 인연이 없는' 감독으로도 꼽혀왔는데, 2007년 SK와이번스에서 첫 번째 우승을 맛본 뒤로는 또 하나의 왕조시대를 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맞수였던 김응용 감독이 '마치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듯 하다' 고 감탄했던 일로부터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LG트윈스

1990년대를 대표하는 강팀으로 첫 손에 꼽아야 하는 것이 LG트윈스다. 1990년을 '창단 첫 해 우승'이라는 진기록과 함께 시작했을 뿐 아니라 곧이어 '선발-중간-마무리'의 투수분업제를 기초로 하는 선진적인 전력운용 시스템을 처음으로 안착시키고 가장 이상적인 세대교체의 전형을 선보이며 강팀의 체질을 만들어내며 90년대 내내 군림했기 때문이다.

이상훈-김태원-정삼흠의 선발진에서 차명석, 강봉수, 차동철의 계투진을 건너 마무리 김용수로 이어지는 마운드나 유지현-김재현-서용빈으로 시작해 김동수, 송구홍을 거쳐 한대화, 노찬엽으로 이어지며 김영직으로 군데군데 방점을 찍는 타선은 장단과 완급과 신구의 모든 면에서 환상적인 조화였고, 빈틈없는 라인업이었다.

1994년에 이루었던 두 번째 우승은 '사건'이라기보다는 그런 압도적인 강함의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인 차명석 코치가 떠올리듯 '2년에 한 번 씩은 우승을 할 것 같았던' 것은 그저 기분이 아니라 객관적인 계산의 결과였다. 1990년대에 LG트윈스는 4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했고, 그것은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 가장 많은 횟수였다.

하지만 1995년에 내내 선두로 질주하다가 막판에 발목을 잡히며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친 데 이어 1997년과 1998년에는 연달아 한국시리즈에 오르고도 해태의 9번째 우승과 현대의 첫 번째 우승의 제물이 되어 무릎을 꿇는 불운이 이어졌다. 시즌 전이면 손에 쥔 것만 가지고도 우승이 충분해 보였지만, 시즌이 치러지면서 그 중 한두 개가 자리를 이탈했고 그것이 묘하게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모든 계획을 뒤엉키게 만드는 흐름이 해마다 반복됐다. 

그리고 그렇게 허송세월하는 사이 팀의 기둥이 하나씩 빠져나갔고, '노송'이라 불리던 김용수마저 사라져간 2000년대에 남은 것은 옛 영광의 흔적들 뿐이었다. 2000년대는 LG 트윈스에게 깎아지른 절벽 앞이었고, 그대로 추락해 하위권의 수렁으로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다시 물길을 되돌려 90년대의 영광을 회복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갈림길이 되었다. 항상 강팀이었으면서도 전력을 다해 부딪혀보지 못한 그들에게, 자신의 힘과 한계를 스스로 느껴보는 것은 그 무렵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사 최강의 팀 '삼성 라이온즈'

LG트윈스가 90년대의 강팀이었다면, 삼성 라이온즈는 한국프로야구사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프로원년인 1982년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것만 7번이었고, 정규시즌 최고승률을 기록한 것도 4번이었다. 하지만 우승팀으로 대접을 받은 것은 전후기리그 통합우승을 이룬 1985년 한 번 뿐이었고, 한국시리즈에서는 7번 모두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던 삼성은 동시에 '비운의 팀'이기도 했다.

특히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국내외의 대형 선수들은 물론이고 해태 타이거즈 9회 우승의 주역 김응용 감독까지 모셔다가 최강의 전력을 구성한 덕에 라이벌 현대마저 7경기차로 따돌리며 압도적으로 정규리그를 1위로 마쳤던 2001년은 삼성에게 더욱 쓰라린 추억이 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던 그 해의 우승컵 역시 에이스 갈베스가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믿을 수 없는 불운 속에 정규리그에서 무려 13.5경기차로 뒤졌던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며 달갑지 않은 일곱 번째 준우승 트로피를 수집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거짓말처럼 반복된 일곱 번의 불운은 이제 운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련님 야구'라느니 '배부른 사자'라느니 하는 야유도 듣기 싫었지만, 그 무렵 스포츠칼럼에 간혹 등장하던 '불임구단'이라는 단어는 푸른 유니폼을 걸친 이들 모두의 가장 불쾌하고 고통스럽고도 공포스러운 신경의 어딘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통산 10회 우승의 명장 김응용 감독 이미 30대의 나이에 실업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40대 초반부터 프로팀의 감독으로 일하며 통산승수, 통산승률, 통산우승횟수 등의 모든 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남겼다. 2002년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우승은 그가 프로팀 지도자로서 이룬 열 번째 우승이었다.

▲ 통산 10회 우승의 명장 김응용 감독 이미 30대의 나이에 실업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40대 초반부터 프로팀의 감독으로 일하며 통산승수, 통산승률, 통산우승횟수 등의 모든 면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남겼다. 2002년 삼성 라이온즈에서의 우승은 그가 프로팀 지도자로서 이룬 열 번째 우승이었다. ⓒ 삼성 라이온즈


2002년의 가을야구, 10년의 운명을 가르다

삼성은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의 네 부문을 석권한 이승엽과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마해영에 FA계약을 통해 복귀시킨 양준혁으로 클린업트리오를 구성하고 있었다. 마운드 역시 17승의 임창용과 13승의 평균자책점왕 엘비라가 이끌고 100%의 승률왕 김현욱이 뒤를 받치는 의심의 여지 없는 최강의 진용을 꾸리고 있었다.

그에 비하자면 LG쪽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선발진을 이끄는 것은 8승의 만자니오와 6승의 최원호였고, 그 공백은 중간에서 100이닝 이상씩을 던지며 10승을 올린 장문석과 8승을 올린 이동현, 그리고 돌아온 마무리 이상훈으로 간신히 메워가고 있었다. 야수진은 그나마 나은 형편이긴 했지만, 삼성에 비해 팀타율은 2푼 이상, 팀홈런은 두 배 가까운 차이로 약세였다. 그 해 트윈스에서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것은 .293의 이병규였다.

정규리그에서 간신히 4위에 턱걸이한 LG는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최동수의 활약으로 현대를, 플레이오프에서는 박용택의 활약으로 KIA를 누르며 한국시리즈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 사이 7경기의 혈투를 치러야 했고, 그렇지 않아도 넉넉지 못한 선발진은 이미 고갈되어버린 상태였다.

그대로 비교해도 한참 기우는 삼성과 LG의 승부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몇 차전까지 가느냐였고, 문제는 삼성의 그 수많은 스타들 중 누가 그 해 한국시리즈의 주인공이 되느냐였다. 

월드컵 때문에 한참 뒤로 밀린 일정 탓에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것은 11월 3일이었다. 그리고 첫 경기는 엘비라의 호투 속에 완력의 차이 그대로 4대 1의 삼성 승리였다. 2차전은 외국인투수 만자니오가 한 점만 내주는 호투를 펼치고 조인성이 홈런을 터뜨리는 활약 덕에 LG가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3차전에서는 최원호가 초반부터 난타당한 데 이어 4차전에서는 믿었던 마무리 이상훈까지 실점하며 무너진 LG가 1승 3패까지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5차전에서 마해영에게만 홈런 두 방으로 다섯 점을 내주는 곤욕을 치르고도 필승카드 이동현과 장문석을 총동원해 간신히 뒷문을 닫으며 한 점차로 LG가 이기면서 시리즈 전적은 2승 3패로 이어졌다. 하지만 다시 대구로 옮겨 치른 6차전에서 LG는 3회 초 먼저 최동수의 석점 짜리 홈런으로 기선을 잡고도 2,3,4회에 연속실점하며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제 더는 버티기 어려운 한계가 느껴지는 순간이었고, 시리즈 전체의 승부의 추가 확연히 기울어지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6회 초에 찾아온 1,2루의 찬스에서 LG의 김성근 감독이 던진 승부수가 판도를 안갯 속으로 밀어넣었다. 권용관의 자리에 김재현을 대타로 기용했던 것이다. 1994년 신인으로서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90년대 내내 최강 LG시대를 이끌었던 영웅. 하지만 고관절이 썩어 들어가는 치명적인 병을 얻으며 달릴 수 없게 된 그는 선수인생의 기로에 서있었다. 물론 2사 상황에서 달릴 수 없는 타자를 세운다는 것은 감독으로서도 배수진이었다.

어지간한 짧은 안타로는 1루에서조차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장타가 아니고는 타점을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 중에도 늘 당겨치던 김재현을 향해 상대팀이 극단적으로 수비진을 우측으로 밀어놓는 시프트를 펼칠 때마다 '피하려고 하지 말고, 더 멀리 때려서 넘기라'고 주문하던 김성근 감독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다시 한 번 정면승부를 주문했던 것이다.

김재현은 선수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을 그 타석에서 역시 정면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밀어치기였다. 노장진이 던진 바깥쪽 150킬로미터짜리 직구를 결대로 밀어쳤고, 공은 그대로 좌중간을 날카롭게 가르며 두 명의 주자를 모두 홈으로 불러들였다. 담장까지 뻗어 가는 장타를 날린 김재현은 절뚝거리며 간신히 1루에 안착했고, 그것은 그대로 경기장의 분위기마저 LG 쪽으로 끌어가는 내상 깊은 일격을 삼성에 가하게 된다.    

김재현의 2타점으로 6대 5로 재역전되었고, 그 분위기를 타고 8회 초에는 또다시 최동수와 조인성이 연속적시타를 때려 점수 차를 9대 5까지 벌려놓았다. 삼성도 8회 말 김한수의 희생플라이로 추격전을 벌였지만, 여전히 석 점 차가 남겨진 채 9회 말이 시작되었다.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시리즈 전적은 3승 3패로 돌아가게 되고, 그야말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단판 승부로 몰려가게 되어 있었다.

8회 말 2사부터 LG는 마무리 이상훈을 마운드에 올렸고, 이상훈은 1,2루 위기에서 진갑용을 플라이로 잡아내며 최고 마무리의 위용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9회 말, 삼성의 첫 타자는 공격력이 가장 빈약한 9번 김재걸이었고, 이미 승부에 대한 기대를 접은 김응용 감독도 굳이 대타를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김재걸이 중견수 키를 넘기는 큼직한 타구를 날리며 2루까지 달려 나갔고, 1번 강동우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2번 브리또가 다시 풀카운트 승부 끝에 볼넷을 골라 나가면서 두 번째 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승엽. 그 해 스물 여섯의 나이에 이미 네 번째 홈런왕에 오른 그는 이상훈의 2구째 밋밋한 슬라이더를 날카롭게 당겨 쳤고, 타구는 순식간에 대구구장의 우중간 펜스를 훌쩍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석 점 홈런. 까마득해 보이던 9회 말 석 점 차의 간격을 순식간에 증발시켜버린 극적인 동점 홈런이었다.

하지만 더 결정적인 장면은 그 다음에 숨어있었다. 이승엽의 뜻밖의 동점홈런이 불러일으킨 흥분이 채 식기도 전, 이상훈을 대신해 마운드에 오른 LG 투수 최원호의 세 번째 공이 바깥쪽 높은 코스로 날아들자 마해영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통타해 우측 펜스를 그대로 훌쩍 넘겨버리고 말았다. 거짓말 같은 끝내기 홈런. 그것으로 그 해의 모든 승부가 끝이었다.

마해영과 최원호 이승엽의 극적인 동점 스리런 홈런이 터저나온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해영이 날린 또하나의 타구가 담장을 넘었고, 그렇게 모두의 예상보다 두 템포 빠르게 마침표가 찍혀졌다. 마해영은 환호했고, 최원호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 마해영과 최원호 이승엽의 극적인 동점 스리런 홈런이 터저나온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해영이 날린 또하나의 타구가 담장을 넘었고, 그렇게 모두의 예상보다 두 템포 빠르게 마침표가 찍혀졌다. 마해영은 환호했고, 최원호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 삼성 라이온즈


분수령, 2000년대 초반의 강팀과 약팀

한 시즌 내내 지지부진하다가 가을 넘어 초겨울에야 활짝 피어났던 그 해의 야구. 그래서 마치 가을부터 야구를 시작했던 듯 한 착각을 기억 속에 남긴 그 해 LG와 삼성 두 팀은 야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남겼고, 또한 각자 큼직한 성과들을 챙길 수 있었다.

삼성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한국시리즈와의 악연을 청산하며 그 뒤로 다시 네 해 동안 세 번 한국시리즈에 나가 두 번 더 우승하는 가을의 강팀으로 탈바꿈했고, '비운'이라는 딱지도 자연스레 과거의 기억 속으로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LG도 성과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야신'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김재현은 선수인생의 후반기를 시작할 힘을 얻었으며, 팬들은 지울 수 없는 역사와 드라마를 갖게됐다. 자신감과 더불어 모래알 같던 선수단에 일시에 구심력을 확보한 것도 성과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과정과 결과를 통해 보완해야 할 점들을 찾은 것도 성과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 해의 한국시리즈는 2000년대 초반의 대표적 강팀 삼성과 약팀 LG를 가른 분수령이 되기도 했다. 우승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구단과, 우승을 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세운 채 허둥거리다 얻은 성과마저 날려버린 구단의 차이였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성과를 내는 일보다, 그것을 챙겨 쌓아올리는 일이라는 점을, 우리는 몇 해를 두고 지나서야 알게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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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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