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기자주>

"제일 애를 먹인 건 삼미 슈퍼스타즈였어. 아니, 그 녀석들은 왜 그렇게 홈런을 잘 때리는지···. 삼미 때문에 연승기록이 몇 번이나 끊어질 뻔했어. 백인천, 김봉연 잘 치는 거야 원래 알았지만, 삼미는 누군지도 모르는 타자들이었는데 … 정말 무시무시한 팀이었어."

'불사조' 박철순에게, 프로 원년에 22연승으로 내달리던 중 만났던 최강의 난적이 누구였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었다. 15승 65패, 승률 1할 8푼 8리의 전설적인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 더구나 바로 그 해 박철순이 이끌던 우승팀 OB 베어스에게 16전 16패를 당하면서 특정 팀 상대 시즌 전패라는 역사까지 남겼던 그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40경기가 치러진 그 해 전기리그에만 혼자서 18승을 올리는(전후기 통합 24승) 압도적인 위력으로 리그를 지배했던 원조 슈퍼에이스 박철순이 자신이 혼자 쌓은 승수보다도 9승이나 적었던 시즌 15승의 팀을 난적으로 꼽는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을 사람이 있을까?

'불사조' 박철순의 천적, 삼미 슈퍼스타즈

창단식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 이전부터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꼴찌 후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예정되어있던 길을 고분고분 걷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 창단식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 이전부터 전문가들이 만장일치로 꼽는 꼴찌 후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예정되어있던 길을 고분고분 걷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삼미 슈퍼스타즈는 창단되기 전부터 꼴찌 후보로 낙인찍혔던 팀이다. 국가대표 출신이 단 한 명도 포함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업팀에서 주전급으로 뛰던 선수마저도 얼마 되지 않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미는 결국 그 예상대로, 아니 예상에도 훨씬 못 미치는 처참한 몰골의 꼴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애초에 승부는 제쳐 둔 채 인격수양이나 하자고, '칠 수 없는 공은 치지 않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으며' 유유자적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에게도 '세상의 예상'을 뛰어넘을 기회는 있었고, 뛰어 넘기 위해 피땀을 흘리며 도전했던 순간이 있었으며, 결국 그것이 좌절되자 흘렸던 눈물들이 있었다.

1982년 3월 28일 대구. 그날 그곳에서 삼미 슈퍼스타즈가 세상 앞에 첫 선을 보였다. 개막 이전 삼미가 만장일치의 꼴찌후보였다면, 그날 상대했던 삼성은 만장일치의 우승후보였다. 야구인들 눈에도 생소한 이름들 뿐이던 삼미의 라인업과 달리, 삼성은 주전과 후보 명단 모두를 국가대표와 대학선발대표 출신으로만 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그날의 승자는 삼미였다. 그날 삼미의 선발투수 인호봉은 3점만을 내주며 삼성 타선을 막아냈고, 양승관을 비롯한 타자들은 삼성의 황규봉과 권영호를 두들겨 5점을 뽑아냈던 것이다. 전날 서울에서 청룡의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으며 개막전을 망친 데 이어 꼴찌후보에게까지 지면서 2연패하는 봉변을 당한 삼성의 서영무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성난 대구의 팬들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팀 창단경기에서 역사적인 첫 승을 이루어낸 삼미의 박현식 감독이 감격을 담아 기자들에게 일갈했다.

"앞으로 우리 팀을 '슈퍼스타 없는 슈퍼스타즈'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우리는 모두가 슈퍼스타들이다. 대표선수 출신은 없지만 모두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열심히 하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프로스포츠라는 것을 보여주겠다." (경향신문. 1982년 3월 29일자)

어쨌든 삼미는 한국프로야구사에 그렇게 씩씩하게 첫 발을 내디뎠고, 걷기 시작했다. 이튿날에는 팀의 2선발인 김재현이 역시 완투했지만 악에 받친 삼성 투수들의 혼신의 투구에 눌리며 1대 5로 졌고, 일주일 뒤 춘천에서의 홈 개막전에서는 초반 연승행진 중이던 롯데의 노상수에게 완봉패를 당하며 2연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튿날인 4월 5일에는 롯데에게 7대 4로 끌려가던 9회 말에 연속 4안타를 집중해 동점으로 만든 다음 연장 11회 말에 장정기의 끝내기 안타로 뒤집으며 2승째를 올리게 된다. 시즌 2승 2패. 특히 극적인 끝내기역전승이었고, 3연승행진을 벌이던 선두 롯데를 잡은 큰 승리였다. 언론은 삼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삼미 슈퍼스타즈 마스코트 프로원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동물이 아닌 마스코트를 가진 팀이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마스코트 프로원년 삼미 슈퍼스타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동물이 아닌 마스코트를 가진 팀이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1번 타자로 나서던 조흥운이 4할을 넘나드는 출루율에 도루 선두를 달리던 기동력으로 공격의 활로를 뚫었고 장정기, 김무관 등으로 이어지는 후속타자들 역시 수시로 연속안타를 쏟아내며 상대팀의 정신을 뽑아놓았다. 양승관과 금광옥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장타를 터뜨려 쐐기를 박았다. 삼미는 비록 투수력은 처지지만 공격력 하나만큼은 중위권 이상인 복병으로 통했다.

물론 삼미를 허깨비 취급하는 팀은 없었고, 삼미의 승률이 1할 대로까지 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도 없었다. 최소한 경기 중반까지는 접전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더라도 경기 막판까지 집중력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투수로테이션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긴 했지만, 박현식 감독은 이기든 지든 그나마 믿고 가야 할 두 명의 주력투수 인호봉과 김재현에게 2,3일씩이라도 등판간격을 지켜주었고, 불가피하게 연투를 할 때는 한두 이닝 정도에서 잘라주는 원칙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그해 최고의 팀과 최악의 팀이 갈라서게 되는 분수령이 되었던 4월 24일과 25일, OB와의 춘천 2연전이 시작되기 전 7승 5패의 3위 팀 OB와 3승 8패의 6위 팀 삼미 사이의 격차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1982년 4월 25일, 최고의 팀과 최악의 팀이 갈라서다

4월 24일, 삼미는 먼저 4점을 뽑고도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며 4대 6으로 역전패했다. 그날 OB 타선이 뚝심의 역전극으로 구해낸 투수가 바로 박철순이었고, 그에게 그날의 승리는 시즌 5승째(4연승 째)였다. 그리고 이튿날인 4월 25일, OB 베어스의 선발투수는 선우대영이었다. 그는 박철순에 이어 OB 마운드의 2인자로 통하는 투수였지만, 전날 아깝게 역전패한 아쉬움 때문에 독기가 오른 삼미의 타자들이 초반부터 퍼부어대는 맹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삼미는 1회 3연속안타로 2점을 선취했고, 2회에는 조흥운의 2점 홈런을 포함해 한 이닝 최다안타 기록인 7안타로 OB 선우대영과 두 번째 투수 박상열을 난타하며 6점을 추가했다. 그래서 3회 초를 시작할 때 이미 점수는 8대 0. 승부는 이미 끝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3회 초, 삼미의 선발 감사용이 OB의 1,2,3번 타자에게 연속안타를 맞으면서 분위기는 급변했다. 야구경기에서 큰 점수 차는 뒤집힐 위험이 크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만약 뒤집힌다면 역전패한 팀 전체가 정신적으로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점수 차가 작건 크건 야구의 모든 순간은 날카로운 칼끝 승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사용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를 통해 뒤늦게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에서 패전처리투수로 그려졌지만, 만약 그를 실제로 패전처리투수로 썼다면 삼미의 성적은 조금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 해 삼미의 문제는 패전처리투수를 활용함으로써 주력투수의 어깨를 아껴준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데 있었다.

▲ 감사용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를 통해 뒤늦게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영화에서 패전처리투수로 그려졌지만, 만약 그를 실제로 패전처리투수로 썼다면 삼미의 성적은 조금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 그 해 삼미의 문제는 패전처리투수를 활용함으로써 주력투수의 어깨를 아껴준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데 있었다. ⓒ 삼미 슈퍼스타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었던 백전노장 박현식 감독은 조기진화를 위해 인호봉과 김재현을 차례로 투입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의 투수들은 아니었다. 저력의 팀 OB는 3회에 5안타와 실책 하나를 묶어 4점을 내더니 4회에는 2사 후에 4연속 안타를 집중시키며 다시 석 점을 뽑아 턱밑까지 추격했다. 5회에는 다시 석 점을 만들며 끝내 10대 8로 역전시킨다.

이제 기록적인 최다점수차 역전패의 목전으로 몰린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은 몸이 굳고 시야가 좁아지는 걸 느끼며 진땀을 닦아야 했고, 감사용에 이어 인호봉, 김재현까지 소진한 삼미의 마운드에 남은 것도 박경호라는 무명 중의 무명투수 뿐이었다. 물론 그 반대편에서는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큰 점수차의 열세를 순식간에 뒤집어놓고는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으로 경기를 즐기는 OB 베어스의 살인타선이 되살아나 있었다.

기세가 오른 OB는 6회와 7회에도 다시 한 점 씩을 보탰고 점수차는 12대 8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까지는 삼미도 그대로 포기하고 주저앉는 팀이 아니었다. 삼미는 그날 1번 타자로 출장해 5타수 5안타를 때린 장정기의 활약에 힘입어 8회에 한 점을 만회한 뒤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도 끈질긴 연속안타 행진을 벌여나갔다. 그러자 OB도 8회에 올렸던 황태환을 내리고 결국 전날 등판했던 에이스 박철순까지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천하의 박철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삼미의 도전은 거칠었다. 삼미는 끝내 두 점을 더 불러들이며 12대 11까지 쫓아갔고, 결국 상황은 '한 점 차, 9회 말 투아웃 만루'라는 절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미 전날 패전위기에 몰렸다가 역전승을 거두며 되살아났던 박철순은, 다시 짧은 안타 한 개 만으로도 패전투수가 될 수 있는 위기에 몰려 있었다.

하지만 삼미의 뚝심은 거기까지였고, OB의 위기도 거기 까지였다. 삼미의 2번 타자 조흥운이 때린 공이 3루수 양세종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정확히 송구된 공이 조흥운의 빠른 발보다 앞서 1루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 순간 3루수 양세종과 투수 박철순, 그리고 뒤늦게 달려든 아홉 명의 수비수가 마운드 위에서 한데 뒤엉켰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 같은 환희의 세리머니가 이어졌다. 

4시간 24분 동안 양 팀이 각각 21개와 17개의 안타를 폭발시켰고, 또 각각 네 명과 다섯 명의 투수가 불려나와 줄줄이 뭇매를 맞은 접전이었다. 그 접전의 승자 OB는 9승 5패를 기록하며 2위로 올라섰고, 패자 삼미는 3승 10패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삼미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그 경기 중이 아니라, 그 경기가 끝난 다음 부터였다. 직접 경기를 지켜보던 삼미의 김현철 회장이 박현식 감독에게서 지휘봉을 뺏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천 팀이 감독도 없이 출범하는 꼴을 보시겠느냐'고 매달리며 이미 10여 년 전 현장을 떠나 은행 지점장으로 평온한 삶을 살아가던 인천야구의 옛 영웅 박현식을 끌어들일 때 김현철 회장이 했던 말은 '꼴찌를 해도 좋다. 대신 몇 년 잘 키워서 강팀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3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던 삼미 김현철 회장에게 그날의 대역전패는 '꼴찌' 이상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극약처방, 독이 되다

계약기간 중, 특히 시즌 중에 감독을 교체하는 것은 그야말로 극약처방에 해당한다. 그것은 선수단 전체를 향해 '당장 무언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 놓으라'는 윽박지름이고, 결국 당장 뭔가를 내놓기 위해 쓰지 말아야 할 힘까지 쓰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해의 삼미는 그런 극약처방을 견뎌낼 만 한 체력을 가지지 못한 팀이었다.

박현식 감독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물려받은 것은 투수코치 이선덕이었다. 그 역시 고교와 실업을 거치면서 선수와 지도자로서 능력을 검증받은 노련한 이였다. 하지만 이미 그 상황 속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소신 따위와는 무관하게 영양실조의 환자에게 극약을 주사해야 하는 가련한 돌팔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선덕 감독대행은 당장 1승을 만들어내기 위해 '내일은 없다는 듯' 매일 던질 수 있는 모든 투수를 투입해대기 시작했고, 타자들에게는 어차피 한두 점 앞선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듯 일체의 작전 없이 풀스윙을 요구했다. 그것은 무의미한 집착이기도 했고, 동시에 무기력한 자포자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마음만 급했던 마구잡이 전법으로 전기리그의 남은 26경기에서 건질 수 있었던 것은 5승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작 가뜩이나 기초체력이 부실했던 팀이 별 실속도 없이 1승에 매달리느라 무리했던 후유증은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심타자 양승관과 금광옥이 부상으로 이탈한 데 이어 조흥운, 김경남, 김호인이 나란히 부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전기리그가 끝난 시점까지 타격 8위에 올라 있던 김경남(.338)과 9위에 올라있던 조흥운(.325)은 후기리그가 시작되자마자 슬금슬금 미끄럼을 타더니 2할대 중반(각각 .269와 .284)에서 시즌 성적을 마감했다. 홈런 5개로 공동 9위에 올라있던 양승관도 후기에는 3개를 추가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투수들의 성적이 곤두박질 친 것도 물론이었다. 시즌 초반만 해도 사흘에 한 경기 정도씩 나누어 맡던 두 기둥투수 인호봉, 김재현은 물론이고 이래저래 마당쇠 역할을 해야 했던 감사용, 김동철까지 거의 매일 같은 경기에 한꺼번에 투입되다시피 하며 동시에 방전상태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정상적인 투수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네 투수가 그저 얻어맞는 걸 직업으로 생각하는 듯 시간 되면 마운드에 오르고 내려가는 나날이 이어졌다.

심지어 7월 28일에 선수등록을 마치고 8월 4일부터 경기에 투입된 '새로운 피' 오문현은 그로부터 팀이 치른 27경기 중 무려 22경기에 투입돼 120이닝을 책임지는 무시무시한 혹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이 잡을 수 있었던 공에도 몸을 날리지 못하고, 칠 수 있었던 공에도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며 자멸해갔던 것이 바로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나지 않는게 야구라면, 그 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너무 일찍 스스로의 운명을 끝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후기리그 개막과 함께 세 번의 10연패 행진이 반복되자 이미 삼미 슈퍼스타즈는 언론이 조롱하기도 미안하다는 듯 외면하는, 소리 없이 패전과 실점과 피안타와 실책에 관한 기록을 쌓아가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천야구장(도원)이 긴 보수공사 끝에 개장한 7월 17일부터는 한 달 간 인천에서만 무려 11연전을 치르는 특혜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그 기간 동안 삼미는 1승 10패를 기록하며 전반기 내내 기다려왔던 인천 팬들의 등을 떠밀기도 했다. 결국 그렇게 전기리그에 10승, 후기리그에 5승. 그래서 아마 앞으로도 한국 프로야구에 큰 탈이 나지 않는 한 영원히 깨지지 말아야 할 불멸의 1할 8푼 8리라는 전설적인 승률이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최종성적이 되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 야구의 프로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정책으로 확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3개월이었다. 하지만 일단 '방침'이 확정된 뒤 여섯 개의 기업들이 각자 야구단을 창단하고 KBO 창립총회를 치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섯 개의 프로야구팀이 역사적인 개막경기를 가진 것은, 다시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 야구의 프로화에 관한 아이디어가 대통령의 결재를 거쳐 정책으로 확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3개월이었다. 하지만 일단 '방침'이 확정된 뒤 여섯 개의 기업들이 각자 야구단을 창단하고 KBO 창립총회를 치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1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여섯 개의 프로야구팀이 역사적인 개막경기를 가진 것은, 다시 그로부터 3개월 뒤였다. ⓒ 한국야구위원회



정리 해고된 열 한 명의 슈퍼스타들

그해, 22연승을 하며 단일시즌 세계최다경기 연승기록을 세운 박철순이 여러 차례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발목을 잡힐 뻔 했던 것은 사실이다. 5월 26일에도 8회에 구원등판해 2실점하며 패전위기에 빠졌다가 연장 10회 말에 터진 양세종의 끝내기안타로 10연승 관문을 통과했다. 6월 2일에도 6회에 등판했다가 동점을 허용하며 연장 14회까지 끌려간 끝에 이홍범의 끝내기 희생플라이 덕에 12연승 째를 기록하기도 했다. 15연승 째였던 6월 16일 경기 역시 김우열의 3점 홈런에 힘입은 역전승이었다. 하지만 늘 마지막 승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슈퍼스타즈에게 남은 것은 16전 16패의 참담한 성적표뿐이었다.  

이듬해, 삼미 슈퍼스타즈는 국가대표 배터리 임호균과 김진우, 그리고 삼미를 16전 16승으로 짓밟았던 OB가 양보한 서울 출신의 이선웅과 대전 출신의 정구선을 영입하며 한 명도 없던 국가대표 출신을 4명이나 보유하게 된다. 게다가 일본프로야구 통산 91승의 거물 장명부와 일본프로야구 10년 경력의 유격수 이영구를 영입하며 이름 그대로 '슈퍼스타들의 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하지만 지우고 싶었던 전년도의 참극은 고스란히 못난 선수들의 탓으로 전가되었고, 열심히만 하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며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뛰고 굴렀던 11명의 선수들에게 한꺼번에 정리해고통보가 전해졌다. 그 열 한 명 중에는 1982년 봄 대학을 중퇴하고 프로에 뛰어들어 15번의 선발등판을 비롯해 32번이나 출전해 93이닝을 던졌던, 하지만 그 해 겨울 방출 통보를 받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투수 김동철도 있었다.

패배자의 삶은 그런 점에서 고달프다. 이기고 졌다는 것이 그대로 노력과 열정의 있고 없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기억되다보니, 패배자란 그저 진 사람이 아니라 게으르고 열정도 없는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꼴찌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미 슈퍼스타즈가 정말 땀도 열정도 없었던 쓰레기였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는 증언을 남겨야 한다.

정부의 '방침'이 떨어지고부터 단 1개월 만에 6개 구단을 창단하고 다시 석 달 만에 개막전을 치러야 했던 세월 속에서 그들을 프로무대에 올려놓은 '졸속한' 과정은 시대적인 희극이었다고 하는게 맞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도전에 나서 있는 모든 것을 던져 한 순간 타오른 뒤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던 슈퍼스타즈 선수들의 무모한 열정에야 박수를 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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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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