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무솔리니가 군 열병식에서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 흔들며 악을 씁니다. 흑백영상은 이들 파시스트들이 리비아의 트리폴리 등에 상륙작전을 전개하고 이어 저항군들을 교수형 하는 장면을 교차합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20년 동안 리비아의 독립과 해방을 이끈 오마르 무크타르의 실화를 기록한 영화 <사막의 라이온> 오프닝 장면입니다.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1969년 9월 1일. 27살의 육군 중위 카다피는 코란과 이슬람 사회주의 그리고 이슬람의 통일을 혁명이념으로 내걸고 식민 대리정권인 시누이 왕조를 전복시킨 뒤 혁명정부를 수립합니다. 이후 카다피는 서방언론에 의해 줄곧 증오에 불타는 독재자로 불리면서도 미국 등에 맞서 리비아를 가장 자주적인 이슬람국가로 건설합니다. 그에 비례해 전략 요충지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려던 미국의 패권에는 균열이 가고, 적대적 관계로 돌아섭니다.

그런 리비아가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블록버스터를 능가할 정도의 장대한 스케일에 루카치의 말처럼 정교한 리얼리즘으로 완성된 <사막의 라이온(1981년작)>은 한반도와 빼닮은 질곡의 근대현사를 지닌 작금의 리비아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슬람 세계의 침략과 항전의 역사를 기억하라

 무솔리니가 교착상태에 빠진 식민지 리비아의 총독으로 그라치아니를 임명한 뒤 오마르 무크타르를 제거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무솔리니가 교착상태에 빠진 식민지 리비아의 총독으로 그라치아니를 임명한 뒤 오마르 무크타르를 제거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 팰콘 인터내셔널


1929년. 교착상태에 빠진 리비아 침략을 놓고 분기탱천한 무솔리니(로드 스타이거)는 그라치아니(올리버 리드)를 리비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오마르 무크타르(안소니 퀸)를 체포해 저항군을 분쇄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라치아니가 부임해 연회를 즐기는 날, 오마르는 이탈리아 부대를 급습해 막대한 피해를 가합니다. 그라치아니는 기동 타격대를 구성해 '폭도'들의 피와 혼과 저항을 짓밟아 버리라며 길길이 날뜁니다.

보복에 나선 이탈리아 군은 베드윈 부족을 습격해 청년들을 징용하고 곡식을 불태워 버립니다. 총상을 입은 전사를 발견하자 즉결심판에 처하고 저항하는 부족민들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처녀들을 위안부로 삼기 위해 강제로 트럭에 태웁니다. 급전을 들은 오마르는 도마뱀조차 숨을 곳이 없을 것 같은 사막 한가운데서 상상을 뛰어 넘는 매복 게릴라전을 펼쳐 파시스트들을 궤멸시켜 버립니다.

독이 오른 그라치아니는 3단계 작전 중 첫 번째로 우물을 폐쇄하고, 농지를 불태우며, 나무를 잘라내고, 부족민들을 10명에 1명꼴로 처형하는 이른바 초토화 작전을 개시합니다. 또한 철망을 친 수용소에 베드윈족을 가둬놓고 저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부족민과 오마르를 분리해 숨통을 조이기 시작합니다. 그에 따라 오마르의 항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영화는 오마르에게 "영국은 이집트를 프랑스는 튀니지를 스페인은 모로코를 지배하는데, 왜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지배할 수 없냐"고 말하는 그라치아니의 입을 빌려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략을 정면에서 조망합니다. 그리고 오마르의 투쟁을 통해 이탈리아가 미국으로, 리비아가 아프간과 이라크로 바뀐 이슬람 세계의 침략과 항전의 역사를 기억할 것을 요청합니다.

탁월한 게릴라 지도자 오마르 무크타르

 이탈리아군이 리비아에 설치한 강제수용소의 당시 촬영 장면. 13만여 명의 베드윈족이 수용되어 2/3이 죽었을 정도로 혹독했다.

이탈리아군이 리비아에 설치한 강제수용소의 당시 촬영 장면. 13만여 명의 베드윈족이 수용되어 2/3이 죽었을 정도로 혹독했다. ⓒ 팰콘 인터내셔널


오마르는 베드윈족의 족장이자 아이들에게 코란을 가르치던 전직교사였습니다. 그런 그를 부족민들은 '시디(선생님) 오마르'로 부릅니다. 무자비한 양민학살이 지속되는 가운데 오마르는 강제수용소로 끌고 가던 부대를 급습해 부족민들을 구출해 내지만 역부족. 베드원족의 강제수용은 착착 진행되어 결국 13만여 명이 사막 한 가운데의 철조망 게토에 갇힙니다. 

한편 그라치아니는 주화파인 디오디에체 대령에게 오마르와의 평화협상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협상은 허울 뿐, 실상은 이탈리아 본국에서 군 병력을 리비아로 대거 증파시키는 한편 오마르를 평화협상을 깬 장본인으로 고립시키기 위한 양동작전을 펼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마르가 산악전으로 거점을 옮긴 뒤에는 그의 불알친구 엘 가리아니 족장 등 부족 대표들 역시 오마르에게 항복을 하고 이집트로 망명할 것을 권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영화는 그라치아니와 이탈리아 왕자의 대화를 통해 파시스트들의 역사관도 적시합니다. 왕자는 그에게 "로마에선 작은 기사거리 밖에 안 되는 우리들의 행동이 이곳에선 역사가 된다는 것이 걱정스럽냐"고 묻습니다. 그는 "제국의 확장을 위해 로마에서 하루 동안 날 기억하는 게 리비아의 한 세대보다 낫다"고 응답합니다.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맞바꾸지 않겠다는 허무맹랑함만큼이나 가소롭지만, 역사는 자신들이 쓴다는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을 명확하게 대변해 주는 대목입니다. 

수용소에 갇힌 부족민들은 굶고 병들어 아사자가 속출하고, 젊은 여인들은 막사로 끌려가 노리개가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이들 가운데 2/3가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인들이 중심이 되어 식량을 모아 새벽녘에 철조망 건너 저항군에게 전달하는 등 항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마르 역시 산악에서 진지전을 구축합니다. 이탈리아 군의 군수품 기지를 습격해 획득한 무기로 파시스트와 맞서는 등 적이 강하고 우세하면 바싹 낮춘 뒤 기습으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는 전형적인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며 항전을 이어갑니다.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리비아의 허리를 가로지른 철조망으로 보급물이 차단된 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오마르가 이탈리아 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생포되고 있다.

리비아의 허리를 가로지른 철조망으로 보급물이 차단된 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진 오마르가 이탈리아 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생포되고 있다. ⓒ 팰콘 인터내셔널


그라치아니는 오마르와의 대회전을 앞두고 진두지휘하지만 능수능란한 오마르의 산악전에 참패합니다. 로마로 소환당한 그는 무솔리니에게 과거 로마인들이 스코틀랜드에 쌓은 거대한 '해드리언 벽'처럼, 지중해 연안에서 리비아의 동서를 횡단하는 수백 마일에 이르는 현대판 해드리언 철조망을 쳐 일망타진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고립무원의 오마르는 매복 작전에 걸려들어 마침내 생포됩니다. 그의 나이 73살이었습니다.

압송당한 오마르는 그라치아니와 대면합니다. 그라치아니는 패배할 걸 뻔히 알면서 20년 동안 맞선 이유를 묻습니다. 과거 리비아를 침략했던 카이사르로 거슬러 올라가며 침략과 항전의 역사를 놓고 두 사람이 벌이는 설전은 세계사 편람을 방불케 합니다. 그리고 그라치아니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장교까지 감복시킨 그 유명한 오마르 군사재판부터 교수형에 이르기까지 오마르의 일거수일투족이 사진과 함께 기록됩니다. 

1931년 9월 16일 오전 11시. 베드윈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이 집행됩니다. 마지막으로 코란을 읽은 오마르는 부모가 모두 전사해 손주처럼 아꼈던 알리에게 온화한 미소를 띠고, 목에 밧줄이 걸립니다. 교수대에 떨어진 오마르의 낡은 안경을 손에 쥔 알리가 베드윈 사람들과 함께 그의 시신을 뒤 따라 끝없는 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오마르가 그라치아니와 설전을 벌이며 남긴 말을 엔딩 크레딧과 함께 올립니다. 오마르의 죽음과 함께 대파시스트 항전은 끝나고 리비아는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승리 아니면 죽음이오.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가 투쟁할 것이오."     

리비아마저 제2의 이라크로 전락될 것인가

 공개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는 오마르. '적의 손에 죽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공개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는 오마르. '적의 손에 죽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 팰콘 인터내셔널


영화 <사막의 라이온>은 카다피의 지원으로 제작됐습니다. 카다피 스스로 혁명의 사표라고 했던 '사막의 사자' 오마르 무크타르에 대해 최대한의 예우를 표현한 셈입니다. 그리고 오마르는 현재 리비아의 10 디나르 지폐에 얼굴이 새겨져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파시스트와의 항전에서 할아버지는 전사하고, 아버지는 부상을 입고, 딸은 1986년 미국의 폭격으로 즉사하는 등 카다피의 가족사는 저항과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혁명 뒤 카다피는 주변 이슬람국 왕조가 서방세계와 손잡고 대대손손 석유를 독점해 치부를 일삼던 것에 비해 대수로공사 등 지속가능한 개발에 투자해 리비아를 녹색혁명으로 탈바꿈시켜 냅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절대빈곤율이 가장 낮고 국민소득도 1만 달러를 넘어섭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이슬람연합국가 창설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영화에서 오마르는 베드원족의 전통과 관습을 철저하게 지켜 나갑니다. 카다피 역시 베드윈의 아들답게 국내외를 막론하고 천막을 치고 먹고 자고 회담을 하는 등 유목민의 전통을 고수해 왔습니다. 오죽했으면 2009년 생애 처음 유엔총회에 참석차 뉴욕에 갔을 때, 센트럴 파크에 천막을 치려다 거부당하자 기어이 베드포드라는 곳에 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현재 인터넷에서는 카디피를 조롱하는 패러디 영상이 범람하고, 미국은 리비아 인근 해역에 항공모함을 배치해 무력개입 발진을 완료한 반면,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 각국 정상은 무력개입에 반대하며 "얼마나 많은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며 카다피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서방언론의 보도처럼 카다피가 오마르 무크타르의 가르침을 배신하고, 자신의 혁명이념을 전복시키며, 국민을 대량 학살했는지, 아니면 부족들 간의 권력투쟁인지 속속들이 알 수는 없습니다. 서방세계를 비롯해 한국사회에 짙게 드리운 이슬람에 대한 편견이 객관적 진실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성경과 기독교에 관해서는 훤하면서도 우리들에게 이슬람은 탈레반과 알카에다로 상징되는 자살폭탄 테러범으로 각인되어 있으니까요.

최근 리비아 내전의 뿌리가 미국과 이스라엘 등 서방의 패권에 맞선 카다피의 저항에 있다 할지라도 견제없는 권력은 위험해지고, 혁명의 초심은 흐려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아들들에 대한 단속은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더욱이 그의 스승인 시디 오마르는 동족은 물론 파시스트 포로들에게조차 총부리를 돌리지 않았다는 것은 카다피에게 부담스러운 대목입니다.

그렇다고 미국과 나토의 리비아 무력개입이 정당화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라크를 침공해 붕괴시킨 2003년에 카다피는 국제사찰단의 입국을 허용하고, 그 후 미국에 화해의 손을 내밀며 생존을 모색합니다. 폭풍 앞의 촛불이었으니까요. 작금의 리비아가 제2의 이라크로 전락돼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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