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의 사진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 오드리 헵번의 사진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 audreyhepburn.com


항상 첫 번째가 제일 중요하다. 모든 일은 처음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에서 '추억과 함께한 영화인물' 연재기사를 시작하면서 과연 어떤 인물을 뽑아야할지 적잖은 고민을 했다. 한참동안 생각을 거듭하다 한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이 인물이라면 연재기사의 처음 시작을 열어주기에 부족함 없는 배우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그녀의 이미지는 연말과 너무 잘 어울린다.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은막의 스타에서 자신의 마지막 삶을 헐벗고 굶주린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우리 곁을 떠난 오드리 헵번이 첫 연재기사를 장식하는 배우다.

최근 모 통신회사에서 그녀의 멋진 블랙 의상과 함께 그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도도한 모습을 담은 광고를 선보였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오드리 헵번의 작품은 지금도 영화채널 혹은 케이블TV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대한 은막의 스타이자 진정 이웃을 사랑한 한 인간으로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를 상징하는 대배우로 마음속에 살아 있다.

오드리 헵번은 아일랜드계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명문귀족 가문 어머니 사이에서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유년 시절은 유복한 편이었다. 하지만 세계2차 대전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부모가 이혼한다. 이혼 후 명문귀족 출신이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와 함께 네덜란드 아른헴 지역으로 휴양을 간다.

하지만 나치가 아른헴을 점령하면서 그녀는 10대 때 전쟁의 지독한 공포와 굶주림을 겪어야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네덜란드 명문귀족 출신이기는 했지만 원뿌리는 폴란드인이었기 때문에 더 큰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세계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그녀는 런던 발레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녀는 발레에 소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큰 키가 발레리나로서 삶에 장애가 된다. 그녀는 그 당시로는 상당한 장신에 속하는 170cm였다. 어쩔 수 없이 발레리나의 꿈을 포기한 그녀는 자신의 키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그녀는 런던에 온 후 틈틈이 해오던 모델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녀의 모델 생활은 영화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계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택이었다. 만약 그녀가 런던에서 모델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로마의 휴일>(1953년)을 통해 혜성 같이 나타난 그녀를 만나지 못했을 수 있다.

인생 제1막의 시작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모델 오드리 헵번

▲ 오드리 헵번 모델 오드리 헵번 ⓒ Antony Beauchamp


오드리 헵번은 1948년 단역으로 영화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영화계에서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오던 그녀는 1951년 헨리 카스(Henry Cass) 감독이 연출한 <Young Wives Tale>란 작품을 통해 단역이 아닌 조연으로 출연하지만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 배우였다. 여배우에게 있어 3년이란 무명 시간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지지>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행운을 잡게 된다. 당시 <지지>를 관람했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눈에 띄게 된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1926년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미국에서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감독이었다. 특히 한국 영화팬들에게도 유명한 <벤허>(1959년)를 연출한 감독이다. 그는 1952년 <캐리>를 연출한 이후 차기작 여주인공을 찾는데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지>에서 주연으로 출연한 오드리 헵번이 눈에 띈 것이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오드리 헵번에게 자신의 다음 작품 주연 오디션을 볼 것을 권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멜로영화의 영원한 명작 <로마의 휴일>(1953년)이다. 이 작품은 그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연기한 앤 공주는 오드리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만큼 열광적인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첫 주연 데뷔작이나 다름없는 <로마의 휴일>을 통해 그녀는 평생에 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게 된다. 완벽한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녀가 보여준 패션 감각은 당시 수많은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녀가 모델 활동을 통해 얻은 뛰어난 패션 감각이 이 영화에서 큰 힘이 되었다. 그녀의 연기 인생에 있어 <로마의 휴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특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단숨에 최고의 여배우로 발돋움 하게 된다.

<로마의 휴일>을 통해 완벽한 신데렐라로 등장한 그녀는 차기작에서 <카사블랑카>(1942년)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와 <사브리나>에서 공연하게 된다. <사브리나>는 상업적으로 엄청난 대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이런 성공에 힘입어 세계적인 여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로마의 휴일> 성공이 절대 우연이 아님을 <사브리나>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특히 <사브리나>는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성을 만든 작품이라 불릴 만큼 이후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사브리나>가 얼마나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인지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그녀는 이후 <전쟁과 평화>(1956년), <하오의 연정>(1957년), <화니 페이스>(1957년) 등을 통해 계속 자신의 인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대부분 청순하면서 순진한 역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그녀 연기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작품 <파계>는 1959년에 나왔다.

<파계>는 오드리 헵번이 단지 청순함과 순진함뿐만 아니라 기품 있는 배우임을 보여준 작품이다. 단순히  자신의 이미지만으로 승부하는 배우가 아닌 연기가 뒷받침되는 배우임을 증명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기품 있는 수녀 역을 맡아 열연했다.

<파계>는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못지않은 많은 상을 안겼다. 제25회 뉴욕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제7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제13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그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년)을 통해 멜로 영화의 절대 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1964년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최초로 출연료 100만 달러가 넘는 배우가 된다. 당시 100만 달러 출연료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후 1967년 <언제나 둘이서>까지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1967년 이후 <로빈과 마리안>이 나오는 1976년까지 그녀는 배우로서 활동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그녀가 출연했던 마지막 작품은 1989년 특별 출연한 <영혼은 그대 곁에>다.

영화배우로 승승장구하던 그녀의 결혼 생활은 영화처럼 순탄치는 못했다. 1954년 <전쟁과 평화>에서 함께 공연한 멜 펠러와 결혼하지만 1968년 이혼한다. 멜 펠러 사이에 아들 쇼를 두었다. 그리고 1970년 자신의 열혈한 팬인 정신과 의사 이태리인 안드레아 도티와 다시 결혼하지만 1979년 이혼하게 된다. 안드레아 도티 사이에 역시 아들 루카를 두었다. 이후 그녀는 1993년 자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간다.

인생 제2막의 시작 휴머니스트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봉사 활동 당시

▲ 오드리 헵번 봉사 활동 당시 ⓒ audreyhepburn


오드리 헵번이 단지 은막의 스타로 자신의 삶을 마쳤다면 지금과 같은 찬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삶을 소외받는 이웃, 특히 지구촌에서 가장 극빈국이 많은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보낸다.

그녀의 이런 삶은 많은 지구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준다. 만약 그녀가 단지 일회성 이벤트로 이런 일을 했다면 이렇게 큰 감동과 호응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1988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선행은 그녀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녀의 홈페이지 오드리헵번닷컴(http://www.audreyhepburn.com)을 통해 The Audrey hepburn Children''s Fund로 이어지고 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 고통 받는 사람들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게 된 계기는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이디오피아, 수단, 베트남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특히 그녀는 아프리카 방문을 통해 굶주린 아이들의 실상을 보고 자신을 많이 책망했다.

조금만 더 빨리 이 같은 실상을 알고 일을 시작했다면 훨씬 많은 굶주린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이 아닌 휴머니스트 오드리 헵번의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진짜 아름다움은 그녀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빛을 발했다.

전세계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쉬지 않고 다니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수많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은 그녀가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청순미를 뽐내던 모습이 아니다.

세월은 오드리 헵번도 비껴가지 못했다.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눈가의 주름과 세월에 변해버린 오드리 헵번이 있다. 하지만 어느 누가 아이들과 해맑게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름답지 않다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밝은 웃음과 진정성 있는 행동이다. 그녀는 식사량을 줄이면서까지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오랜 시간 같이 생활했다. 그녀의 행동은 진정성 없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 지구촌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행동에 고결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우리는 일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스타들이 자신의 나쁜 행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회용 이벤트성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 그들의 봉사활동에서 고결함과 진정성을 느껴본 적이 있던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물음에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녀가 보여준 고결한 행동은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담겨져 있었기에 모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봉사활동에 매진하던 오드리 헵번은 1992년 9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한 후 대장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급히 수술을 했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93년 1월 20일 스위스에서 63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다.

12월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달이자 주위의 힘든 이웃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달이다. 자신의 말년을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세상을 떠난 오드리 헵번은 귀감이 될 만한 배우이다. 말로 이웃을 사랑하고 돕는 것은 쉽지만 오드리 헵번처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첫 연재 기사 주인공으로 오드리 헵번을 소개한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진정으로 힘든 이웃과 사랑을 나누며 살았던 여배우다. 이 기사의 마지막은 오드리 헵번이 죽기 일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 자식들에게 보낸 글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 되어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오드리 헵번 추억의 배우 무비조이 MOVIE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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