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1995년 4월 22일, 부산 사직에서 롯데 자이언츠가 삼성 라이온즈를 불러들여 홈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선발투수는 1989년 부산고등학교를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리고 1994년 롯데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해 곧장 7승을 올리며 기대를 모은 2년 차 강상수였다.

시즌 두 번째 등판이었던 강상수는 그날도 3회까지 삼성의 강타선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4회 초가 채 끝나기 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김실과 이정훈을 연속 볼넷으로 내보내기는 했지만 크게 흔들린 것까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아직 경기 초반이었다.

관중들은 어리둥절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녁 뉴스를 보면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갑자기 강판해야 했던 이유는 TV를 통해 경기를 보고 있던 누군가가 경기장으로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강상수는 첫 시즌을 마무리할 즈음 방위병으로 입대한 군인 신분이었고, 주말을 이용해 홈경기에 등판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침 그 경기를 TV를 통해 보게 된 소속부대 관계자가 경기장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중단'을 요구했던 것이다. 10년 이상 불안하게 이어져 온 '방위병의 홈경기 출장'이라는 관행은 그렇게 확실히 깨졌고, 그 이후 한국야구의 물줄기는 크게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다.

방위병 출장금지, 한국야구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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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야구위원회 초대 총재였던 서종철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성공을 위해 각 부서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런 그의 요구를 국방부가 거절할 수 없었고, '복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방위병의 경기 출장을 허용한다'는 양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위수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홈경기에만 출장하는 조건이었지만, 퇴근 후의 시간인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서 '시즌의 절반'은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 첫 수혜자는 1984년에 입대한 베어스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이었고, 1993년 프로 입단과 동시에 상무에서 방위부대로 소속을 바꾼 라이온즈의 신인 양준혁은 그렇게 시즌의 절반만 뛰면서도 치열한 홈런왕 경쟁을 벌이는 충격을 몰고 오기도 했다. 대개 대졸 신인들은 첫 시즌을 보내며 '프로감각'을 익힌 뒤 2년차를 방위병 신분으로 보냈고, 3,4년차부터 전성기를 향한 본격적인 스퍼트를 시작하곤 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3년 차를 맞이하던 한국인들은 슬슬 '특권'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동안 사회적 논의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던 '군대'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그것은 무려 30여 년간 군사정권 아래 살아온 한국인들에게 군대라는 것이 가지는 모순된 의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대란 그 자체로 가늠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힘 좀 쓴다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자기 아들만큼은 빼고 돌려 '빡빡 기며' 삼 년을 보내는 서민의 자식들을 서럽게 만드는 공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문민'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당시의 정부는 그런 국민적 감성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문제라면 그들이 늘 그랬듯, 맥락 없이 터뜨리는 '깜짝쇼' 방식의 일 처리에 있었다. 그 해 봄, '군인은 영리행위를 하거나 겸직할 수 없다'는 군인복무규율에 근거해 각 부대가 해당지역의 프로야구팀에 방위병 선수의 출장 불가방침을 통보했고, 그렇게 갑작스레 내려진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는 프로야구에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1995년 봄을 기준으로, 방위병 신분의 프로야구선수는 모두 55명이었다. 10명과 9명이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서 군부대로 출퇴근했던 방위병은 돌핀스와 이글스가 가장 많았고, 5명씩이었던 베어스와 타이거즈가 가장 적었다.

하지만 정작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로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은 트윈스와 타이거즈였다. 트윈스는 박종호(2루수)-유지현(유격수)-송구홍(3루수)으로 이어지는 주전 내야수 전원이 방위병이었고, 타이거즈는 투수·타수의 새 기둥인 이대진과 이종범이 방위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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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그렇게 되자 구단들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 경기력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은 물론이고, 방위병임에도 경기출장을 전제로 계약을 하고 연봉을 지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따져도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된 셈이기 때문이었다. 각 구단과 기업들이 각자 가능한 통로를 통해 정부를 압박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반응이 돌아왔다. 즉흥적인 조치에 예상을 뛰어넘는 파장이 이어지자 국방부 역시 당황했던 것이다.

4월 27일, 이정린 국방부 차관은 '오랜 관행을 바꾸면서 유예기간도 두지 않으면 큰 혼란이 빚어진다'는 이유를 들며 한 발 물러섰다. 연말까지는 그대로 출장을 허용하되, 12월 이후로는 규정대로 출장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 사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오가며 프로야구판을 들었다 놓았던 갈지자(之) 행보에 대한 비판여론이 치솟자, 다시 정부는 5월 21일 국방부 제1차관보 손병익에게 책임을 물어 해임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그 해 당장은 한 시름을 놓았지만, 정해진 대로 이듬해부터는 방위병들의 경기 출장이 전면 금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굵직한 변화의 줄기들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야구소년들, 병역의 부담을 더 무겁게 느끼다

우선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대거 프로 직행을 택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프로직행을 택하는 것은 '소년가장'들이나 하는 일로 여기던 분위기가 있었다. 프로원년, 진흥고와 광주상고를 졸업한 김정수와 장채근이 해태 코치의 꼬임에 넘어가 프로선수가 되겠다고 가출까지 감행했다가 뒤늦게 아버지에게 뒷덜미 잡혀 대학 기숙사에 던져졌던 것은 그런 분위기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대학과 프로팀이 대등한 위치에서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의 문호가 좀 넓어지고 집집마다 살림에 구김살도 좀 펴기 시작하던 1990년대 초반 들어서부터였다. 특히 방위병 출장금지조치가 내려지기 직전이었던 1994년은 프로와 대학의 경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는데, 그 해 고교무대 최고의 타자 김재현과 김동주가 각각 첩보전을 방불케하는 사연 속에 프로와 대학으로 갈라섰던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병역과 선수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이상, 대학에서 보내야 하는 4년의 세월은 너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생 선수들이 갑자기 머리를 누르기 시작한 2,3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4년간의 대학생활을 포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6년부터 대졸 선수들만을 대상으로 진행해오던 드래프트에 고졸선수들까지 포함시키게 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또한 방위병 경기출장 금지조치는 그로부터 몇 해 뒤 터져 나오게 되는 대규모 선수병역비리의 씨앗이 되기도 했고, '합법적 병역 회피수단'인 국제대회 대표 선발과 메달 획득에 대한 열망을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야구드림팀'의 역사가 시작된 것 역시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변화도 있었다. 그렇게 젊은 고졸선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부터 프로팀 입장에서는 신인 선수들을 '느긋하게 한두 해 가르칠'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2군이 종전의 '부상자 회복실' 내지는 '애매한 부실자원 관리소'의 낡은 의미를 벗고 비로소 '미래 스타들의 산실'로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도 그에 속한다.

야구선수의 병역,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문제

야구선수들에게 병역이란 보기보다 중요한 문제다. 누구라도 첫발을 내딛는 순간, 결코 10년을 장담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프로선수생명이라면 그 중 두 해 이상의 공백과 정체는 초일류와 삼류의 갈림길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역이라는 것이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참 어렵게 넘어서는 성장의 한 고비라는 점에서 선수들만 동정하고 마음 쓸 일이 아니긴 하다. 그래서 오직 그들만을 위해 새로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이기도 민망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극히 특별한 몇몇의 사례가 기준이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억지스러운 일이기에 모든 선수들에게 정답이라고 제시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박찬호에서 추신수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국위선양하면서 문제를 돌파한 이들도 훌륭하고, 상무나 경찰청을 거치며 한 단계 올라서서 돌아오는 선수들도 대견하다고 인정해줄 뿐이다.

하지만 벽의 가장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고도 좌절하지 않고 뛰어넘어 돌아온 이들의 분투에 대해서는 한 번 더 돌아보고 박수를 쳐줄 이유가 충분히 있다. 예컨대 일반전투부대, 혹은 해병대에서 복무하고 돌아와 다시 프로야구 판도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윤상균(LG)과 임훈(SK)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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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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