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바클리, 크리스 웨버, 숀 켐프, 칼 말론…, 이들은 모두 80~90년대 NBA에 혜성같이 등장하며 천재적인 기량과 스타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걸출한 파워포워드들이다. 동시에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에 선수 경력 내내 단 한 차례도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아깝게 사라진 '무관의 제왕'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90년대 한국농구도 걸출한 재능을 지닌 한 명의 만능 포워드를 배출했다. 그는 등장부터 특별했다. 서구 선수들에게도 뒤지지 않던 위풍당당한 체구, 빅맨임에도 가드와 같은 넓은 시야와 패싱 센스를 겸비했고, 코트의 모든 지역에서 득점을 성공시킬 수 있는 득점력에, 위기상황에서 마지막 슛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배짱까지, 이전의 한국농구에서 활약했던 어떤 빅맨과도 다른, 좀처럼 보기 드문 스타일의 선수였던 그는 허재 이후 가장 완벽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에 근접한 선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마치 신은 그에게 농구선수로서 허락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한 몸에 선사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신은 그에게 재능은 주었을지언정,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건강'과 우승을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운'은 허락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그를 '한국판 찰스 바클리'라고 불렀지만 본인은 정작 '매직 존슨'이 되기를 꿈꿨던 남자. 그러나 '크리스 웨버'처럼 화려했지만 짧은 전성기를 뒤로 하고 예상보다 일찍 코트를 떠나야했던 남자. 지난 25일 전격적인 은퇴를 선언하며 끝내 한국판 무관의 제왕으로 남게 된, '영원한 매직 히포' 현주엽(34)의 농구인생 스토리다.

현주엽의 '화려한 시절'

창원 LG 포워드 현주엽 창원 LG 포워드 현주엽

전격 은퇴를 선언한 현주엽ⓒ KBL

현주엽에게는 학창 시절부터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았다. 경기당 30~40점을 우습게 넣는 걸출한 '득점왕'이면서도, 리바운드, 어시스트, 가로채기, 게임 리딩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못하는 것이 없었다. 많은 이들은 현주엽에 대하여 1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선수가 출현했다고 극찬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휘문중-휘문고를 거쳐 고려대에 진학하며 1990년대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대학농구의 르네상스기를 주도하기까지. 이후에도 '농구대잔치 세대'로 불리며 동시대를 풍미했던 숱한 스타 플레이어들 속에서도 그의 존재는 단연 빛을 발했다. 특히 휘문중·고교 1년 선배이자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와의 라이벌전은 당대 최고의 빅매치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현주엽은 고려대 1학년 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선발되며 한국농구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현주엽은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캐나다 세계선수권, 홈에서 열린 95년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 대회를 통해 약관의 나이에 당당히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매김하며, 서장훈과 함께 90년대 대표팀의 골밑을 책임진 한국농구의 간판 파워포워드였다.

현주엽의 농구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순간은 대학교 2학년이던 1995년 대학무대 전관왕과, 상무 시절이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장면일 것이다.

현주엽은 최대 라이벌이던 서장훈이 95년 미국유학으로 1년간 자리를 비우며 무주공산이 된 대학농구계를 평정하며 그해 대학연맹전과 전국체전 등을 싹쓸이 석권하는 등, 5관왕을 차지했다. 그해 겨울 열린 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실업팀들을 제치고 정규리그 전승우승을 달성하는 등 절정의 시기를 보내며 국내 최고의 빅맨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는 중국을 누르고 20년만의 금메달을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88-90으로 패색이 짙던 종료 직전 중국 후웨이둥의 자유투 2개가 연이어 실패하며 얻은 동점기회에서, 현주엽은 멋진 드리블 돌파에 이은 레이업슛으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으며 연장으로 끌고갔고, 연장전에서도 과감한 일대일과 중거리슛으로 중국 수비를 농락하며 연속 득점으로 서장훈·김승현과 함께 이날 승리의 최대 히어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현주엽은 화려했던 개인 성적에 비교하면 정작 우승 복은 그리 많지 않았던 편이다. 대학시절에는 라이벌 서장훈의 연세대가 세 번이나 농구대잔치를 제패할 동안, 현주엽은 단 한 번도 우승을 맛보지 못하며 아쉬운 2인자로 남아야했다.

프로무대에서도 우승의 불운은 이어졌다. 1998년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청주 SK에 입단했지만, 1년 만에 광주 골드뱅크에 트레이드 된 후, 상무와 부산 KTF(현 KT), LG를 거치는 동안, 정작 우승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장훈(2회 우승)을 비롯한 농구대잔치 세대 동료들이 최소한 한번 이상씩 우승반지를 소유한 것과 달리, 현주엽은 9년의 프로생활동안 우승은 고사하고 챔피언결정전 한번 나가보지 못한 채 쓸쓸하게 선수경력을 마감해야했다는 것은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현주엽 VS 서장훈, 라이벌이자 동반자

현주엽의 이력을 거론할 때 '국보급센터' 서장훈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로 출범이전인 90년대 한국농구 판도를 좌우했던 고려대 VS 연세대의 라이벌 구도는 현주엽과 서장훈이라는 두 명의 걸출한 스타플레이어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이후로도 때로는 한 팀의 동료로서, 때로는 경쟁팀의 에이스로서 '라이벌과 동반자'의 관계를 미묘하게 오고가야했다.

이들은 첫 등장부터 한국농구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서장훈은 현주엽보다 1년 앞선 93년 연세대로 진학하자마자 데뷔 첫해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제패를 달성하며 MVP까지 석권했다. 이듬해 현주엽이 기다렸다는 듯이 최대 경쟁자였던 고려대로 진학하며 농구대잔치 종료 직후 한 달 만에 벌어진 94년 MBC 대학연맹전에서 서장훈의 연세대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 본격적인 고려VS연세 라이벌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후로 서장훈과 현주엽은 명실상부한 양교의 에이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며 포지션 상으로서는 맞대결 구도를 형성하는 등, 최고의 호적수로 등장했다. 현주엽은 95년 서장훈이 미국유학으로 빠진 대학농구계를 평정하며 전관왕을 달성했지만, 이듬해인 96년 서장훈이 복귀한 연세대가 고려대의 7연속 우승행진에 제동을 걸며 대학농구 정상으로 복귀했다. 두 선수가 졸업반이 된 97년에는 다시 현주엽의 고려대가 연세대의 44연승 행진을 저지하며 복수에 성공하는 등, 치열한 경쟁관계는 졸업 때까지 계속됐다. 두 선수의 대학무대 마지막 대결은 97~98농구대잔치 4강 플레이오프였고, 여기서 현주엽은 평균 30득점을 넣는 맹활약으로 서장훈을 압도했으나 1승 2패로 결국 우승의 문턱에서 또 한 번 좌절하며 아쉽게 대학무대 경력을 마쳐야했다.

사석에서는 친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였지만, 코트위에서는 언제나 넘어야할 강력한 벽이자 비교대상이었고, 최고의 자리를 놓고 끊임없이 미묘한 경쟁을 펼치던 존재였다. 서장훈과 현주엽은 대학졸업 후 프로무대 청주 SK를 통해 휘문고 이후 5년 만에 재결합하게 되지만, 이미 너무 커버린 두 선수는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처럼 더 이상 한 팀에서는 공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결국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채 현주엽이 1년 만에 약체 골드뱅크로 트레이드되며 '꿈의 조합'은 해체되었다. 서장훈은 그해 프로무대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시절을 보내지만, 이후 현주엽은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점점 멀어지며 엇갈린 행보를 걸어야했다.

농구인생 내내 모든 면에서 두 선수는 자연히 언론의 비교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수 없었고, 한 팀으로 뛸 때는 종종 불화설에 시달리기도 했다. 두 선수는 이에 대하여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며 라이벌 구도나 불화설을 강력히 부정했지만 적어도 이들의 전성기 시절 팀 내외에서 미묘한 경쟁의식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 주변의 중론이다.

이들의 팽팽한 대결 구도는 90년대 한국농구의 전력 편중화를 막고 다채로운 흥밋거리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건전한 긴장관계로 서로의 기량발전에도 좋은 자극이 되었던 건전한 라이벌 관계로 평가받는다. 대표팀에서는 마지막으로 영광을 함께했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통해 한국에 20년만의 우승을 안기는데 큰 수훈을 세우며 함께 '농구대잔치 세대'의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다. 혈기왕성하고 자기중심적이던 젊은 시절을 뒤로하고, 선수 시절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여 우승을 합작해보자던 두 선수의 약속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유난히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

농구선수로서 최고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현주엽은 왜 프로에서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을까. 그것은 역시 잦은 부상과 팀운, 그리고 프로화가 불러온 시대적 변화로 요약된다.

대학시절까지의 정통 파워포워드이자 득점기계였던 현주엽은, 프로에 오면서 점차 다재다능한 올어라운드 플레이어 혹은 '도우미' 타입의 선수로 변신했다. 특히 포인트가드 못지않은 패싱력과 넓은 시야로 그는 '포인트 포워드'라는 새로운 포지션 개념을 창시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현주엽의 통산 어시스트는 5.2개에 이르며 KTF 시절이던 04~05시즌에는 무려 7.8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전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한 통산 7번의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주희정과 함께 국내 선수 역대 1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대학 때부터 고질적이었던 무릎부상은 그에게 운동능력과 함께 공격본능까지 앗아가 버렸다. 프로데뷔첫해 평균 20득점을 돌파했으나 이후 해마다 떨어진 득점력은 LG로 이적한 06~07시즌부터는 마침내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고, 마지막 해였던 08~09시즌에는 6.73점까지 하락했다. 빅맨으로서 가장 위력적인 무기인 포스트업 능력을 잃어버린 현주엽은, 더 이상 위협적인 골밑 득점원이 아니었고 한때 찬사를 받았던 패스 능력은 본업을 망각하고 부업에만 치중한다는 비판의 도마에 올라야했다. 현주엽 역시 몇 년째 계속된 비판을 자신도 알고 해마다 변화를 공언했지만 정작 플레이스타일은 매년 제자리걸음이었다.

프로화에 접어들면서 내외곽을 겸비한 재능 있는 장신 포워드들이 대거 등장한 것도 현주엽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공식 신장 195cm지만 실제로는 192~3cm 정도로 알려진 현주엽은 해가 갈수록 골밑에서 언더사이즈 토종 빅맨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현주엽 이후 세대의 토종 장신선수들이 프로화에 맞추어 포지션을 변경하거나 슛 범위를 늘려서 나름의 생존법을 찾은 것과 달리, 현주엽은 자신의 플레이스타일을 고집하며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다.

외국인 선수와 매치업 시키기에는 탄력과 높이에서 부족하고, 그렇다고 전문 포워드나 가드로 돌리기에는 외곽슛과 스피드가 부족했다. 자유분방하고 직접 공을 오래 가지고 있어야 진가를 발휘하는 그의 플레이스타일상, 우지원이나 문경은같은 슈터들처럼 식스맨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동시대를 풍미했던 서장훈이 노쇠한 지금도 건재한 득점력으로 자신만의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는 것과 달리, 현주엽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적극적인 '공격의지'마저 상실했고, 철저히 분업화된 프로농구에서 그의 다재다능함은 어느새 확실한 포지션 경쟁력이 결여된 '어정쩡함'과 동의어로 바뀌어있었다.

현주엽은 팀운도 따르지 않았다. 데뷔 첫해 서장훈과 다시 한 팀이 된 것은 팀의 에이스가 되기를 갈망했던 그의 프로생활이 첫해부터 꼬이기 시작한 빌미가 되었다. 이후 골드뱅크와 상무 제대 후의 KTF는 우승전력과는 거리가 있던 약체팀이었다. 2005년 여름 FA가 된 현주엽은 LG와 5년 계약을 체결했지만 '토털 농구'를 표방하는 신선우 감독이나 '플래툰 시스템'을 시도한 강을준 감독 같은 지도자들은 현주엽과는 궁합이 맞지 않았다. 자신이 중심이 된 팀에서 자유롭게 풀어줘야 진가를 발휘하는 현주엽의 플레이스타일은, 분업화된 시스템에서의 포지션 경쟁력을 요구하는 프로농구와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계속된 부상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이던 자신감을 빼앗아가며 결국 '계륵'으로 전락했다.

현주엽은 9시즌동안 통산 397경기에 출전해 평균 13.3점, 5.2어시스트, 4.1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플레이오프까지 포함한 통산 성적은 407경기에서 5389점, 리바운드 1674개, 어시스트 2095개. 플레이오프는 통산 4회 진출했으나 성적은 출전경기만 놓고 봤을 때 1승 9패에 그쳤고, 모두 첫 라운드에서 고배를 마시며 이제껏 한번도 PO 시리즈 승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 현주엽의 화려한 이름값이나 기대치에 비교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수치다.

세대교체의 선두주자에서 구시대의 막내로

비록 전성기는 짧았지만 현주엽이 코트 위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중량감과 다재다능함은 이제까지의 국내 선수들에게 쉽게 볼 수 없었던 강렬함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현주엽은 국내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에 대한 향수와 함께, 믿음직한 에이스이자 리더의 모습으로 어필했다.

또한 거칠고 터프한 인상과는 달리, 현주엽은 선수 경력 내내 테크니컬 파울이 단 5번에 그쳤고, 2006년에는 모범선수상까지 받을 만큼 깨끗한 경기매너와 신사적인 플레이로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이기도 했다. 강한 승부욕을 지녔음에도 코트위에서는 동업자 정신을 잃지 않았고, 당당하면서도 침착한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승부욕에만 치우쳐 날로 거칠어지고 있는 프로 무대에서 후배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현주엽의 은퇴는 한국농구에서 있어서 한 시대의 황혼이 가까워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전희철, 양희승 등 그와 함께 동시대를 풍미했던 안암골 호랑이군단을 비롯하여 농구대잔치 세대의 주역들도 이제 하나둘씩 코트를 떠나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15년 전, 한국농구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현주엽은 어느새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저물어가는 '농구대잔치 세대의 막내'가 되어 농구인생의 대미를 장식했다.

끝까지 그의 농구인생을 괴롭혔던 부상으로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목발을 짚고 마지막 은퇴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유머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그의 또 다른 닉네임이었던 찰스 바클리의 마지막 순간과도 유사했다. 농구를 좀 잘했던 선수라고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 마지막 소감은 그의 파란만장했던 선수경력을 설명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지만, 그가 앞으로 선수시절보다 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최고의 재능을 지녔으나, 정작 최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 선수. 그러나 많은 팬들은 우승반지보다 현주엽을 코트 위에서 항상 '최고의 열정'을 불태우던 '매직 히포'로 기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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