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하다 폭발사고가 나자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이 공포에 짓눌린 채 거리로 뛰쳐나와 도망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하다 폭발사고가 나자 마을 주민들과 학생들이 공포에 짓눌린 채 거리로 뛰쳐나와 도망치고 있다. ⓒ Clasart Film+TV Produktio


"아직도 독일에는 17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으며, 2004년 한 해에만 크고 작은 원자력 관련 사고가 114건이나 발생했다."

평화와 환경, 핵의 위험 등 사회적 문제를 주로 써온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구드룬 파우제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클라우드>의 엔딩 자막입니다. 핵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평단으로부터 '양심을 뒤흔들어 깨우는 이야기'라는 극찬을 받은 그의 소설은 <구름>으로 번역되어 일찌감치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2006년에 제작된 영화는 지난 13일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원자력발전소를 재가동하는 내레이션으로 오프닝을 엽니다.

"자동복구 장치 이상 없음. 냉각장치 이상 없음. 원자로 교체를 시작한다. 원자로 가동시작."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의 조용한 마을에서 여고생 한나(파울라 카렌베르크)는 엄마, 남동생 울리와 함께 평화로운 일상을 보냅니다. 석 달 전 전학 온 남학생 엘마(프란츠 딘다)의 시선에 줄곧 신경을 곧추세우던 어느 날, 시험을 치는 도중에 엘마가 한나에게 '연극부로 오라'는 쪽지를 건네고 교실을 나섭니다. 뒤이어 연극부실에 온 한나에게 엘마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고 둘은 가슴 설레는 첫 뽀뽀를 합니다.

그 순간,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립니다. 통상적인 대피훈련인 줄 알았지만 이윽고 "이것은 실제상황"이라는 교내방송이 숨 가쁘게 터져 나옵니다. NBC 경보(핵 및 생화학경보)가 발동된 것입니다. 학교와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엘마는 공항으로 대피하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뒤로 하고 한나에게 집에서 기다리라고 당부한 뒤 뛰쳐나갑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남의 일이 아니다

 마지막 기차를 타지 못하고 쓰러진 한나가 역 광장에 나와 방사능 비를 맞으며 어쩔 줄 모르다가 혼절하고 있다.

마지막 기차를 타지 못하고 쓰러진 한나가 역 광장에 나와 방사능 비를 맞으며 어쩔 줄 모르다가 혼절하고 있다. ⓒ Clasart Film+TV Produktio



영화는 원전 재가동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유출된 방사능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의 탈출 모습을 전반부에 재현합니다. 인간에 의해 발생한 인재라는 점에서 영화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스크린에 옮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와는 선을 긋습니다. 후반부는 방사능에 피폭됐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지켜나가려는 한나와 엘마를 중심으로 방사능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 재앙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냅니다.

한계도 있습니다. 원자력의 위험성과 핵산업의 이면 등에 대해 과학적으로 고찰하지 못하고 원전 사고가 남긴 끔찍한 고통과 참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에는 스케일이 작습니다. 대신 영화는 18살 청춘남녀에게 들이닥친 악몽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카메라의 미시적 접근으로 방사능의 공포를 명료하게 부각시키며 '그날 이후'의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를 관객들에게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영화는 후쿠시마처럼 원전 사고가 멀고 먼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을 증폭시켜 냅니다.

엘마와 헤어진 뒤 가까스로 집에 도착한 한나는 직장 때문에 집을 비운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챙깁니다. 재난경보 사이렌이 연신 울리는 가운데 모든 문을 밀봉하고, 음식은 통조림과 생수만 먹고, 비는 절대 맞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반복됩니다. 엄마를 기다리던 한나와 울리는 결국 지하실로 대피하고 잠시 뒤 엄마에게서 전화가 오지만 "방사능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으니 이모 집으로 피하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끝으로 연락이 두절됩니다.

자전거를 꺼내 동생과 함께 집을 나선 지 얼마 후 엘마가 도착하면서 서로 엇갈립니다. 텅 빈 마을 광장에는 젖소와 쓰레기만 뒤엉켜있고, 이모 집으로 가는 도로는 이미 폐쇄된 상태. 도로를 통제한 경찰과 주민들이 입씨름을 벌이는 뒤로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난투극이 벌어집니다. 샛길로 빠져 초원을 달리던 한나와 울리의 뒤로 먹구름은 빠른 속도로 밀려오고,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가던 울리는 탈출하던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동생의 시체를 부둥켜안은 채 넋을 놓고 있던 한나를 피난 가던 부부가 실랑이 끝에 강제로 차에 밀어 놓고 기차역으로 내달리지만 먼저 탈출하려는 사람들로 플랫폼은 아비규환이 따로 없습니다. 밀려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엘마의 뒷모습을 보고 안간힘을 다해 불러보지만 이내 멀어지고 한나는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모두들 떠난 기차역에 홀로 남은 한나는 광장으로 되돌아 나오고 육신을 꿰뚫는 방사능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혼절하고 맙니다.      

20세기 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 영화는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로 패닉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사실적이고 충격적으로 포착해 관객들의 심장을 조여듭니다. 그와 함께 죽음의 아가리를 쩍 벌린 방사능 먹구름이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을 집어삼키는 모습을 통해 후쿠시마의 비극을 환기시키는 한편 원전을 가동하는 국가는 언제든지 현실로 맞닥뜨릴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후쿠시마가 남긴 상흔은 깊고, 넓게, 오래 지속된다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드라이브를 하는 한나와 엘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드라이브를 하는 한나와 엘마. 죽음의 문턱에 놓여 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다. ⓒ Clasart Film+TV Produktio



영화는 병원에서 깨어난 한나의 아름다운 금발 머리숱이 듬성듬성 빠지는 장면을 통해 방사능 피폭의 실체를 한결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원전 폭발로 3만8천명이 사망하고, 18만 명이 피폭됐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에도 병동에서 사람들은 죽어나갑니다. 머리숱이 완전히 빠지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지내던 어느 날, 방사능피복 위험 때문에 병동에 들어 올 수 없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엘마가 밀고 들어오고, 둘은 재회합니다.

청춘남녀의 러브 스토리를 배치한 후반부는 여느 영화처럼 기적을 일궈내며 영웅을 탄생시키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사랑의 승리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습니다. 둘 사이에 위기가 찾아오고, 엄마의 죽음을 확인하고, 피폭된 사실을 확인한 엘마가 자살을 기도하고, 동생의 주검을 수습하는 과정 등을 통해 '원전 대폭발, 방사능 유출, 죽음의 구름이 몰려온다'는 영화의 헤드카피를 역설적으로 증언합니다.
 
이런 역설의 메시지는 한나와 엘마가 방사능 오염지역으로 차를 몰고 들어가 드라이브를 즐기는 장면에서 도드라지게 표현됩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둘의 사랑은 희망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 밖 현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후쿠시마가 남긴 상흔이 깊고, 넓게,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로부터 150~240km 떨어진 곳에 사는 여성의 모유에서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고, 인근 지역 아이들의 절반 가까이가 갑상선이 피폭되고, 일본이 자랑하는 흑우에서 방사성 세슘이 검출되고, 240km 떨어진 도시의 음식물 등 생활쓰레기 소각재에서도 세슘이 검출되고, 반경 600㎢ 지역의 토양이 체르노빌 원전사고 당시 강제 이주시켰던 수준으로 오염되고, 이 같은 사고를 처리하는 비용만 10조7000억원이 소요되고, 이런 방사성물질이 지구 한 바퀴를 도는데 불과 열흘 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으니까요.

이미 일본 전역은 모두 방사능 사정권에 들어섰습니다. 일본에서 완전히 안전한 곳은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10년 후 후쿠시마 평가시 그 대상에 한국도 포함될 정도로 우리 역시 고위험 군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마당에 원자력을 저탄소 녹색성장의 대안에너지로 선전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영화 <클라우드>는 경고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합니다.

예고 없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검은 구름과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가공할 공포 앞에서 (체르노빌에서도 후쿠시마에서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소중한 가족을 원자력과 맞바꿀 수는 없으며,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처럼) 원전 사고로 죽어가는 이들은 결국 이름 없는 서민들뿐이었다고.

원전 정책,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이슈삼아야

영화의 무대가 되는 독일은 후쿠시마 이후 2022년까지 원전 17기를 모두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전체 전력량 중 23%를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이 원전폐기를 결정한 이유입니다. 반핵이나 찬핵의 차원이 아니라 핵을 '위험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윤리적 문제로 인식하고 결정했다는 점입니다. 독일에 이어 스위스, 핀란드,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등도 탈핵-신재생에너지 개발을 선언하면서 '위험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습니다.

유럽의 이런 변화와 달리 한국은 최근 경주에 신월성원자력발전소 1, 2호기의 원자로 구조물 공사를 완공했습니다. 1호기는 내년 3월말 준공을 목표로 시운전에 들어갔고, 2호기는 내후년 1월말 가동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후쿠시마 이후 넉 달. 일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건만 원자력 설비 용량 세계 6위인 한국은 원전 확대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일이 원전을 완전히 폐기하는 2020년대가 되면 한국은 정반대로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 유럽이 '위험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치부심하면서 세계를 바꿔나가려고 하는데 반해 이명박 정부는 원전은 클린 에너지로 세계적인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겠다며 한국사회와 세계를 '위험사회' 속으로 한걸음 더 몰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전이 단순한 에너지의 영역이 아니라 공동체의 생사여탈권을 쥔 정치적 과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 4·27 재보선에서 삼척의 원전유치가 정치 쟁점화된 것이 단적인 예입니다. 이제 원전은 정치의 영역에서 공론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정책을 이슈화하여 이명박 정부의 위험사회와 건곤일척을 겨뤄야 합니다.

누가 위험사회로부터 한국사회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지, 더 이상 미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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