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1983년 후기리그는 삼미 슈퍼스타즈와 MBC 청룡의 피 말리는 각축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먼저 치고 나간 것은 삼미였다. 전기리그 종반까지 2.5경기차로 앞서가다가 광주원정에서 2위 해태에게 충격적인 3연패를 당하면서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놓쳤던 삼미는 이미 전반기에 무리할 만큼 무리했던 장명부와 임호균을 또다시 하루 간격으로 완투시켜가며 악에 받친 듯 가속페달만을 밟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 한에는 체력의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투혼'이 통했던 것은 그나마 7, 8월 두 달뿐이었던 것이다.

반면 MBC는 출발은 늦었지만 뒤늦게 가속도가 붙은 쪽이었다. 청룡은 시즌 개막과 동시에 4할 타자이기도 했던 감독 백인천이 이탈하는 봉변 속에 전기리그를 감독 없이 치르며 3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감독이었던 김동엽을 영입해 전열을 가다듬고, 다섯 명의 투수가 고르게 100이닝 이상씩을 분담하며 아낀 체력을 바탕으로 8월 31일 처음 단독선두로 나서게 된다. 

청룡 시절의 김재박 프로무대에서 김재박의 공격력은 실업시절의 명성에 못 미쳤다. 하지만 유격수로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수비능력, 그리고 스피드와 센스를 겸비한 현란한 주루플레이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힐 만 했다.

▲ 청룡 시절의 김재박 프로무대에서 김재박의 공격력은 실업시절의 명성에 못 미쳤다. 하지만 유격수로서 역대 최고로 꼽히는 수비능력, 그리고 스피드와 센스를 겸비한 현란한 주루플레이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힐 만 했다. ⓒ MBC 청룡 팬북


그 뒤로도 삼미와 MBC 두 팀이 마지막 한 장의 한국시리즈행 티켓을 잡기 위해 2경기차 이내의 팽팽한 평행선을 달려가던 9월 14일, 잠실이었다. 그 날 삼미는 인천에서 임호균이 12승째 완투승을 기록한 데 힘입어 롯데를 잡아 놓고 청룡의 경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실에서 삼성과 만난 청룡은 1회와 2회에 각각 2점과 1점을 내주며 3대 0으로 끌려가고 있었고,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오랜만에 승차는 1로 좁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날 1회 초에 뼈아픈 실책을 저지르며 선취점을 내주었던 청룡 김재박이 후반 들어 '발'로써 만회의 반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6회 말에는 2루타를 치고 나간 뒤 삼성의 수비실책을 틈타 홈으로 파고들며 3대 2로 쫓아가는 점수를 만들어내더니, 8회 말에도 다시 2사 후에 내야땅볼을 치고도 전력질주해 1루에서 세이프 되며 추격의 불씨를 살렸던 것이다.

다음 타자는 이해창. 바로 지난해 프로출범 당시 서울지역 선수들에 대한 지명권을 OB베어스와 2대 1로 나누어 가져야 했던 MBC 청룡이 박철순에 앞서 김재박과 더불어 1순위로 지명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서울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문에 프로진출을 1년 강제로 유보 당했던 그는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자 3번 지명타자로서 우승을 이끌어낸 뒤 한 해 늦게 팀에 합류해 있었다.

이해창이 때린 공은 펜스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좌익수 왼 쪽 약간 깊숙한 곳에 떨어지는 안타였고, 2사 후였던지라 스타트가 빨랐던 김재박이 3루까지 진루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 실업야구 무대에서 늘 김일권과 도루왕 타이틀을 다투며 '쌕쌕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던 타자 이해창 역시 2루까지는 무난히 들어갈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김재박은 동점을 만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듯 뒤돌아보지 않고 홈으로 내달렸고, 삼성의 좌익수 장효조는 차분하게 유격수 오대석에게 공을 건네고 있었다. 이미 장효조가 공을 잡은 것은 김재박이 3루 베이스를 통과하기 전이었고, 그 공을 넘겨받은 오대석이 포수를 향해 공을 던지는 순간에도 김재박은 3루와 홈의 중간 정도 밖에는 오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김재박이라지만 역부족으로 보였고, 기회는 그대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곧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김재박이 태그를 피하기는커녕 포수의 미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이빙하듯 몸을 날렸고, 오대석의 송구는 김재박의 헬멧을 맞고 포수 뒤쪽으로 한참이나 흘러 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포수 이만수가 뒤로 빠진 공을 주우러 달려가며 비워진 홈을 김재박이 손으로 되짚었고, 뒤이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3루까지 달려가고 있던 이해창 역시 방향을 돌려 홈으로 돌진해 4점째를 만들고야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대역전극이었다.

물론 기록은 오대석의 실책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빗나간 송구가 아니었다. 3루 쪽으로 치우친 채 중계플레이에 나섰던 오대석의 위치에서 주자의 몸을 피해 송구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공은 포수 이만수가 요구하던 그 위치로 정확히 날아가고 있었다.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포구에서 송구로 이어간 동작으로나, 송구의 정확성으로나, 오대석이 그 이상 잘 해야 하는 것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어차피 발로는 늦었다는 것을 알아챈 주자 김재박이 마침 활짝 열린 채 공을 기다리던 포수의 미트가 공의 표적임을 알아채고 자신의 몸을 그 앞으로 날리며 실책을 '만들어낼' 만큼의 센스와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점이었다. 

김재박의 개구리번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최종전에서 만나 우승을 다투었고, 2대 0으로 끌려가던 8회에 거짓말처럼 5점을 뽑아내며 역전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의 배터리가 고의로 뺀 공을 향해 솟구쳐 성공시킨 김재박의 기습번트는 동점타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운을 결정적으로 끌어온 의미있는 한 방이었다.

▲ 김재박의 개구리번트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일본과 최종전에서 만나 우승을 다투었고, 2대 0으로 끌려가던 8회에 거짓말처럼 5점을 뽑아내며 역전우승에 성공했다. 일본의 배터리가 고의로 뺀 공을 향해 솟구쳐 성공시킨 김재박의 기습번트는 동점타였을 뿐만 아니라, 승리의 기운을 결정적으로 끌어온 의미있는 한 방이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그 날 승리를 통해 청룡은 후기리그 순위싸움의 최대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리고 9월 20일과 21일에는 광주 2연전에서 또다시 해태를 만나 연패한 삼미를 따돌리게 되고, 25일에는 삼미를 3위로 밀어내고 올라온 해태마저 12대 0으로 대파하며 사실상 후기리그 우승을 결정짓게 된다(후기리그 우승이 확정된 것은 다시 삼미가 해태를 잡은 9월 26일이었다).

발로 만든 3점, 후기리그의 판도를 바꾸다

출범 2년째였던 1983년의 프로야구는 첫해에 비해 여러 면에서 급격한 수준향상을 이루었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문에 첫 해 발이 묶여있던 국가대표들이 대거 합류한 데 이어 재일교포 선수 네 명이 들어와 더 많은 홈런을 때려내고 더 많은 삼진을 잡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수비조직의 짜임새였다.

1982년에 6개 팀이 80경기씩을 치르면서 기록한 도루는 무려 699개였다. 특히 그 중 절반 가까운 323개가 해태와 삼미를 상대로 기록됐는데 두 팀은 프로수준이라고 할 만한 포수를 가지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김용만, 박전섭, 홍순만 등이 마스크를 나누어 쓴 해태는 159개의 도루를 허용하는 동안 56개를 잡아냈을 뿐이고, 금광옥과 최영환, 김진철 등이 맡았던 삼미는 164개를 허용하면서 41개를 잡아냈을 뿐이었다(특히 삼미의 김진철은 37개를 허용하는 동안 3개밖에 잡아내지 못하면서 .075의 처절한 도루저지율을 남기게 된다).

물론 강견의 포수 이만수가 지켰던 삼성처럼 도루저지율이 5할에 육박하는 팀도 있었다(59개 허용, 52개 저지). 하지만 최소한 해태와 삼미를 상대하는 팀의 선수들은 1루에 출루하기만 하면 다들 한 번쯤 도루를 노려보곤 했는데,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주자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팀들의 경기모습은 산만하기 짝이 없었다(<천하무적야구단>의 경기모습을 상상하면 비슷할 것이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두 시즌 동안 단 두 개의 도루를 추가했을 뿐이던 마흔 살의 감독 겸 선수 백인천이 일본프로야구 통산 209홈런-212도루를 달성했던 관록만으로 11개의 도루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그런 허술함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이듬해 수준급 포수들이 대거 한국프로무대를 밟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첫해에 앞뒷문을 다 열어둔 채 시즌을 치렀던 두 팀 해태와 삼미가 국내 최고 수준의 포수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해태의 재일교포 김무종과 삼미의 국가대표 출신 김진우가 그 주인공인데, 특히 김진우의 경우 거의 혼자서 한 시즌을 책임지면서 60개를 허용하고 60개를 저지해 무려 5할이라는 도루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물론 김진우의 경우 거의 일 년 내내 장명부와 임호균이라는 두 명의 특급 투수하고만 손발을 맞추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뛰어난 주자 견제의 혜택까지 입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팀당 경기수가 100으로 늘어났던 1983년에 기록된 도루는 499개에 불과했다. 경기수가 20%이상 늘어난 데 반해 도루는 30% 가까이 하락한 역설적인 결과였다. 삼성처럼 도루가 절반 이상 줄어든 팀도 있었고, 전체적으로 40%가량 감소한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1982년과 별다르지 않은 도루수를 유지한 팀이 있었으니, 바로 MBC 청룡이었다. 

장명부와 김무종 1983년에 처음 한국무대를 밟은 재일교포 선수들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멤버들과 함께 한국야구의 급성장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장명부(오른쪽)는 전무후무한 시즌 30승의 위업을 세우며 투수와 타자의 승부에 관한 많은 깨우침을 전해주었고, 김무종(왼쪽)은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끈 포수로서 타자의 분석과 공 배합을 포함한 투수리드에 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 전도사로 꼽힌다.

▲ 장명부와 김무종 1983년에 처음 한국무대를 밟은 재일교포 선수들은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멤버들과 함께 한국야구의 급성장을 이끈 주역들이었다. 장명부(오른쪽)는 전무후무한 시즌 30승의 위업을 세우며 투수와 타자의 승부에 관한 많은 깨우침을 전해주었고, 김무종(왼쪽)은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끈 포수로서 타자의 분석과 공 배합을 포함한 투수리드에 관한 새로운 경지를 열어준 전도사로 꼽힌다. ⓒ 한국야구위원회



발야구의 탄생, MBC 청룡

그해 청룡은 1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타자가 단 한 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한 선수조차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루 10걸 안에 무려 다섯 명의 선수들(김재박, 이해창, 이광은, 이종도, 김인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청룡이 기댈 수 있는 득점루트는 그들의 발 뿐이었다.

특히 발야구를 이끌었던 김재박과 이해창의 위력은 단지 도루의 개수만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둘은 숱한 단타를 2루타로, 또 2루타를 3루타로 바꾸어냈고, 조금 깊숙한 내야수 플라이만으로도 3루에서 홈으로 파고드는 명장면을 연출하곤 하는 송곳 같은 선수들이었다. 9월 14일 경기에서의 대역전극도 그 해 팀의 1,2번으로 나란히 출격해 상대 팀의 넋을 빼놓았던 숱한 명장면들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나아졌다고는 해도 아직은 조직력이 엉성했던 그 시절 대포보다 더 효과적인 무기는 송곳이었다. 타구를 쫓아가기에도 급급했던 수비수들에게 주자들의 발놀림까지 묶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였고, 생각지도 않은 타이밍에 도루나 리터치를 허용한 수비수들은 제풀에 무너지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차원 높은 기동력을 활용해 상대팀 수비진의 빈틈을 집요하게 후벼 파는 움직임으로 청룡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전후기 통합승률 1위로 기록될 수 있었다.

물론 그해의 청룡은 끝이 좋지 않았다. 단지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1무 4패로 철저히 무너지며 준우승에 머물렀기 때문만은 아니다. 1차전과 2차전에 김동엽 감독은 끊임없이 교체신호를 보내는 선발투수 오영일과 유종겸을 7점과 8점을 내주도록 방치한 채 완투시키는 심술을 부렸다. 선수들도 태업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승리에 대한 집념을 포기해버리는 한국시리즈 사상 최악의 졸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뒷날 밝혀진 것은 후기리그 막바지에 선수들을 독려하기 위해 내걸었던 우승보너스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시작된 갈등 탓에 이미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도 전에 MBC의 선수와 감독과 구단이 산산이 쪼개져 버렸더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역시 도루 10걸 안에 네 명의 이름을 올린 또 하나의 송곳 해태 타이거즈와의 수준 높은 유격전을 감상할 기회를 빼앗긴 것은, 삼십 여 년이 흐른 지금에 생각해도 새삼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해의 준우승을 끝으로 청룡은 다시는 포스트시즌에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팀이 돼 버리고 만다. 한국시리즈에서 노출되었던 불화 탓에 김동엽 감독이 다시 반 년 만에 옷을 벗었고, 선수들 내부에서도 팀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빚으며 가지고 있던 역량을 흐트러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결국 청룡은 한국야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던 팀이었지만, 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한 자기혁신을 이룰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전히 빠른 팀이긴 했지만, 가장 빠르지도 못하면서 파괴력도 가지지 못한 애매한 팀컬러로 하위권을 전전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장명부의 30승, 해태의 첫 우승...그리고 MBC 청룡

만년 꼴찌 팀 삼미 슈퍼스타즈와 비교해보더라도, 요즘 MBC 청룡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차라리 인상적인 꼴찌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LG가 청룡을 인수해 트윈스로 새출발하던 첫해 우승을 이루어내며 청룡 팬들의 아쉬움마저 흡수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를 더 꼽는다면, 청룡이 정말 청룡다운 모습을 보였던 유일한 해였던 1983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며 기억 속에서마저 '철인 장명부'와 '해태왕조의 개막'에 밀려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창의 홈 쇄도 이해창은 스피드와 센스 외에도 저돌성을 갖춘 선수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이대형의 발과 정근우의 저돌적인 창의성을 겸비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의욕이 지나쳐 경기의 흐름을 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진은 1983년 한국시리즈 4차전 11회말, 내야 땅볼 타구 때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쇄도하다 횡사해 1승을 올릴 마지막 기회를 날리던 장면이다. 곁에서 웃고 있는 것은 블로킹에 성공한 해태의 포수 김무종.

▲ 이해창의 홈 쇄도 이해창은 스피드와 센스 외에도 저돌성을 갖춘 선수였다. 오늘날로 치자면 이대형의 발과 정근우의 저돌적인 창의성을 겸비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의욕이 지나쳐 경기의 흐름을 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진은 1983년 한국시리즈 4차전 11회말, 내야 땅볼 타구 때 2루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쇄도하다 횡사해 1승을 올릴 마지막 기회를 날리던 장면이다. 곁에서 웃고 있는 것은 블로킹에 성공한 해태의 포수 김무종. ⓒ 한국야구위원회



하지만 오늘날 '강함보다는 세밀함', 그래서 '한 베이스 더 가고 30센티미터를 더 빠르게 선점하는 야구'를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한 한국야구의 한 뿌리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한 번 쯤 되새겨볼 만하다. 일등만 기억하는 세상도 더럽지만, 꼴찌쯤 해야 그나마 신경 써주며 평범한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세상도 야속하기 때문이다.

1983년은 장명부가 427.1이닝을 던져 30승을 거둔 해였고, 해태 타이거즈가 첫 우승에 성공하며 왕조시대의 첫걸음을 시작한 해다. 하지만 또 하나 그 해의 프로야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 해에 MBC 청룡이 '야구에서 점수를 내는 것은 빠른 공과 강한 방망이가 아니라 지능적이고 역동적인 인간의 발'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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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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