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94년 대졸 신인 야수 중 가장 이름값이 높았던 선수는 한양대 출신 유지현이었다. 그리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국가대표 주전 내야수 자리를 지키며 한 살 터울의 이종범을 제외하면 딱히 누구에게도 뒤진다는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그가 LG 트윈스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은 7000만 원이었다.

국가대표 경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공격과 수비 어느 면에서도 유지현과 비교될 수준은 아니었던 단국대 출신의 내야수 김재걸이 1년 뒤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며 받은 계약금은 유지현이 받은 것의 딱 세 배인 2억 1000만 원이었다.

물론 유지현이 대학 4학년 시절 어깨부상을 당하면서 이름값에 못 미치는 계약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 해 전 그 유지현보다도 한 수 위로 평가받던 이종범이 역시 7000만 원을 받았던 것, 그리고 그 이종범을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던 양준혁이 1억100만 원을 받았던 것과 비교하더라도 김재걸이라는 이 '특별할 것 없는 수비형 유격수'에게 그런 거액의 계약금이 안겨진 사연은, 그 해 출범한 현대 피닉스라는 괴물 같은 아마추어 팀과 연관짓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재걸 만능수비수로 '걸사마'로 불렸던 사나이. 하지만 오히려 짐이 되고 만 2억 1천만 원이라는 과분한 계약금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 김재걸 만능수비수로 '걸사마'로 불렸던 사나이. 하지만 오히려 짐이 되고 만 2억 1천만 원이라는 과분한 계약금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멀리 나갈 수 있는 선수였다. ⓒ 삼성 라이온즈


현대, '제 2 리그'를 꿈꾸다

1982년, 대한체육회장을 맡고 있던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올림픽 유치전에 몰두하고 있었고, 동시에 프로야구의 성공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인천을 중심으로 경기도와 정 회장의 고향인 강원도 지역까지를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을 맡아 달라는 프로야구 추진세력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원년부터 만루홈런이 펑펑 쏟아져 나오고 박철순과 최동원의 투혼이 드라마를 연출해내면서 프로야구가 모두의 예상을 깬 대성공을 거두기 시작했을 때도 정주영 회장의 인식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89년 MBC청룡이 매물로 나왔을 때도 '적자기업은 인수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을 반복해 프로야구무대에 '저렴하게' 입성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기도 했다.

하지만 1992년에 벌어졌던 갑작스러운 사건들이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놓게 된다. 그 해 봄 정주영 회장은 국민당을 창당해 직접 '정권 접수'에 나서게 되고, 국민당은 불과 창당 한 달여 만에 참가한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확보해 일약 3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리고 이어서 그해 겨울 대선에서는 '반값아파트'와 '공산당 합법화', 혹은 '사재 2조 원 국가헌납' 등의 파격적인 공약과 안기부가 개입된 '초원복국집'에서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해내 폭로할 정도의 정보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파란을 일으키며 김영삼, 김대중과 더불어 '빅3'로 군림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모은 400만 표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3위 낙선이었다. '현대그룹 식구들 표만 지켜도 해볼 만하다'고 했던 낙관의 순진함이 드러난 것이고, '초원복국집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층의 표가 오히려 김영삼 후보 쪽으로 몰려가는 기현상의 역풍을 정면에서 맞은 탓이었다.

정권 핵심층의 관권선거공작을 도청할 만큼의 배짱을 부리고도 낙선한 정주영은 곧 정치이력을 1년 만에 마감하고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그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는 마치 총수의 사조직처럼 움직였던 현대그룹 임직원들의 사기 저하, 그리고 국민당의 외곽조직 혹은 패잔병조직 정도로 전락한 대외적인 그룹의 이미지였다.

정치판에 돌풍을 몰고 왔던 정주영 그가 정치인이었던 것은 불과 1년 안팎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 그는 원내 31석을 가진 제3당의 대표와 대선후보를 지냈고, 또 '반값아파트'를 비롯한 센세이셔널한 공약과 '초원복국집 회동 폭로' 사건 등으로 정치권에 돌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수백억을 들여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것은 그 1년을 지우기 위한 출구전력의 일환이었다.

▲ 정치판에 돌풍을 몰고 왔던 정주영 그가 정치인이었던 것은 불과 1년 안팎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 그는 원내 31석을 가진 제3당의 대표와 대선후보를 지냈고, 또 '반값아파트'를 비롯한 센세이셔널한 공약과 '초원복국집 회동 폭로' 사건 등으로 정치권에 돌풍을 몰고 오기도 했다. 수백억을 들여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한 것은 그 1년을 지우기 위한 출구전력의 일환이었다. ⓒ 통일국민당 선거포스터


낙선, 그리고 스포츠를 통한 재기

정주영 회장은 경영에 복귀해 처음으로 가진 사장단 회의에서 '임직원들의 사기와 대외적인 이미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스포츠에 주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각 종목별 스포츠협회의 후원자를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정권의 고민을 풀어주며 자연스럽게 화해무드를 만들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이 축구협회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정세영 그룹회장(수상스키), 박재면 현대건설회장(수영), 이내흔 현대건설사장(역도), 이현태 현대석유화학회장(아마야구) 등이 일시에 스포츠계로 산개하게 된 것이 그 무렵이었다. 정몽구 현대정공 회장이 9년째 양궁협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을 합치면 무려 여섯 종목의 수장을 현대그룹이 휩쓸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은 내내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다. 기존에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던 여덟 개의 기업들은 굳이 현대라는 강력하고도 껄끄러운 경쟁자를 끌어들이면서까지 9, 10구단으로 리그를 확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구단들은 7구단으로 빙그레 이글스가 가입할 당시 30억 수준이었던 리그 가입금을 많게는 400억까지 불러대며 어깃장을 놓았다. 그런 텃세에 허리를 굽힐 사람이 아니었던 정주영 회장의 선택은 '제2의 프로야구리그 창설'이라는 어마어마한 기획이었다.

사실 미국과 일본의 '양대리그' 역시 기존의 프로야구 질서 밖에서 후발주자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리그를 만들어 대항하면서 시작된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현대의 발상이 황당무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업'보다는 '정책'으로서 출범한 한국의 프로야구에서 그것은 가능한 방식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에서 낙점한 인물이 커미셔너를 맡는 '준국가기구적인' 질서에 대항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정권의 허락을 받는다고 해도 그 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새로운 리그를 구성할 '동체급의' 기업을 찾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기획이었든, 아니면 단지 또 다른 노림수를 위해 외곽을 때리는 명분이었든, 현대가 '새로운 리그를 만들 만큼의' 선수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이상 한국야구계는 격랑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는 우선 '피닉스'라는 실업야구팀을 창단하기로 했고, 조만간 뜻을 함께하는 다른 기업들을 규합해 제2의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키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리고 수십억의 현금가방을 들고 예의 저돌적인 기세로 대학야구팀 숙소를 밤낮으로 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해 대학을 졸업하는 선수들은 어차피 곧 똑같은 프로선수가 된다는 전제하에 훨씬 많은 계약금에다가, 당시만 해도 프로선수가 되면 포기해야 했던 올림픽 대표선수가 될 자격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기존 프로야구팀들과 달리 이런저런 규약과 합의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현대 피닉스는 1994년 연초부터 일찌감치 민첩하게 움직이며 계약서를 모으기 시작했다.

피닉스, 1대 8의 싸움판에 서다

1994년 6월 무렵 이미 그 해의 대졸 빅4로 불리던 문동환, 심재학, 안희봉, 위재영을 비롯한 상위랭커 25명이 모두 현대 쪽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려대를 졸업한 뒤 롯데의 지명을 받고도 곧바로 상무에 입대했던 마해영을 비롯한 전역예정 선수들도 상당수가 현대 피닉스행이 예약되어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다. 잘 골라서 지명만 해놓으면 선수들로서는 별 수 없이 입단하게끔 되어있었기에 느긋하기만 했던 8개 프로구단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었다.

10월 31일까지는 아마추어 팀 소속의 선수와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던 아마와 프로 사이의 합의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몸이 달아오른 프로팀들은 '현대보다 한 장 더 얹어 주겠다'며 달려들었고, 결국 그렇게 한 개의 아마추어 팀과 여덟 개의 프로팀 사이에 치열한 돈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7월 들어 태평양 돌핀스가 4년 전부터 매달려온 투수 위재영을 2억 이상의 계약금과 4년 전 대학과 이중계약에 휘말렸을 때 깨끗이 물러나고 기다려준 인정에 호소한 끝에 '구두약속'을 받아냈고, 곧 LG 트윈스 역시 비슷한 액수와 방식으로 타자 심재학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단들은 현대와의 돈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전선이 고졸예정자들에게까지 확대되면서 김승관(삼성)과 조현(LG) 등이 각각 억대의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으며 프로행을 확정했다. 그 무렵 끝내 대학행으로 결론이 난 고졸 최대어 김건덕에게 건네진 제안은 2억이 넘을 정도였다.

프로팀 사장들은 '한 구단이 한 명씩만 책임지고,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선수를 빼옴으로써 현대를 저지하자'고 서로를 독려해가며 전의를 불태웠고, 그만큼 모든 면에서 지난해보다 배 이상 부풀어 오른 뜨거운 돈싸움이 펼쳐졌다. 애초에 역시 1억 가량의 계약금으로 현대를 택했던 김재걸을 돈싸움에 자존심싸움까지 벌인 끝에 삼성이 2억1000만 원이라는 황당한 액수를 던지며 끌어낸 것 역시 그런 와중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문희성, 조경환, 조태상은 그렇게 프로팀으로 한 발을 옮기려다 다시 '그 돈에 다시 한 장 더'를 외친 현대의 품에 안기기도 했다.

사상 최대의 돈 싸움, 하지만 곧 다다른 막다른 길

1994년 11월 28일, 결국 현대 피닉스가 창단식을 가졌다.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최고액인 3억 원을 받은 문동환을 비롯해 문희성, 안희봉, 조경환 등의 A급 선수들 외에도 조태상, 김동호 등이 모두 억대 이상의 계약금을 챙기며 현대 피닉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프로 창설 이래 최강의 아마추어 팀이 탄생한 것이고, 거꾸로 프로팀들은 역사상 최악의 신인흉년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듬해인 1995년에도 피닉스의 기세는 가라앉지 않았다. 프로 출신의 김시진과 김봉연이 코칭스태프로 가세했고, 이듬해에는 임선동과 박재홍을 LG와 해태로부터 빼앗아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런 화려한 멤버들의 힘으로 피닉스는 실업야구리그에서 어린애 팔 비틀 듯 승리를 잡아냈고 1995년과 1996년 사이 실업무대의 거의 모든 대회를 휩쓸며 공룡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1995년이 채 지나가기도 전, 제 2 프로야구리그의 창설멤버라는 선수들의 꿈을 일시에 박살내버리는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1995년 8월 31일, 현대건설 이내흔 사장이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기로 했다는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매입대금은 무려 470억 원. 피닉스 선수들에게 쏟아 부었던 경악스런 계약금 수십억 원도 사실 미끼에 불과했음이 드러난 엄청난 규모의 머니게임이었고, 이제 피닉스는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의 전력을 빠르게 보강하기 위한 선수공급처 혹은 선수거래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는 96년 재출범을 앞두고 태평양 시절부터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1번 타자감으로 박재홍을 보강할 수 있었고, 그 박재홍이 1번보다는 3번으로서 더 큰 효용을 가지고 있음이 입증되자 다시 문동환을 롯데로 보내면서 전준호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 그 힘은 그대로 창단 첫 해 한국시리즈에 오른 데 이어 3년차인 1998년에는 인천연고팀 사상 첫 우승을 이루어낸 원동력이었다.

순식간에 잊혀진, 하지만 거대했던 사건

유니콘스가 창단한 이후, 피닉스는 그저 하나의 평범한 실업팀으로 전락했고, 2002년에는 실업리그의 소멸과 함께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한때나마 프로야구 8개구단을 동시에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그 거창한 팀에 관한 기억은 오늘날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잠깐 스쳐갔을 뿐인 임선동과 박재홍,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프로무대에서 한 번이라도 불타올랐던 문동환과 조경환을 제외한다면 그 화려했던 멤버들 대다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히 평범한 선수로 전락해갔고, 선수 이력을 마쳐갔기 때문이다.

문동환 대학 시절,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최동원과 선동열 못지 않은 재목으로 꼽혔던 문동환. 1994년 현대 피닉스는 그에게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최고액이었던 3억원을 안겨주었지만, 그도 선수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 문동환 대학 시절, 국가대표 에이스로서 최동원과 선동열 못지 않은 재목으로 꼽혔던 문동환. 1994년 현대 피닉스는 그에게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최고액이었던 3억원을 안겨주었지만, 그도 선수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 대가로 내놓아야 했다. ⓒ 한화 이글스


안희봉과 강혁, 그리고 문희성과 김동호와 조태상. 실업무대에서 의미 없는 적수들과 만나 알루미늄 배트를 든 채 2, 3년을 허송한 탓이 크다고도 하고 '피닉스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 곳곳에서 제대로 적응하기 어려웠던 탓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고 원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던 계약금과 너무 쉽게 잡힐 것 같았던 장밋빛 미래가 그들이 한순간도 놓치지 말았어야 할 정신적 긴장과 균형을 무너뜨린 탓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억 1000만 원이라는 과분한 계약금만 아니었다면, 그래서 늘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대단한 '먹튀'라도 되는 듯 한탄하고 조롱하던 팬들의 시선만 아니었다면 김재걸이 조금 더 멀리 뻗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현대 피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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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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