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마라톤'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지난해 은퇴를 선언한 한국 최고기록의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국민들에게 금메달을 선물한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아니면 일제치하 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분루(憤淚)를 흘려야 했던 손기정일까? 사실 우리는 이들 모두를 마라톤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못지않게 값진 금메달을 땄지만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비운의 영웅이 있다. 바로 1950년 보스턴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함기용(80)이다.

함기용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국제 마라톤대회에서 '대한민국(KOREA)'이란 이름을 걸고 우승을 일궈낸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 32분 39초의 기록으로 당당히 금메달을 따냈다. 당시 만 19세의 나이로 마라톤 훈련 4년 만에 일궈낸 '기적'과도 같은 기록이다. 특히 당시 대회에서 함기용뿐만 아니라 송길윤, 최윤칠이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따 모든 메달을 우리 선수들이 차지한, 세계 마라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1950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함기용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함영훈


함기용의 기록엔 '마라톤'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지금 함기용을 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대한민국 최대의 검색 점유율을 자랑하는 한 포털사이트에서도 함기용에 대한 정보를 찾기 힘들다. 그 포털사이트에서 함기용은 마라토너가 아닌 '기업인', '전 지점장'으로 통할 뿐이다.

그러한 정보마저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흔한 사진 한 장도 없다. 한 언론사에서 제공된 유료정보를 이용해야 겨우 '런던올림픽 참가', '보스톤마라톤대회 우승'이라는 단 두 줄의 마라톤 관련 기록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고인이 된 것도 아니고 가족이 없는 것도 아닌데, 함기용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다. 손기정, 이봉주, 황영조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를 쉽고 편하게 찾아볼 수 있는 것과 차이가 난다.

함기용은 금메달을 따고도 왜 대중에게 기억되지 못했을까? 그것은 그의 삶이 우리나라 비운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기용은 앞서 밝힌 것처럼 1950년 4월 19일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국내는 물론 해외의 언론에서도 대서특필되며 그는 화려한 영웅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조국은 6·25전쟁으로 이미 폐허가 돼 있었다. 화려한 퍼레이드와 환호성 대신 탱크 바퀴와 총성이 그를 맞았다. 돌아온 조국은 이미 아비규환의 현장이었고, 함기용 역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예술로 되살아난 함기용에 대한 기억

그는 결국 영광의 금메달을 동대문 근처 땅속에 묻은 채 피난길에 올랐고, 이후 다시는 그 금메달을 되찾지 못했다. 2007년 보스턴마라톤 조직위원회에서 잃어버린 메달과 똑같은 메달을 다시 제작해 줬지만 땅 속에서 사라져간 금메달처럼 함기용 역시 대중의 기억에서 지워져 갔다.

 함영훈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승을 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휩싸인 조국은 함기용 선수를 환영하지도, 기억할 수도 없는 현실을 표현했다.

함영훈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승을 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휩싸인 조국은 함기용 선수를 환영하지도, 기억할 수도 없는 현실을 표현했다.ⓒ 장정욱


이러한 비운의 영웅 함기용을 다시 대중 앞으로 끌어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의 손자 함영훈이다. 함영훈은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판화 작가로 활동하는 미술가다.

함영훈은 지난 2008년부터 지금까지 'GROOVE(굴곡)'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그의 할아버지 함기용을 대중 속으로 끌어냈다. '마라톤'이라는 이름으로 5개의 연작(連作)을 선보이며 비운의 삶을 살아온 함기용을 부활시키고 있다.

"광복!
한 소년이 뛰었습니다.
즐거움에 달음박질치었습니다.
내 나라를 찾은 기쁨입니다.

1950년 4월 미국 보스톤….
한 소년이 뛰었습니다.
가슴에 선명한 KOREA, 그리고 태·극·기

승리의 기쁨은 온 세계인 가슴에
KOREA로 새겨집니다.

그러나 피맺힌 6.25…."

함영훈 작가가 자신의 작품 'GROOVE - Victory'에 적은 글귀다. 몇 줄 안 되는 글귀지만 함기용의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함영훈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기록한 함기용에 대한 이야기.

함영훈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기록한 함기용에 대한 이야기.ⓒ 장정욱


지워진 역사를 살려내는 것은 현 세대의 의무

함영훈은 할아버지 함기용에 대해 "여러 금메달이 우리 눈앞에 있지만 어려운 시기에 대한민국을 알린 스포츠 외교사절로 첫 문을 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분"이라고 추억했다.

그의 함기용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그가 '가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함기용이 살아온 '굴곡'의 삶에 대해 우리 후손들은 기억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기억 속에 남겨지지 못하는 비운의 영웅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정치적 또는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러한 영웅들의 업적은 '기록'조차 되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함영훈은 "기록되지 못했다고 영원히 묻어두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해석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이기 때문이다.

함기용을 국민들의 기억 속에 새기려는 함영훈 작가의 노력을 단순한 '가족애'로 치부해버려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함영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우리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작가'의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영훈 작가와 함기용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작품.

함영훈 작가와 함기용을 주인공으로 한 그의 작품.ⓒ 장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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