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의 사랑을 받는 이에게 찬사 한 마디를 얹는 것도 진부하지만, 온 세상이 애써 외면하는 이를 함께 스쳐지나가는 것도 개운치 않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은퇴식도 없이, 화려한 헌사나 따뜻한 박수도 없이, 아니 숱한 비난과 조롱 속에서 쓸쓸히 물러난 그이지만, 진심을 말하자면 '에이스'라는 단어를 만날 때, 돌핀스 팬이었던 내 머리에 선동열과 최동원에 앞서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민태. 20세기 마지막 20승. 선발 21연승. 최초의 연봉 7억 선수.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적료로만 5억엔을 베팅하게 했던 선수. 그러나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돈'과 '먹튀'와 '배신'으로 이어지는 온갖 서글픈 그림자들뿐이다.

사상 최고의 데뷔전

좌대성 우민태 90년대 초, 한양대 선후배인 '좌대성 우민태'는 그대로 국가대표팀의 양날개였고,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프로야구의 양날개를 이루었다.

▲ 좌대성 우민태90년대 초, 한양대 선후배인 '좌대성 우민태'는 그대로 국가대표팀의 양날개였고,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프로야구의 양날개를 이루었다.ⓒ 한국야구위원회

1991년을 5위로 마무리한 태평양 돌핀스의 팬들은 새삼 희망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벌써 3년째 '탈꼴찌 경쟁'에서 멀리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고무적이었지만, 1983년의 임호균 이후 최고의 신인이 입단했기 때문이다.

1990년 캐나다에서 열린 제 31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미국·대만·니카라과를 연파하며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경쟁적인 스카우트 표적이 되어 화제를 뿌렸던, 그 해 아마야구 MVP로도 선정되었던 국가대표 에이스 정민태 말이다.

부상에서 돌아올 89년 신화의 3인방 박정현·최창호·정명원과 함께 그가 마운드의 중심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김경기와 김동기를 중심으로 '썩어도 준치' 김재박을 영입함으로써 안정되어가던 타선과 내야진과 함께 본격적인 강팀의 대열에 들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가난한 구단 태평양이 그에게 85년 선동열(1억3천8백), 90년 박동희(1억4천)을 넘어서는 역대 신인 최고의 계약금인 1억 6천만원을 안겨주며 잡았던 것도 그런 기대를 담은 것이었다.

물론 프로무대에서 그의 출발이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그 겨울, 입단소식을 알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병역비리'라는 낯선 뉴스의 중심에서 연일 TV 화면과 신문 지면을 장식해야 했고, 결국 무려 65일 동안이나 구치소에 수감되며 동계훈련기간을 통째로 까먹어 버리는 불운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 데뷔전을 치른 1992년 4월 22일, 태평양 팬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최고 구속 147㎞. 아직 쌀쌀한 초봄, 채 만들어지지 않은 몸에 흐뜨러진 투구폼에도 불구하고 그가 찍어대던 구속은 당시 한국 프로무대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숫자들이었다. 그리고 쌍방울 레이더스의 1·2·3·4번으로 나선 김호·조용호·이승희, 김기태는 파울팁 하나 만들지 못한 채 허수아비가 되어 순식간에 삼진 네 개를 헌납하고 돌아섰다. 공에 배트를 건드려보기라도 했던 것은 5번 타자 김만후의 2루 땅볼이 처음이었고, 정민태가 데뷔 이후 던진 23개째 공이었다.

결국 단조로운 직구 위주의 피칭 때문에 5회와 7회 두 점을 내주며 첫 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6.1이닝 동안 2안타 2실점, 그리고 9개의 탈삼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팬들이 희망을 넘어 흥분을 품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개막 후 7연승을 달리던 팀의 기세에 더해 본격적으로 정민태가 선발 로테이션에 가담한다면, 우승도 문제될 게 없어 보였다.

태평양 시절  삼진, 삼진, 삼진, 삼진.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 데뷔전을 치른 1992년 4월 22일, 태평양 팬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 태평양 시절 삼진, 삼진, 삼진, 삼진. 우여곡절 끝에 돌아와 데뷔전을 치른 1992년 4월 22일, 태평양 팬들은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을 느낄 수 있었다.ⓒ 태평양 돌핀스 팬북

그러나 5월 들어서면서, 그 모든 화려한 꿈은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리기 시작했다. 초반 연승의 주역 정명원과 최창호가 부상으로 이탈했고, 개막후 12경기 연속안타행진을 벌이던 이적생 김재박이 무안타행진을 시작했으며, 시범경기 홈런왕 김홍기가 변화구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는 사실을 노출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민태의 팔꿈치 인대 일부가 끊어졌고, 수술대에 올라야 한다는 소식이 비보 릴레이의 마침표를 찍어놓았다. 

정민태는 그 해의 남은 시즌과 그 이듬해를 거의 통째로 쉬었고, 팀은 6위로, 다시 꼴찌로 밀려나갔다. 그 두 해 동안,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더 이상 어느 야구팀을 좋아하느냐고 묻지 않았고, 좋아하는 야구팀이 어디냐고 물어오는 이에게는 야구를 보지 않는다고 답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최고'라던 김상기도, 김경기도, 정민태도, 김재박도, 들어오기만 하면 고장이 나거나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는 불모지 같은 팀이 인천팀이란 말인가, 하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94년, 돌핀스와 함께 부활하다

그러나 1994년, 돌핀스는 부활했고 세상은 다르게 보였다. 92년과 93년에 앞다투어 병원으로 실려나갔던 투수들이 나란히 그라운드에 복귀했다. 김홍집·최창호·최상덕·안병원 네 명의 선발투수가 10승 이상을 올렸으며, 마무리 정명원이 사상 최초로 40세이브를 돌파했다. 그리고 그 해, 정민태도 본격적으로 부상에서 탈출해 한 해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145.1이닝을 던졌다. 성적은 여전히 기대에 많이 부족한 8승에 불과했지만, 구위는 팀 내 최고로 평가받았고 평균자책점도 3.72로 준수했다. 

여전히 팀타율 꼴찌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 해의 돌핀스는 순전히 투수들의 힘으로 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역사를 썼다. 하지만, 투타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LG 트윈스의 벽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던 것은, 1차전 연장 10회 말 김선진에게 끝내기홈런을 맞기까지 141구를 던졌던 김홍집과 함께, 3차전 선발 정민태였다.

그날 정민태의 투구는 역사상 최고의 것이었다, 는 것이 나의 극히 주관적이고 근거 없는 믿음이다. 완벽한 상하체의 중심이동에 따라 마치 낚시줄처럼, 혹은 채찍처럼 휘었다가 뿌려지며 무릎과 허리와 어깨와 팔꿈치와 손목의 힘에 더해 원심력과 정신력까지 극한으로 끌어올려 싣고 파고드는 듯했던 좌우상하 구석구석의 송곳보다도 날카롭던 직구. 직구. 직구.

그의 공에 트윈스의 강타선은 5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한 채 더그아웃과 타석 사이를 맴돌았다. 반대로 기세가 오른 돌핀스 타선은 4회말 윤덕규로부터 김경기, 김동기, 염경엽으로 이어진 연속안타로 트윈스 선발 김태원과 차동철을 두들기며 4점을 선취해냈다. 1차전의 피말리는 격전에도 내지 않고 아껴두었던 구원왕 정명원의 존재까지 생각한다면, 경기는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마지막 유니폼 영욕을 함께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었고,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몸살을 제일 앞에서 앓으며 방출과 숨바꼭질, 인천팀 복귀설에 이은 기아 전격입단과 또다시 전격적인 은퇴선언과 코치로서 히어로즈 복귀까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눈물을 보이고, 팬들 앞에 사죄하며 이해를 구하고,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과정을 되밟았다

▲ 그의 마지막 유니폼영욕을 함께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었고,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몸살을 제일 앞에서 앓으며 방출과 숨바꼭질, 인천팀 복귀설에 이은 기아 전격입단과 또다시 전격적인 은퇴선언과 코치로서 히어로즈 복귀까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눈물을 보이고, 팬들 앞에 사죄하며 이해를 구하고,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과정을 되밟았다ⓒ 기아 타이거즈

그러나 6회초 선두 대타로 나선 김영직의 노련한 노려치기 안타, 그리고 2사후 대면한 김재현에게, 그 후로 십수년간 금지구역으로 통하게 되는 몸쪽 직구를 던지다가 허용한 우중월 2루타로 한 점을 주고 일찌감치 마운드를 정명원에게 넘긴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충분한 휴식마저 취하고 나온 구원왕 정명원은 곧장 서용빈에게 적시타를 내주며 한 점을 더 내준데 이어, 7회초 다시 김영직과 유지현에게 적시타를 맞고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는 4연패로 마감했고, 그 다음 시즌을 끝으로 팀이 현대에 매각되면서 태평양의 돌풍도 소멸되었다. 그렇지만 9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의 호투는, 마치 2007년 한국시리즈 4차전의 김광현이 2008년 페넌트레이스 MVP 김광현을 예상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정민태가 그대로 흘러가버릴 투수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 첫 해부터 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9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계기로 완전히 깨어나기 시작한 정민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은 정민태의 전성기였고, 현대 유니콘스의 황금기였다. 정민태는 가운데로 던져도 못 때린다는 직구와 함께 반포크볼, 그리고 시속 100km도 안되는 초슬로커브까지 장착해 리그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 다섯 해 동안 정민태는 해마다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평균 213.3이닝) 3점대 초반 이하의 평균자책점(평균 2.92)으로 13승 이상(평균16.6승)을 올렸고 100개 이상의 삼진(평균 155.2개)을 잡아냈다. 그리고 팀은 두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을 했다.

에이스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

퍼펙트게임을 할 수 있는 투수보다는 연패를 끊어줄 수 있는 투수가 에이스이며, 강점이 많은 투수보다는 약점이 가장 적은 투수가 에이스다. 그래서 아직 16승 투수 김광현보다는 12승 투수 손민한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에이스이기도 한 것이다.

정민태는 강점이 많은 투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약점이 적은 투수였고, 꼭 이겨야 할 경기를 이기는 투수였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느 만큼 버텨주는 투수였다. 그런 점에서, 선동열과 최동원보다 더 뛰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때나마 그들 못지않은 에이스였다고는 충분히 할 만한 투수였다.

해태를 제외하고 '왕조'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팀이 현대였다고는 하지만, 네 차례 현대의 우승은 매번 힘겨웠다. 해태나 LG가 그랬듯 4연승으로 시리즈를 휩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한 번(1998년)은 6차전, 두 번(2000년, 2003년)은 7차전, 또 한 번(2004)은 무려 9차전까지 가서야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팀보다도 에이스의 역할이 컸던 팀이었고, 그 에이스를 논하면서 정민태를 빼놓을 수는 없다.

1·4차전에 각각 8이닝씩을 무실점과 1실점으로 막은 데 이어 6차전 마무리로 인천야구 첫 우승의 순간을 만들어낸 1998년, 그리고 1·4차전에 이어 완봉으로 버틴 7차전까지 선발 3승을 따낸 2003년. 네 번에 걸친 팀의 우승 중 두 번을 마운드에서 맞이하고 MVP시상대까지 올라선 정민태는 어떤 이유로도 깎아내려질 수 없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대한민국 에이스였다.

그러나 2001년부터 2년간 일본무대에서 고작 1승만을 기록한 채 돌아온 2003년은, 그에게 차라리 없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를 '마지막 절정기'가 되고 말았다. 그 해 그는 곧바로 17승 2패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다승왕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고, 족쇄가 되었다. 그 해 시작된 허리부상이 악화되며 이듬해 7승, 그리고 그 이후 4시즌 동안 무승10패의 악몽이 시작되었고, 그 해 공로로 7억천만원까지 치솟았다가 해마다 깎이고 깎여도 리그 선두권으로 이름을 올려놓던 연봉은 그대로 '먹튀'라는 이름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보면, "일본에서는 2년간 1승에 불과했던 투수가 복귀하자마자 17승을 올리며 한국야구의 위상을 추락시켰다"는 감정적인 비난마저 감수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2003년의 영광 한편에서 잉태된 칼끝은 너무 날카로웠다.

에이스의 퇴장

현대왕조의 주역, 에이스 정민태 우승의 순간을 만들어낸 1998년, 그리고 1,4차전에 이어 완봉으로 버틴 7차전까지 선발 3승을 따낸 2003년. 네 번에 걸친 팀의 우승 중 두 번을 마운드에서 맞이하고 MVP시상대까지 올라선 정민태는 어떤 이유로도 깎아내려질 수 없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대한민국 에이스였다.

▲ 현대왕조의 주역, 에이스 정민태우승의 순간을 만들어낸 1998년, 그리고 1,4차전에 이어 완봉으로 버틴 7차전까지 선발 3승을 따낸 2003년. 네 번에 걸친 팀의 우승 중 두 번을 마운드에서 맞이하고 MVP시상대까지 올라선 정민태는 어떤 이유로도 깎아내려질 수 없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대한민국 에이스였다.ⓒ 현대 유니콘스


결국, 정민태는 은퇴했다. 그의 통산 승수는 2004년에 도달한 124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고, 통산평균자책점은 조금 올라갔으며, 그의 명성은 모질게 망가졌다. 그와 영욕을 함께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었고,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몸살을 제일 앞에서 앓으며 방출과 숨바꼭질, 인천팀 복귀설에 이은 기아 전격 입단과 또다시 전격적 은퇴선언과 코치로서 히어로즈 복귀까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들을 피해다니고, 눈물을 보이고, 팬들 앞에 사죄하며 이해를 구하고,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과정을 되밟았다.

어쩌면 말 그대로 부족한 자기관리, 부족한 신의, 넘치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화려했던 선수경력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고 미숙했던 언론을 상대하는 요령과 지나치게 솔직하고 감상적이었던 성격 때문이었다고 보아줄 수도 있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든, 이제 또 다가오고 지나갈 세월 속에 새록새록 곱씹어질 그의 업보다.

한 명의 에이스를 떠나보낼 때마다 참 숙연해진다. 그가 던져온 영광의 순간마다 가로질러 내 삶에도 새겨진 기쁨과 슬픔과 환희와 절망, 그것이 또 한 페이지 뒤로 훌쩍 넘겨져 추억의 공간으로 던져짐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민태를 보내면서 느껴지는 것은 조금 더 뒷맛이 쓰다. 영광의 세월에 대한 기억에 앞서,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어보려 했던 다섯 해의 세월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고, 그런 발버둥 끝에 결국 마침표 없는 답안지를 세월 앞에 던져야 했던 그의 선수생활이 아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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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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