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최동원이 삼성 라이온즈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 앞으로도 뒤로도 야구장에서는 느껴본 적이 없는 어색한 풍경이었다. 하늘색 라이온즈 유니폼은 마치 얻어입은 것처럼 겉돌았고, 최동원이 빠지고도 롯데 자이언츠를 여전히 '롯데 자이언츠'라고 부른다는 사실 또한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해마다 연봉 협상에서 몇십만원 되지도 않는 돈을 놓고 자존심 싸움을 하느라 질려버린 데다가 선수회 결성을 주도하며 미운 털까지 박힌 골칫덩어리를 치워버리고 싶었던 롯데와, 어떻게든 우승을 하려면 최동원 같은 근성과 투지의 에이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삼성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였다.

한국프로야구사상 유일무이한 '한국시리즈 4승 투수' 최동원과 '최초의 100승 투수' 김시진이 맞바꾸어지는 초대형 트레이드는 그렇게 이루어졌고, 두 대투수의 전설도 그 순간 서둘러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야구의 대명사, 최동원

프로 데뷔 전부터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던, 최동원 17이닝 노히트노런과 한 경기 20탈삼진의 고교시절, 일주일간 6경기에 등판에 3승을 쓸어담던 실업시절과 비교하자면, 프로 데뷔무대에서 그의 활약은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 프로 데뷔 전부터 한국야구의 상징이었던, 최동원17이닝 노히트노런과 한 경기 20탈삼진의 고교시절, 일주일간 6경기에 등판에 3승을 쓸어담던 실업시절과 비교하자면, 프로 데뷔무대에서 그의 활약은 팬들의 기대에 한참 못미치는 것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 형이 선린상고에 다닌다든가, 아버지가 군산상고나 경북고 출신이라든가 하는 특별한 축복을 받지 않은 평범한 열 살 안쪽의 아이가 '야구'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첫 번째 이름은 단연 최동원이었다. 축구라면 차범근, 농구라면 신동파나 박찬숙이 그랬듯, 그 이름은 그대로 야구의 대명사였던 것이다. 그 뿐인가?

'한 시간 동안 움직일 수 있는 거리'로서 가늠되는 '시속'이라는 물리학의 속도개념을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꼬마 녀석들이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고, 그 '시속'을 측정할 수 있는 '스피드건'이라는 기계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 수 있었던 것 또한 최동원 때문이었다.

스피드건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최동원의 공을 측정했더니 나왔다더라는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달리는 버스보다 두 배 반이나 빠른 것으로서,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속도'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셨던) '150'이라는 숫자는, 또한 신동파의 50득점(3점 슛이 없던 시절의 기록), 차범근의 98골, 장훈의 3000안타와 별다를 것 없이 현실감 없는 경지의 이미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대단하다는 최동원이 프로무대에 나타났던 1983년, 동네 아저씨들은 이미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고, '한 오륙 년 전에 프로가 생겼으면 한 몫 했을'거라고 혀를 찼다. 지금 따져보면 208.2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대활약이었음에도, 사람들은 이기는 경기(9승)보다 지는 경기(16패)가 훨씬 많은데다가 427.1이닝을 던졌던 재일교포 퇴물투수 장명부의 절반만큼도 못 던지는 '유리어깨'로 전락한 최동원을 용납하지 못했다.

하기야 경북고와 선린상고를 상대로 이틀 연속 등판해 17이닝동안 노히트노런을 이어가고 군산상고를 상대로 20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던 경남고 시절, 그리고 일주일동안 여섯 경기에 등판해 3승을 따내며 '코리안시리즈'를 석권했던 실업야구 롯데 시절의 '완벽투'에 대한 기억과 마주 세우자면 초라할 수밖에 없는 기록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미 오륙년 전쯤 지나가버렸다는 그의 전성기에 대한 궁금증만이 쌓여가기 시작할 무렵, 그는 제대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그 전설적인 84년의 대폭발을 보여주었다.

서른 한 번의 승리, 1984년

1984년, 한국시리즈 MVP 1,3,5,7차전 완투(3승 1패)와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글 몇 줄 만으로도 읽는 이의 숨이 턱턱 차오르게 만드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 1984년, 한국시리즈 MVP1,3,5,7차전 완투(3승 1패)와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은 글 몇 줄 만으로도 읽는 이의 숨이 턱턱 차오르게 만드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롯데 자이언츠

한국 프로야구사상 '한 시즌 최다승 투수'로 기록되어있는 것은 1983년에 30승을 올린 장명부다. 그러나 말 그대로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승리를 기록한' 투수는 정규시즌의 27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린 1984년의 최동원이었다.

원년 에이스 노상수의 군입대, 그리고 부산의 기대주 양상문·윤학길의 아마추어 잔류로 마운드가 텅 비게 되면서 3년째 하위권 탈출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던 1984년의 롯데 자이언츠가 한국시리즈 우승컵까지 품에 안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드라마였고 기적이었다.

최동원이 1·3·5·7차전 완투(3승 1패)와 6차전 구원승(5이닝 무실점)으로 홀로 우승을 이끌었던 그 해의 한국시리즈야 워낙 널리 알려진 사건이니, 새삼 다시 회상하기도 민망하다. (그래도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지난 해 8월 <주간동아>에 기고했던 글 "뜨고 진 그라운드의 별들, 아직도 내 가슴에…" 를 참고해주시기 바란다.)

그러나 임호균을 필두로 배경환·안창완 같은 투수들이 앞서나가기 시작한 경기를 최동원에게 넘겨주는 순간까지 버텨내기 위해 120%의 능력을 짜내 안간힘을 써대고도 5회 이전이라도 마운드를 내려와 성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던 것도, 1할 타자 유두열이 끝내 희망을 놓지 않고 김일융의 지친 호흡을 노려 한국시리즈 7차전 역전 결승홈런을 만들어낸 것도, 매번 24시간도 채 못 되는 휴식시간을 마친 최동원이 어깨 붕붕 돌리며 나타나 마지막 저항을 소탕하고 숨 가쁜 1승을 만들어 주리라는 진땀나는 믿음 덕분이었다는 말만은 덧붙여두고 싶다.

두 번째로 위대한, 그러나 가장 사랑받는 투수

최동원과 임호균 부산야구의 상징 최동원과 인천야구의 상징 임호균, 그들은 84년 롯데가 일군 기적의 주연과 조연이었다.

▲ 최동원과 임호균부산야구의 상징 최동원과 인천야구의 상징 임호균, 그들은 84년 롯데가 일군 기적의 주연과 조연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그렇게 최동원은 부실한 팀을 한 어깨로 끌고 나가는 선봉장이었고, 무수한 공백을 한 몸으로 막아내는 수문장이었기에, 그에게 '에이스'를 넘어 '수퍼 에이스'라는 찬사가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3구 삼진을 노리는, 그리고 홈런을 맞은 다음 타석에서는 다시 한 번 똑같은 코스로 더 강한 공을 던져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던 그는 고작 '수퍼 에이스'라는 이름이 주는 든든함과 단단함에 머물지 않는 매력을 가진 투수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투수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항상 한 호흡 멈칫하게 된다. 선동열과 최동원이라는 이름 두 개가 동시에 튀어나와 같은 극의 자석처럼 부대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프로야구의 시대로 한정 짓자면, 한국에서 선동열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투수는 최동원을 포함해 아무도 없다. 다승으로든 평균자책점으로든. 그리고 선발투수로든 마무리투수로든, 그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압도적으로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 가장 절박한 순간의 마운드를 놓고 고민해본다면, 나 역시 최선의 선택은 최동원이 아니라 선동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 박살을 내고 가루를 만들어버리든, 하얀 재가 되어 사라지든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신념과 자존심의 승부라면, 어제 경기에서 15이닝쯤 완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해 주저앉아 있을망정 다시 한 번 최동원을 불러내 함께 몸을 던져보고도 싶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전형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지만, 걸어야 할 것을 걸고 노려야 할 것을 노려 확실하고 깔끔하게 완전연소시켜버리는 처절한 승부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선동열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 조금 더 소모된 어깨, 그리고 훨씬 허약한 전력의 팀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 뛰었던 선수였고, 그런 이유로 수많은 팬들의 애틋함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지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게 좀 더 어린 나이, 싱싱한 어깨, 강한 팀이 주어졌다고 해서 선동열보다 나은 성적을 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아니, 그런 상상 자체가 구차스럽다.

홈런을 맞으면, 더 호쾌하게 웃으며 날을 세우던 투수, 최동원 그는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삼구삼진을 노리며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다.

▲ 홈런을 맞으면, 더 호쾌하게 웃으며 날을 세우던 투수, 최동원그는 연속홈런을 두려워하지 않고, 상대 타자가 뻔히 알고 기다리는 길목으로 승부구를 우겨넣어 삼구삼진을 노리며 오기와 배짱을 겨루는 격렬한 승부사였다.ⓒ 롯데 자이언츠


그러나 만일 그에게 좀더 강한 팀이 허락되었고, 든든하게 뒤를 맡아줄 파트너가 주어졌다면, 그는 좀 더 날카롭고 강하게 질주하는 '수퍼 돌격대장'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고, 분명히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가파른 기념비 몇 개를 더 세워두는 선수가 되었을 것이다.

냉정하게 한 명의 이름만 말하자면 최동원은 '사상 최고'가 아니다. 그리고 화려했던 한 순간을 지낸 뒤로는, 그리 빛나는 길만을 걸어온 이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 프로야구사상 가장 깊고 애틋한 사랑을 받는 투수임에는 틀림없다.

마치 마지막 장면 정지화면의 콩볶는 듯한 총성 속으로 돌진하던 <정무문>의 이소룡, 혹은 <내일을 향해 쏴라>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폴 뉴먼처럼, 길고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이름은 그대로 한국야구의 상징이고 드라마이며 추억이다.

앞으로 그가 다시 무엇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든 상관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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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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