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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영화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길 배우 최은희(1926년 출생). 그녀는 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꼭 여자로서 행복했다 할 수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나라 없는 서러움을 겪었으며, 해방 후 남북으로 갈려진 이 땅에서 전쟁의 끔찍함을 경험했다. 그리고 첫 결혼 생활조차 순탄치 못했으며, 간통죄 1호라는 불명예를 앉고 신상옥 감독과 연애 후 결혼했으나 70년대 이혼이란 아픔을 겪어야했다. 그뿐만 아니라 70년대 유신이라는 장벽에 부딪쳐 자신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시련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업차 출국했던 홍콩에서 북한 김정일의 지시로 납치되어 한국영화계에서 갑자기 사라졌으며, 신상옥 감독과 같은 해에 북한에 납치당해 이혼 5년 후 또 다시 북한에서 재회하게 되는 믿기지 않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후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지만 북한에서 출연한 영화라 대한민국에서 정식으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의지 때문에 목숨을 건 북한 탈출을 감행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에서 신상옥 감독과 함께 영화예술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미국으로 망명까지 해야만 했다.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더 이상 신상옥 감독과 배우 최은희에게 또 다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2009년 2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직도 연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에게 있어 연기란 한 순간도 놓을 수 없는 성역이다. 배우 최은희,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천생 연기자인 것이다. 대한민국 영화사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그녀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해보자.

1947년 데뷔, 신상옥 감독 작품 대부분에 주연으로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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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는 1947년 <새로운 맹세>를 통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박기채 감독의 <밤의 태양>(1948년),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년)을 통해 인기배우로 발돋움한다. 이 두 작품으로 확실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알린 것이다. 첫 데뷔가 1947년인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빠른 속도로 대중들에게 관심 받는 배우가 되었다.

최은희는 한국적인 여인상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배우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어떠한 여배우보다 한국적인 색을 강하게 풍기는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그녀의 억세보이는 인상 자체가 영화에서 오히려 강하면서도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여성을 표현하는 데 적합했다. 그녀가 맡았던 역할 중에 유독 과부 역할이 많은데, 이것 역시 그녀가 풍기는 이미지와 영화에서 배우로서 쌓아온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잘 통한 것이 주된 이유라고 봐야할 것이다.

<밤의 태양>과 <마음의 고향>으로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그녀에게 확고부동한 여배우 이미지를 가져다준 사람은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신상옥 감독이었다. 최은희는 6.25 전쟁 당시 강제로 부역을 당하면서 연기자로서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된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녀에게 있어 이것만큼 큰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위기는 신상옥 감독과 함께 한 영화를 통해 말끔히 씻어버리게 된다. 그녀에게 여배우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것은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부터였다.

신상옥 감독과 그녀는 1955년 <꿈>을 통해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후 그녀에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지옥화>(1958년), 제1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상록수>(1961년), 제5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년) 등 큰 인기를 안겨다 준 작품들 대부분 신상옥 감독 영화였다. 따라서 신상옥 감독은 그녀에게 있어 구원의 존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온전하게 관객들에게 전달시킨 신상옥 감독의 연출 실력이 없었다면 당시 그녀의 전성기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꼭 신상옥 감독 작품만을 통해 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아니다. 임원식 감독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년)를 통해 제4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9회 부일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전성기를 보낸 1960년대 그녀를 빛낸 대부분 영화는 신상옥 감독 작품이었다. 그녀와 신상옥 감독은 1970년 유신으로 신필름이 문을 닫기 전까지 무려 24편에서 호흡을 맞추었다. 최은희란 배우를 떠올리면 항상 신상옥 감독 이름이 함께 나올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동반자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분단 조국의 역사에 휘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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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끌었던 제작사 신필름은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제국이었다. 그녀는 이 영화 제작사를 통해 50, 60년대 기억에 남을 영화들을 제작하고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신상옥 감독이 대표로 있던 신필름이 당시 한국영화계를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당연히 두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신필름의 존재는 한국영화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영화사 최초로 배급, 제작, 투자를 모두 총괄했기 때문이다.

신필름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당시 그녀가 얼마나 인기 있는 여배우였는지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61년 당대 최고의 여배우였던 김지미가 출연한 <춘향전>(1961년)과 최은희가 출연한 <성춘향>(1961년)이 비슷한 시기에 극장에서 맞붙게 된다. 이 두 작품은 똑같은 줄거리를 다루고 있는 영화였지만 신상옥 감독이 연출하고 그녀가 주연을 맡은 <성춘향>이 34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압도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었다. 여배우로서 당시 그녀의 이미지가 관객들에게 얼마나 잘 통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전성기를 보내고 70년대 접어들면서 그녀에게 암흑기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유신헌법이 통과되고 본격적인 1인 독재가 시작되던 시절, 한국정부는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과 영화사 통폐합을 추진한다. 그리고 영화사 운영 당시 친하게 지냈던 김종필씨가 정치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씨 역시 당시 권력자로부터 눈 밖에 난 것이 사실이다. 당시 이들이 정치인들과 친분을 유지했던 부분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 글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신필름은 홍콩영화 <소녀> 파문이 터지면서 결국 문을 닫게 된다. 그리고 신필름에 의해 탄생된 안양예술고등학교까지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특히 그녀는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학교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홍콩으로 출국했던 1978년 납북되고 만다.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정일은 북한 영화 부흥을 위해 신상옥 감독과 최은희 납치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한국 영화계의 큰 별들이 동시에 증발해버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배우 최은희가 가지고 있던 매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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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그 어떤 배우보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해쳐 나왔던 그녀가 영화에서 보여준 매력은 무엇일까? 가장 집약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가진 강한 인상을 영화에서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기는 분명 당시 활동했던 다른 여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하게 뛰어난 점이 있었단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이 대부분 한국 전통여성상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순종적이고 가녀린 여성상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시대상황을 떠올려본다면 그녀가 보여준 영화 인물들은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있었다. 얼핏 보면 그녀 역시 상당히 순종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극중 인물 같지만, 영화에서 항상 남성들에게 끌려가는 인물이 아닌 때론 남성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어려움을 헤쳐가는 역할을 맡아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이런 그녀의 연기는 당시 함께 활동했던 여배우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것이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영화에서 보여준 인물 또한 자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 가는 의지를 보여준 여성상을 표현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당시 시대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그녀가 보여준 연기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배우 최은희가 만들어 놓은 한국 여성상은 분명 시대를 앞서 나갔다. 시대에 순종하는 여성 같은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항상 자신의 삶에 스스로 능동적이었던 그녀의 인생관이 영화에서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런 매력이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기에 그녀는 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제 70을 훌쩍 넘긴 배우가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여배우가 나이 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슬픈 일이다. 더 이상 스크린에서 자신이 활동할 공간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와도 같기 때문이다. 여전히 연기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영화에서 자신의 마지막 불꽃을 태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가 보여준 뛰어난 연기가 지금도 여전히 스크린 위에서 통용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개인적인 열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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