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영화 스틸컷

▲ 바보들의 행진영화 스틸컷ⓒ 하길종


일제가 한국문화에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사전검열이다. 일제강점기 사전검열은 한국 독립운동을 고취할 수 있는 시, 문학, 음악, 무용, 라디오방송, 신문,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종식되면 자유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던 한국문화계는 이후에도 독재정권과 정치인들에 의해 여전히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 때부터 시작된 문화 사전검열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거쳐 군사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도 한국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현재 사전검열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심의등급이란 검열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일제가 남긴 문화 청산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한국 영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영화 사전검열은 1922년 조선총독부가 '흥행 및 흥행물 취체규칙'이란 것을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는 1924년 '활동사진 필름의 검열규칙', 1940년 '조선영화령'을 제정해 영화 사전검열 강도를 높여갔다. 일제 때부터 시작된 영화 사전검열은 이후 이승만 독재정권과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더 심화되었다.

'천재감독' 하길종은 누구?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를 나와 에어프랑스라는 항공사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은 영화였다. 그는 1965년 UCLA 영화과에 입학, 영화학도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는 UCLA유학중 졸업 작품으로 만든 <병사의 제전>으로 MGM영화사가 미국 전체 영화과 학생들 중 4명을 선발하여 수상하는 '메이어 그랜드상'을 받으며 일찌감치 천재성을 보여줬다.

그는 UCLA에서 강사 자리를 보장해 준다는 것도, 할리우드 영화사의 유혹도 뿌리치고 1970년대 초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천재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반공사상 고취를 목적으로 한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됐다. 당시 조금이라도 반공사상에 위배되는 영화들은 사전검열이란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화에 대한 사전검열이 가장 기승을 부린 시기는 1970년대 초반부터 1980년대 말까지였다. 박정희 정권시절 유신헌법 통과 후 한국 영화는 애국심과 반공사상 고취, 정권에 대한 정당성 부여 등을 목적으로 사상 초유의 사전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당시 정권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화들은 사전검열을 통해 아예 상영이 금지되거나 아니면 상당부분 필름이 잘려나간 상태로 개봉을 해야 했다.

197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며 천재감독으로 불린 하길종 역시 이런 시대상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자유가 억압된 불행한 시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야했던 하길종 감독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문화아이콘이자 해방구였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발돋움할 찰라,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으로 짧은 삶을 마감했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길종 감독 사망 30주기를 맞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영화계에 그가 미친 큰 영향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유신시대와 하길종 감독의 영화 이야기

하길종 감독이 활동했던 1970년대는 유신시대였다. 특히 그가 첫 장편영화로 데뷔한 1972년은 유신헌법이 통과되면서 모든 법위에 군림하게 된, 독재정권이 시작된 해이기도하다. 이는 그의 영화인생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암시 같았다.

미국 UCLA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하길종 감독은 70년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비꼰 영화 <화분>(1972년)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영화가 너무 파격적이고 상징적이어서일까. 영화는 관객들의 눈길을 붙잡지 못했고 영화평론가들과 대중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묻히고 만다.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들은 "난해와 미완성의 극치"라는 최악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화분>은 당국의 사전검열을 거치면서 영화 상당 부분이 가위질 당해 하길종 감독이 원하는 만큼의 작품이 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

하길종 감독은 첫 데뷔작의 실패를 계기로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전문학교가 된 서울예술대학에 영화과를 창설해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힘을 기울였다.

비록 <화분>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데 실패했지만 하길종 감독의 영화가 어떤 것인지 그 기준점을 잡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이란 평가도 가능하다. 이 작품을 통해 영화평론가들과 설전을 벌였던 하길종 감독은 단숨에 한국영화계의 이슈메이커로 떠올랐다.

그가 다시 영화를 통해 관객들 곁으로 돌아오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4년 <수절>을 통해 그는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철저한 당국의 사전검열에 걸려 엄청난 가위질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전검열을 통해 20여분 이상 잘려나가면서, 극장에 걸렸을 때는 96분짜리 영화가 되고 말았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길종 감독이 하고자했던 이야기들은 대부분 가위질 당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어져온 사전검열이 어떤 것인지 하길종 감독 스스로 처절하게 느꼈을 법하다. 비록 많은 부분이 잘려나갔지만 이 작품은 하길종 감독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있었기에 1975년, 한국영화 역사상 걸작 중 한 편으로 불리는 <바보들의 행진>이 나올 수 있었다.

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하길종'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바보들의 행진> 포스터ⓒ 하길종

1975년 큰 흥행성공을 거두었던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 감독이 왜 천재인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당국의 사전검열을 피하지 못했다. 영화의 많은 부분이 가위질 당해 105분짜리로 극장 개봉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더 아쉬운 것은 잘려나간 필름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한국 영화 걸작 중 한 편인 <바보들이 행진>을 완전한 감독판으로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오래된 영화도 DVD작업을 통해 감독이 의도했던 대로 다시 나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너무 아쉬운 일이다.

<바보들의 행진>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작품은 소설가로 유명한 최인호씨의 작품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는 암울한 시대, 더 이상 탈출구가 없는 평범한 대학생을 전면에 내세워 탁월한 드라마 구조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 역시 당국의 사전검열을 피하지 못하고 상당부분 가위질 당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작품으로 탄생한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당시 데모와 휴교로 무기력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는 대학생 병태와 영철이다. 1970년대 중반 어느 대학교를 가든지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무기력하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자신들의 꿈과 현실을 조화시키며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다.

<바보들의 행진>은 청춘물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상을 잘 살려놓았다. 장발 단속을 하는 경찰들과 유신헌법 발효이래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는 딱딱한 한국사회의 모습, 언제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영화 전반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암울한 사회상을 표현했음에도 가위질 끝에 개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작품이 청춘물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에는 대학생들에게 데모가로도 유명한 '왜 불러', '고래사냥'이 영화음악으로 삽입되어있다. 이 두 곡은 <바보들의 행진>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화였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노래들이다. 하지만 이 노래들 역시 당시 당국에 의해 금지가요로 묶이고 만다.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 감독을 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만든 영화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시에 하길종 감독에게 고난과 시련을 안겨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 때문에 정보기관에 불러가 철저한 조사를 받고 풀려난다. 앞으로 그가 만드는 작품들에 대해 당국이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보여주는 징조였다.

70년대 후반 상업주의 감독으로 거듭나다


당국의 철저한 사전검열은 하길종 감독 영화에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바보들의 행진>이 큰 성공을 거둔 후 그는 더욱 더 심한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그의 영화가 미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

하길종 감독은 <바보들의 행진> 이후 두 작품은 철저하게 예술영화 위주로 만들었다. 1976년작 <여자를 찾습니다>와 1977년작 <한네의 승천>이 바로 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고 천재감독의 예술성을 보여주는데 머물고 말았다.  이런 암울한 현실 앞에서 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했던 하길종 감독이 선택한 것은 바로 상업영화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유신시절, 하길종 감독은 더 이상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당시 정부는 영화제작사의 숫자마저 정해놨다. 정부 눈 밖에 나면 어떤 영화인도 영화를 제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상황 때문에 하길종 감독 역시 영화감독으로서 상당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그가 선택한 것은 철저한 상업영화 연출이었다.

하길종 감독이 작정하고 상업용 영화로 만든 <속 별들의 고향>(1978년)은 신성일, 장미희가 주연을 맡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속 별들의 고향>은 하길종 감독이 어떤 영화를 연출하든 수준 이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과시한 영화였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이 작품연출에 상당히 망설였다고 한다. 자신이 연출하고 싶어 했던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로서는 상당한 자괴감을 느꼈을만 하다.

<속 별들의 고향> 이후 그는 <병태와 영자>(1979년)를 연출해 연속적으로 큰 흥행성공을 거둔다. 그에게 흥행감독이란 닉네임은 당연한 수순으로 따라 붙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성공도 그에게 큰 가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원했던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강했다. <병태와 영자>(1979년)가 흥행한 이후, 그는 그토록 열망한 자신만의 스타일이 담긴 영화를 연출할 기회를 잡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1979년 그는 고혈압에 의한 뇌졸중으로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1979년은 하 감독을 그토록 옭아매었던 유신시대가 종식되던 해였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갔던 천재감독...

속 별들의 고향 영화 스틸컷(신성일, 장미희)

▲ 속 별들의 고향영화 스틸컷(신성일, 장미희)ⓒ 화천공사


만약 지금 하길종 감독이 태어났다면 그는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참 부질없는 질문 같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천재성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70년대는 암울했던 유신헌법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천재성을 유감없이 영화로 표출해냈다.

당국의 사전검열로 인해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이 무수히 가위질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었다. 만약 가위질을 당하지 않고 그가 만든 모든 작품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평가와 더 큰 찬사를 받았을 것이다. 시대를 대표했던 천재감독이 만들었던 작품이 당국의 가위질로 인해 원형 그대로 보존조차 되지 못한 것은 한국 영화의 아픈 역사라 할 수 있다.

천재였지만 불행한 시대에 활동했던 하길종 감독은 그의 예술혼을 모두 불사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그가 만약 더 오랫동안 활동했더라면 과연 얼마나 더 뛰어난 작품들을 우리 곁에 남겼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길종 감독과 친한 이장호 감독이 8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것을 생각하면 이런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된 사전검열은 우리가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 중 하나다. 독재정권이 들어서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문화 사전검열이다. 지금도 우리 모두 문화 검열에서 해방되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에 대한 판단은 문화를 소비하고 구매하는 소비자 스스로 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래야만 하길종 감독과 같은 피해자가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불운한 시대 자신의 천재성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버린 하길종 감독은 우리 영화 역사의 아픈 생체기다.

마지막으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준비하고 있는 하길종 감독 특별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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