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이 귀국 직후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이 사진은 최초 공개되는 사진이다.

1974년 챔피언에 오른 홍수환이 귀국 직후 환영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이 사진은 최초 공개되는 사진이다.ⓒ 홍수환


한국프로복싱 최초의 세계 챔피언은 1966년 6월 25일 탄생했다. 장충체육관에서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에게 이기면서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챔피언 만들기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대전료 5만5000달러를 정부에서 보증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러진 이날 대회에서 2:1 판정승은 사실 개운치 않은 결과였다.

김기수는 얼마 가지 않아 타이틀을 잃었고, 66연승을 달리다가 첫 패배를 당한 니노 벤베누티는 아예 체급을 올려 WBA·WBC 통합 챔피언으로 활약하다가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며 은퇴했다.

김기수 이후 2대 챔피언의 탄생은 9년이 흐른 1974년 7월 4일에야 이루어졌다. 당시 동양챔피언이었던 홍수환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정시합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15라운드 동안 4번이나 다운시키며 챔피언에 등극했다.

한국 최초로 원정경기에서 타이틀을 획득하는 순간이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래,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어머니와의 인터뷰는 유행어가 되었고, 한국 복싱은 본격적인 중흥기를 맞이했다. 원정 경기에서도 당당히 실력으로 챔피언이 되는 모습에 용기백배하며 자신감을 얻은 한국 복싱은 유제두, 염동균,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 김태식 등 챔피언을 연거푸 배출했다.

35년 전, 그날의 추억을 되살려보고자 지난달 30일 홍수환씨를 스타 복싱 체육관(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만났다.

지면 감방가야 하는 경기, 꼭 이겨야 했다

 챔피언이 된 후 명동 로얄호텔에서 만난 유제두(왼쪽), 김기수(오른쪽)

챔피언이 된 후 명동 로얄호텔에서 만난 유제두(왼쪽), 김기수(오른쪽)ⓒ 홍수환


홍수환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일병이었다. 1973년 2월 13일에 입대했다. 2월 9일 태국에서 18전 18승 16KO승의 당시 떠오르는 별이었던 타놈칫 수코타이에게 난타전 끝에 8라운드 KO로 이겼지만 온 몸과 얼굴은 멍투성이가 됐다. 11일 귀국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군대 영장이었다.

13일에 군에 입대했다. 체급은 55㎏이 한계 체중인 밴텀급이었는데 군대 짬밥을 잘 먹어선지 살이 붙어 68㎏까지 됐다. 그래도 군에 있으면서 동양 타이틀전을 치렀다. 꼭 이겨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엄청났다.

패배는 곧 '감방행'이었다. 경기에 지면 영창에 보냈기 때문이다. 보너스로 지옥 같은 유격 훈련도 보냈다. 그래도 또 지면 그냥 아예 권투를 할 수 없도록 일반 군사 훈련에 참가하도록 했다. 죽으면 죽었지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세계타이틀전이 잡혔다. 20년 만에 남아공에서 챔피언에 오른 아놀드 테일러가 쉬어가는 상대로 무명의 동양선수를 지목한 덕분이었다.

상대에 대한 정보는 '사진 한 장'이 전부

시합을 2개월 앞두고는 부대장의 배려로 김준호 트레이너 집에 머물면서 훈련했다. 아침 일찍 후암동 남산 기슭에서부터 남산 순환 도로를 돌고 계단 뛰기를 했다.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거쳐 남산 정상에 있는 탑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갔다. 꽤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내가 이렇게 쉬지 않고 남산 탑을 정복했으니 두려울 게 없다'며 애써 자신감을 끌어내곤 했다.

그러나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비디오 등의 자료가 없으니 아놀드 테일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아놀드 테일러 사진 한 장을 갖고 있는 게 작은 위안거리였다. 앞으로도 적이 없을 것 같던 멕시코의 로미오 아나야를 아놀드 테일러가 KO로 누르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쥔 모습을 담은 신문 사진 한 장을 오려놓고 보고 또 봤다. 사진 상으로 아놀드 테일러가 홍수환보다 키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게 그가 아는 전부였다.

이렇게 준비하는 동안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경기 장소는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김준호 트레이너와 홍수환은 단순하고도 멋진 작전을 세웠다. 작전의 가장 큰 원칙은 오직 KO로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판정승은 필요 없었다. 그것이 아무런 정보 없는 홍수환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비행기 6번 갈아타고 35시간 만에 경기장 도착

 귀국 직후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

귀국 직후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 홍수환


1974년 남아공행은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축소판이었다. 국교가 없던 남아공의 입국 비자를 받을 수 없어 우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비자를 받고 비행기를 탄 후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서 인도 옆에 붙은 스리랑카까지 갔다.

스리랑카를 출발한 비행기 아래로 새하얀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영연방 세이첼스 섬이라는 곳이었다. 영화 <엠마누엘>의 촬영 장소이기도 했다. 홍수환은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하얀 모래를 처음 봤다. 정말 멋진 곳이었다.

남아공 수도인 요하네스버그에서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더반으로 갔다. 결국 비행기를 6번 갈아타고 35시간 걸린 끝에 경기 장소인 남아공 더반에 도착했다. 요하네스버그부터 더반까지의 거리는 꼭 서울-부산 정도 됐다. 항구도시인 것도 비슷했다.

마중 나온 남아공 프로모터를 따라다니며 본 요하네스버그와 더반의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1974년의 남아공은 지상 최악의 인종 차별 국가였다. 길거리 곳곳에서 흑인 구타가 자행되고 있었다. 늑대 같은 셰퍼드가 흑인을 물었지만 경찰에게 얻어맞는 쪽은 셰퍼드가 아니라 흑인이었다.

흑인은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일제와 우리나라의 관계가 연상됐다. 홍수환은 반드시 백인인 아놀드 테일러를 이겨 이곳 흑인들의 울분을 풀어 주리라 결심했다.

한국 원양어선 선원 20명 응원에 목이 메다

1974년 7월 4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당일 아침 체중을 달아보니 200g 오버였다. 사우나에서 체중을 뺄 때 호텔 주인이 담요를 가지고 와 덮어주고 비벼주는 등 지극정성으로 도왔다. 그 덕인지 단번에 200g이 빠져서 계체량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계체량 직후 맛있는 걸 먹고는 김준호 트레이너의 말에 따라 경기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기다렸다가 대기실에서 경기장으로 향했다. 문 밖에는 어떤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까. 경기장 문을 박차고 나갈 무렵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소리가 들렸다.

"홍수환! 홍수환!"

비행기를 6번 갈아타고서야 올 수 있는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건 도대체 누굴까? 다름 아닌 한국 원양어선 선원 20여 명이 홍수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다. 그의 몸에 전율이 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의 이름을 외치는 이들을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눈시울이 불거진 채로 김준호 트레이너에게 말했다.

"선생님. 내가 링 위에서 죽더라도 타월 던지지 마세요."

그때 이미 정신적으로 홍수환이 승리했다. 언제나 그렇듯 정신은 육체를 앞선다. 그 소리 했다가 오히려 혼났다. "임마, 네가 죽긴 왜 죽어?" 홍수환은 외롭지 않았다.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도 있었지만 백인에게 억압 받는 흑인 관중도 그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았다.

그날 링에선 애국가를 틀지 못했다. 애국가 테이프를 준비하지 못해 양국 국가 연주를 생략했다. 한국권투위원회에서 신경을 써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회 몰아치기 작전 적중... 4번이나 다운 빼앗아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김포공항에서 카퍼레이드로 시청앞 광장까지 갔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김포공항에서 카퍼레이드로 시청앞 광장까지 갔다.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 홍수환



어떤 경기든 1회전에 상대의 콧대를 꺾어놓는 게 홍수환의 주요 전략 중 하나였다. 시치미 떼고 점잖게 경기 하다가 1회전 중반쯤 갑자기 몰아치는 것이었다. 그러면 상대방은 기선을 제압당해 기를 펴지 못하게 된다. 링에서는 무지막지한 사기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테일러는 그 작전에 제대로 걸려들었다. 홍수환은 조심스러운 척하다 1회 중반 태풍처럼 몰아쳤고 테일러에게 다운까지 빼앗아냈다. 테일러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했다.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경기가 잘 풀렸다.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는 경기 중반까지 1회전에서 말린 분위기를 좀처럼 반전시키지 못했다. 5회에 다시 다운을 빼앗아냈다. 그날따라 레프트 훅과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그렇게 잘 맞을 수 없었다.

11회전에 큰 위기를 한 차례 넘겼다. 전 챔피언을 KO시킨 테일러의 강펀치가 불쑥 튀어나왔다.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다. 왼쪽 귀에서 뜨끈뜨끈한 느낌과 함께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의 귀가 찢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그 펀치가 제대로 얼굴에 들어갔더라면 홍수환도 전 챔피언처럼 테일러의 희생양이 되었을지 모른다.

12회 들어 심판은 귀 찢어진 걸 핑계로 닥터에게 홍수환을 데리고 갔다. 경기 맥을 끊고 테일러를 쉬게 해주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사실 테일러가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경기가 계속 됐다면 KO승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갑자기 남아공 관중들이 보내는 환호가 홍수환을 향해 쏟아졌다. 비록 적이지만 정정당당히 승부를 붙이라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힘을 내서 15회까지 싸웠다. 14회, 15회에도 다운을 뺏었다. 그러나 이곳은 지구 반대편의 남아공. '혹시' 하는 생각을 가슴 한구석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김준호 트레이너는 "걱정하지 말라"며 홍수환을 토닥거렸다. 경기가 끝나고 링에 올라온 아나운서가 결과를 발표했다.

"더 위너 앤드 뉴 챔피언(The winner and new champian…)."

'뉴(New)'란 소리에 홍수환은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네 번의 다운과 함께 얻어낸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이었다.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흑인들은 자신의 원수인 백인을 꺾었다고 환호했다. 중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세계 챔피언 벨트를 아버지 무덤에 바치겠다고 권투에 뛰어든 이후 몇 번이나 포기하려다가 세계 정상에 올랐기에 그 감동은 몇 갑절이나 더한 것이었다.

원양어선 선원들과 애국가 부르며 펑펑 울다

 경기 후 홍수환은 테일러를 위로해줬다. 왼쪽이 김준호 트레이너.

경기 후 홍수환은 테일러를 위로해줬다. 왼쪽이 김준호 트레이너.ⓒ 홍수환


그 와중에 남아공 관중의 환호성을 뚫고 뜻밖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홍수환이 이기자 감격에 벅찬 20~30명의 한국 원양어선 선원들이 육성으로 애국가를 합창하는 소리였다. 애국가 테이프를 준비하지 못해 경기 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애국가를 선원들이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울고 있었다.

홍수환도 같이 울었다. 라디오 중계팀은 한국으로 전화를 연결하고는 그의 어머니를 바꾸어 주었다. 어머니와의 첫마디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배고픈 시절이어서 그랬을까? 홍수환은 챔피언 타이틀도 먹었다고 표현하고 말았다.

"그래, 수환아. 귀에 피는?"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찢어진 귀를 걱정했다.

"김기수씨 어머니가 그렇게 부럽더니, 이제 소원을 풀었어. 대한국민 만세다, 만세야!"

언젠가 이기면 한번 해보려고 준비한 말들이 아니었다. 그냥 즉석에서 홍수환도 어머니도 모르게 터져 나온 말이었다. 이 말은 나중에 유행어가 됐다. 3년 뒤 카라스키야를 이겼을 땐 현수막이 이렇게 붙었다.

"엄마, 나 또 챔피언 먹었어!"

복싱의 생명은 '정정당당한 승부'... 가짜 선수 경기는 '국제적 범죄 행위'

얼마 전, 홍수환은 후배 김정범(OP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의 경기 상대가 가짜 선수였다는 기사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테일러와의 경기 때 심판이 찢어진 귀를 문제 삼는 동안 남아공 관중들은 정정당당히 경기를 속행하라고 오히려 도전자를 응원했다. 홍수환씨는 "이게 바로 스포츠 정신이고 매력이다, 최고의 경지와 한계를 위해 끝없이 매진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고 말했다. 다음은 홍수환씨의 '한국 권투를 위한 쓴소리'다.

"안일한 승부에 안주한다면 관중들은 자연히 등을 돌린다. 하물며, 깨끗하고 정정당당한 승부는커녕 가짜 선수를 내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제적인 범죄행위였다. 이번 사태의 끝을 지켜봐야 한다. 한국권투위원회는 매니저 핑계, 매니저는 태국 협회 핑계 대면서 흐지부지 넘어간다면 한국복싱은 완전히 사망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건 이번 일로 인해 누구보다도 선수가 가장 큰 피해자 아닌가?

세계 챔피언이 없어서 복싱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일단 챔피언부터 만들자는 논리도 이번 사태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예전보다 선수가 없으면 더더욱 강한 상대와 맞서 싸우며 연단을 해야지 그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안 된다. 세계 챔피언에 앞서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를 목표로 해야 한다.

세계 챔피언이 탄생하면 복싱이 벌떡 일어날까? 우리나라에 여자 세계챔피언이 5~6명이나 있는데 왜 이 모양인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는가? 어려울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신인왕전 등 4라운드 시합 활성화를 통해 기초부터 차근차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게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저변이 있는 한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대한민국 여자 골프가 그렇지 않은가? 알아서 꿈나무들이 쑥쑥 튀어나와서 우승 퍼레이드를 벌인다. 인생도 사업도 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해야만 길이 열린다."

 1977년 카라스키야를 이기고 돌아왔을 때의 홍수환.

1977년 카라스키야를 이기고 돌아왔을 때의 홍수환.ⓒ 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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