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에 전해진 영화는 신기하고도 매력적인 볼거리이자 자본과 결탁한 근대적인 매체였다. 신문화를 경험한 이들에게는 근대화의 살아 움직이는 교재였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했던 일본인들에게 선전의 수단이었다. 공교롭게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시기에 영화산업이 시작되었기에 조선영화인들은 일제에 협력하고 한편으로는 저항하면서 식민지 조선영화의 토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서 영화계를 이끌었다. 이들 식민지 조선영화인을 살피고 되새기는 것은 지난했던 현대사를 이 땅의 영화인들이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를 가늠해 보는 영화사 이면의 기록이다. <기자 주>

1913년 고전하던 고등연예관이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 고이치에게 매수되어 제2대정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극장성격도 일본인 극장으로 바뀌었다. 닛다는 6만~7만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을 상대로 3개관이 경쟁하기 보다는 경성의 20만 조선인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났다고 판단하고 1914년 제2대정관을 일본인 극장에서 조선인 극장으로 바꾸었다.

 영화배급사인 닛다연예부를 중심으로 1910년대 조선의 영화산업을 장악한 닛다 고이치의 가족사진

영화배급사인 닛다연예부를 중심으로 1910년대 조선의 영화산업을 장악한 닛다 고이치의 가족사진 ⓒ 한상언

닛다연예부를 세워 영화배급업을 함께 하고 있던 닛다는 극장흥행에 있어 변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극장으로 전환 후, 조선인 변사 중 가장 인기 있던 서상호를 우미관에서 제2대정관으로 데려 온다. 졸지에 서상호를 잃게 된 우미관에서는 다시 서상호를 불러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한다. 우미관과 제2대정관 사이에서 서상호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의 몸값은 점점 더 올라갔다.

모든 조선관객들이 서상호에 주목했다. 서상호는 일부 관객들에게 "건방지다"라는 비난을 자주 받았지만 여전히 구변은 좋았고, 다른 변사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뿡뿡이 춤'이라는 그만의 볼거리도 있었다.

활동사진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수록 서상호의 인기도 같이 올라갔다. 1916년 우미관에서 연속영화(시리얼) <명금(名金)>(The Broken Coin)을 설명할 당시가 서상호 인기의 정점이었다.

연속영화라는 것은 지금의 TV드라마의 원조로 2권(릴)(약20분 분량)이 하나의 에피소드로 보통 15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리즈물을 말한다. 주로 모험영화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마지막은 꼭 아슬아슬하게 끝나 관객들이 일주일마다 바뀌는 에피소드를 보러 극장을 찾게 만드는, 이 당시 활동사진 흥행에 가장 중요한 영화였다. 이 연속영화 중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 <명금>이었고 이것을 서상호가 설명한 것이다.

유니버셜에서 제작하고 존 포드의 형인 프란시스 포드가 연출한 <명금>은 대단한 인기였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나 하면 서상호의 설명을 당시 관객들이 유행어처럼 외고 다닐 정도였다. 활동사진의 인기도 인기였지만 서상호의 설명이 더 큰 인기였던 것이다.

 <명금(The Broken Coin)>(1915)의 엽서

<명금(The Broken Coin)>(1915)의 엽서 ⓒ 한상언


그러자 일본인 극장인 황금관이나 유락관에서는 조선인 관객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때 서상호를 특별 초대하여 설명을 맡겼다. 또한 일본인 극장에서의 연쇄극이나 변사극에 조선인 변사로는 유일하게 서상호를 초빙하여 출연시키기도 했다.

1917년 황금관 소유주인 다무라 요시지로가 단성사를 인수하여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건축한다. 운영은 광무대를 이끌던 박승필에게 맡겼다. 박승필은 우미관에 있던 서상호를 끌어오려고 계획을 세운다. 박승필의 계획을 눈치챈 우미관에서는 서상호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직원들을 동원하여 그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상호를 포함해 우미관의 영사기사, 악사, 변사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들은 여느 날처럼 흥행을 마치고 우미관 직원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지방으로 도망 간 것이다. 단성사 개관 직전이 되어서야 서울로 돌아온 이들은 우미관이 아닌 단성사로 출근했다. 이를 주도한 서상호는 변사주임으로 단성사의 전무취체역이 되었다.

서상호를 위시하여 조선인 유명 변사, 악사, 영사기사를 모두 확보한 단성사는 조선인극장으로 독보적 지위를 얻게 된다. 단성사에서는 서상호의 설명으로 <명금>을 재상영했고, 이어 <암굴왕>을 상영했다.

"오, 하느님이시어! 원수의 하나를 이제야 갚았습니다. 20여년의 장구한 세월에 걸쳐, 무변 대해인 차디찬 감옥에서 꽃같은 청춘을 속절없이 다 늙히고, 복수에 불타는 일념은 골수에 사무쳐 저는 언제나 이날만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 하느님이시어!"

서상호의 <암굴왕> 설명에 관객은 열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단성사에서의 활약은 막을 내렸다. 아편중독으로 설명을 빼먹는 일이 허다했고 내용도 부실했기 때문이다. 변사주임은 김덕경으로 바뀌었다. 1925년부터는 서상호를 대신해서 단성사의 영사기사로 있던 동생 서상필이 영화 설명에 나섰다.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건축된 단성사의 개관 광고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재건축된 단성사의 개관 광고 ⓒ 한상언


아편중독자 서상호는 더 이상 활동사진 설명을 할 수 없었다. 모르핀 주사를 맞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그는 극장을 돌아다니며 돈을 빌렸다. 이것도 여의치 않자 가재도구를 팔아 아편을 샀다. 더 이상 팔 것이 없자 절도를 했다.

1925년 서상호는 절도혐의로 체포되었다. 유치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순사들에게 욕을 먹기도 했지만 본래 경찰 출신었기에 유치장에 있으며 아편을 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출소 후에는 다시 아편에 손을 댔다. 같은 해 아내 한세숙과 이혼하여 육년간의 결혼생활도 끝났다.

1926년에는 남의 집에서 외투를 훔쳐 달아났다가 양평에서 체포되었다. 근신을 위해 다시 변사 생활을 하려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주변에서도 그에게 더 이상의 도움을 주지 않았다. 종로통을 돌아다니며 아는 얼굴을 찾아 구걸을 했다.

"나으리, 옛날의 서상호올시다. 좀 적선합쇼. 10전만 줍시요. 나리님 옛날 서상호를 이렇게 괄시하십니까?"

파고다공원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명금>, <암굴왕> 같은 과거 변사로 전성기를 보낼 당시의 활동사진 설명을 들려주고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을 받았다.

서상호는 과거 자신이 전성기를 보낸 우미관을 돌아다니며 관객들에게 손을 벌렸다. 아편중독자가 객석을 다니며 구걸하던 우미관은 당시 관객들에게는 3류극장이었다. 1912년 개관하여 한때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상대로 한 유일한 활동사진관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1918년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바뀌고, 1921년 조선극장이 신축되자 2류극장으로 전락했다. 1930년부터 토오키 영화가 상영되고 명치좌, 약초극장 등 최신식 극장이 들어서자 낙후한 시설의 우미관은 2류극장에서 3류극장으로 추락했다.

1937년 8월, 우미관 화장실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활동사진시기 최초의 인기스타였던 변사 서상호는 아편중독자가 되어 더 이상 그의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은 극장에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조선 최초의 토오키 영화인 <춘향전>이 개봉된 지 2년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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