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타임즈 영화스틸컷

▲ 모던 타임즈 영화스틸컷 ⓒ United Artists


20세기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찰리 채플린. 그는 사회기득권보다 못 가진 자들을 위해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희극화시켰던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그가 연출 혹은 제작에 참여한 영화 그리고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 대부분,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모습 혹은 독재자 밑에서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대중들의 모습을 그렸다.

찰리 채플린은 자신의 인생 중 황금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정신병으로 인해 도저히 찰리 채플린을 키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너무도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 맡겨졌다. 그 스스로도 이야기를 했지만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의 부모 모두 영국 뮤지컬 배우였단 것을 감안하면, 그의 재능은 부모에게서 이어받은 것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이렇게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한 찰리 채플린에게 자신의 연기 원천은 항상 힘없고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된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살아왔던 인생을 되돌아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희극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천재였다.  

찰리 채플린은 5세의 나이에 데뷔한다. 이후 17세에 영국 프레드 카노 극단에 입단 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프레드 카노 극단에서 일하면서 마크 세네트 감독 눈에 띄어 할리우드에 정식 데뷔하게 된 것이다.

1914년 처음 할리우드에 데뷔하게 된 찰리 채플린은 당시 무성영화시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한다. 이후 1919년까지 그는 짧은 희극 단편영화에 계속 출연하면서 그의 인지도를 넓혀간다. 첫 데뷔 해부터 그는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배우가 되었다.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그의 연기에 큰 지지를 보내면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1919년은 찰리 채플린에게 특별한 한 해로 기억될만하다. 그는 자신의 영화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사를 설립한다. 그가 이 영화사를 설립한 이유는 장편영화를 제작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실제로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들은 이 영화사 설립 후 나온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장편 영화 연출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그중에서도 이 시기에 엄청난 독서를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다.

일반적으로 찰리 채플린의 이미지가 형성된 시기는 1918년 <어깨 총>부터라고 한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대중들을 울리고 웃기는 유머가 곁들여진 작품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은 한참 후에 나오게 된다. 바로 1936년에 나오게 되는 <모던 타임즈>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허상을 이야기한 영화사에 남을 걸작 <모던 타임즈>

모던 타임즈 영화스틸컷

▲ 모던 타임즈 영화스틸컷 ⓒ United Artists


<모던 타임즈>는 찰리 채플린이 어떤 배우이자 감독인지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블랙코미디 영화이자 풍자코미디 영화다.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찰리 채플린 특유의 웃음을 전해주는 영화 장면들을 보면서 그가 왜 시대를 풍미했던 희극왕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작품은 1936년 작품이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허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콘베이어 시스템에서 자신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착각하게 만드는 찰리 채플린의 노동자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노동자로서 불황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특유의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준다.

<모던 타임즈>는 찰리 채플린에게 최고의 배우이자 감독이란 찬사를 가져다주었지만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히게 한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였다. 1936년 미국은 극심한 불황과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극우익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된다. 특히 레닌이 중심이 된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등장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거대한 도전이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던 당시 미국 극우익들의 눈에 이 작품은 완벽한 사회주의 성향 작품이었다.

특히 돈과 기계를 인간성 상실과 말살의 기본적인 도구로 인식하게 한 영화의 특성 때문에 이런 비난을 받게 된 것이다. 찰리 채플린 영화 중 걸작으로 남은 작품들 대부분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 비관적이며 독재자에 대해 날선 비판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단지 그를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모는 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얼마나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모던 타임즈>는 분명 근대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따뜻한 인간적 감정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사회주의적 관점이 많이 수용되긴 했지만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 일반화되는 사회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 찰리 채플린은 하루 종일 콘베이어 시스템에서 일하다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미친 사람으로 오인 받아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리고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겨우 풀려나지만 이미 회사에서 해고당한 뒤다. 그에게 돌아갈 회사가 없어진 것이다. 이후에도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황당한 일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이 일할 직장 찾기를 포기하거나 지금의 삶에 굴복하지 않는다. 당시 불황 때문에 엄청난 고통 속에 살았던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충분히 그의 인기도와 지명도를 생각한다면 편안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 대신 대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이런 선택은 이후 그가 처하게 되는 비극적인 일의 발단이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혹자는 <모던 타임즈>를 산업과 자본에 종속되게 된 영화산업을 비판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이 작품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이후 5년 동안 할리우드에 복귀하지 못한다. 그의 영화 인생에 첫 시련을 안겨다준 작품이다.

매카시 열풍의 표적이 된 영화 <독재자>와 <살인광 시대>

위대한 독재자 영화스틸컷

▲ 위대한 독재자 영화스틸컷 ⓒ United Artists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1940년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던 극우정치인 히틀러를 풍자적으로 묘사한 영화였다. 당시 히틀러의 실체에 대해 잘 몰랐던 유럽 여러 나라와 독일 등에서 상영금지 영화로 묶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히틀러에 대해 비판적인 영화이자 무수히 많은 일화가 있는 작품이다. 그 일화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대한 독재자>에는 유대인 수용소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들 당시 찰리 채플린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오로지 자신의 상상력만으로 히틀러가 만든 강제수용소를 영화에 표현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비극으로 인식되는 사건을 예견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찰리 채플린의 광팬이었던 히틀러는 자신을 비웃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에서 몰래 영화 필름을 구해와 혼자 본 사실은 유명한 일화 중에 하나다. 그리고 당시 독일을 도와 세계2차 대전에 참전했던 그리스에서 독일 장교들이 다른 영화를 보러왔을 때 레지스탕스들이 극장 필름을 바꿔치기하여 <위대한 독재자>를 상영한 것 역시 유명하다.

<위대한 독재자>는 국민들이 자신들 손으로 뽑은 독재자에 의해 어떻게 피해를 입고, 그런 정치인들이 왜 국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그는 독재자와 이발사 1인 2역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가 감독으로서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40년도에 제작된 <위대한 독재자>에 이어 1947년도에 나온 <살인광 시대>는 완전히 미국에서 찰리 채플린을 위험인물로 낙인 찍히게 만든 작품이다.

<살인광 시대>는 <모던 타임즈>와 마찬가지로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 미국사회에 대한 적나라한 풍자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주에서 상영 금지되었다.

내용 자체도 상당히 충격적이다. 영화의 주인공 베르도는 열심히 30년 동안 은행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해고통지를 받으면서 그의 인생은 변하기 시작한다. 그는 돈 많은 중년 여자와 결혼을 하고 그 여자들을 죽인 후 보험금을 타는 수법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나쁜 짓은 발각되어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살인광 시대 영화스틸컷

▲ 살인광 시대 영화스틸컷 ⓒ United Artists


<살인광 시대>는 이전 찰리 채플린 영화에서 볼 수 없던 인물이 등장한다. 모든 일에 냉소적이고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는 베르도의 모습은 비정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그가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은 1940년대 공산주의자로 몰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것과 맞물려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시기 자숙하고 있겠지만 찰리 채플린은 자신을 그렇게까지 몰고 간 미국 사회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낸 작품을 개봉해 오히려 더욱더 많은 논란을 만든다. 특히 이 작품에서 재판과정 중 베르두가 내던진 대사는 개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기업성장을 거론해 화룡정점을 찍고 있다. 단순한 살인극 같은 작품이 한순간에 새로운 시선으로 보이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100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됩니다. 많은 기업들이 그렇게 성장했습니다."

이 대사 한마디를 통해 찰리 채플린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자신의 비판적인 시선을 여과 없이 들어낸다. 베르두가 저지른 살인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들이 자본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저지른 무차별적인 행동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독재자>와 <살인광 시대>는 더 이상 찰리 채플린을 미국에서 살 수 없게 만들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메카시즘 열풍이 불면서 그는 위험한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만다. 당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메카시즘 열풍에 걸려 미국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매장 당했다. 이런 시기에 찰리 채플린은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공격 대상이었다.

찰리 채플린은 <라임라이트> 공연 초연을 위해 자신의 모국 영국을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메카시즘 열풍의 근원지였던 미 공화당 트루먼 정권에게 엄중한 경고를 받는다. 만약 그가 영국으로 출국하면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1952년 찰리 채플린은 영국으로 갔고 이후 20년 동안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다시 미국을 방문하게 된 것도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 특별상을 수상하기 위해서였지만 역시 미국정부는 단 3일 간의 체류만을 허용한다.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고 걸작을 만들어냈던 찰리 채플린은 자기를 키워준 미국에 의해 다시는 미국으로 입국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보여주었던 영화에서 희극화된 모습과 뛰어난 작품성을 가진 영화들은 오랫동안 그를 좋아하는 영화팬들에게 소중한 보물로 남았다.

그는 희극 속에서 인간의 비극을 이야기했고,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보여주었다. 돈과 기계에 종속되는 세상이 아닌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그는 원했다. 그의 작품들이 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은 그가 당시 보았던 세상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이자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던 찰리 채플린. 그가 활동했던 이후 오랜 시간동안 그를 뛰어넘는 코미디배우가 아직도 없는 것을 보면 진정 얼마나 위대한 배우이자 감독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찰리 채플린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매카시 무비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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