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이 경기 중반에 대주자나 대수비로 등장하는 모습은, 오래된 야구팬들로 하여금 묘한 감상에 잠기게 한다. 한 때 그는 전설의 강팀 해태 타이거즈에서도 "공격력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을 들은 선수였기 때문이다.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왕조시대였던 90년대 중반 그가 팀의 붙박이 1번타자였던 것은 단지 출루율이 좋고 발이 빠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를 단 한번이라도 더 경기장에 내보내는 것이 승리의 공식이었기 때문이다.

이종범이라는 선수에 대해 '해마다 2할대 언저리를 맴도는 타격과 엉성한 수비력에도 불구하고 외야의 한 자리를 차지한 채 유망주들의 앞길을 막는 선수'라고만 생각하는 어린 팬들을 보는 것도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그가 한때 3할은 너끈히 쳤던, 그리고 수비범위가 넓고 송구도 좋았던 외야수'였다고 새겨주는 이들을 만나면 더 답답해진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90년대의 이종범은, 야수로 한정하자면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완벽했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완벽했던 야수

이종범 선수의 타격모습 3할 이상의 타율, 20개 이상의 홈런, 50개 이상의 도루. 그리고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 수비능력. 그 네 가지를 동시에, 그리고 넘치게 충족시켰던 것은 최소한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만 한정짓자면, 이종범 외에는 그 앞으로도 뒤로도 없었다.

▲ 이종범 선수의 타격모습 3할 이상의 타율, 20개 이상의 홈런, 50개 이상의 도루. 그리고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 수비능력. 그 네 가지를 동시에, 그리고 넘치게 충족시켰던 것은 최소한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만 한정짓자면, 이종범 외에는 그 앞으로도 뒤로도 없었다. ⓒ KIA 타이거즈

'전설의 1번 타자'답게, 통산기록에서 그의 이름이 가장 높이 자리하는 부문은 도루다. 548개를 기록하며 아직도 달리고 있는 전준호에 이어 494개로 2위. 2년 늦은 데뷔와 3년간의 일본생활을 생각하면 아깝기도 하지만, 여전히 한 시즌 최다도루 기록인 84개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전준호를 비롯해 2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들 중 유일하게 성공률 8할을 넘어선 것이 이종범이라는 점을 덧붙여 놓는다면(통산 도루성공률 .821) '도루의 1인자'라는 표현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종범을 전준호·정수근 같은 전형적인 1번 타자들과 단순히 비교할 수 없게 하는 것은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타격 능력과 타점 생산능력 때문이다. 원년 백인천을 제외하고 4할 타율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393의 시즌 타율기록과 아직 깨지지 않고 있는 196개의 시즌 최다 안타기록, 삼진보다 100개 이상 많은 4사구.

비록 최근 3년간 1할대와 2할대를 오가며 까먹고도 3할을 웃돌며 역대 8위에 올라있는 그의 통산 타율(.302)과 600점이 넘는 타점(637), 그것은 여느 붙박이 중심타자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통산기록이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가지고 있던 홈런타자의 면모다. 그가 97년에 두 개가 모자라긴 했지만, 시즌 막판까지 이승엽과 끈질기게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30개의 홈런을 날린 적이 있을 만큼 강한 타자였음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의 통산홈런은 181개에 달하며, 그의 이름은 통산홈런 순위에서 한대화, 심재학, 김성래, 김경기 같은 내로라하는 홈런타자들의 이름보다도 훌쩍 높은 곳에 걸려있다. (통산 18위)

거기에 더해, 지금에야 유연성이 떨어졌다는 둥 정면 타구에 오히려 실책이 많았다는 둥 흠을 잡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그저 야구장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소름 끼치고 가슴 뛰게 하는 묘기 자체였던 수비. 더 세밀하게 흠을 찾아낼수록 날카로운 비평이 된다고 하더라도, 김재박·유중일·박진만을 제외한다면 누구와의 비교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이종범의 유격수 수비능력이었음을 부정할 이들은 많지 않다.

3할 이상의 타율, 20개 이상의 홈런, 50개 이상의 도루. 그리고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 수비능력. 그 중의 한 가지만이라도 꾸준히 기록해줄 수 있는 선수라면 충분히 톱 클래스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네 가지를 동시에, 그리고 넘치게 충족시켰던 것은 최소한 프로야구 출범 이후로만 한정짓자면, 이종범 외에는 그 앞으로도 뒤로도 없었다. 

정상에 오른 '야구 천재'의 선택, 일본행

해태 왕조의 주역 데뷔 첫 해인 93년에는 7도루로, 일본진출 전해인 97년에는 3홈런으로 각각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기도 했다.

▲ 해태 왕조의 주역 데뷔 첫 해인 93년에는 7도루로, 일본진출 전해인 97년에는 3홈런으로 각각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기도 했다. ⓒ KIA 타이거즈

백인천이나 이만수는 최소한 발이라도 느렸고, 장효조도 최소한 수비 하나만큼은 어디 내놓을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야수 중에서 동시대 선수들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 존재했던 야구선수를 하나 꼽자면 단연 이종범이 되는 것이다. 마치 투수로서 선동열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이유로 이상훈과 최향남의 미국무대 진출과, 선동열과 이종범의 일본 진출은 다르게 이해해야 할 일이다. 이상훈과 최향남이 보다 큰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열정과 도전이었다면, 선동열과 이종범은 선수로서 정체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지 궁금해 하던 팬들의 호기심이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한 순간의 사고 때문이었다. 이종범이 일본무대에서 전반기 내내 '한국에서 온 이치로'로 불리며 3할 대 타격에 센세이셔널한 수비와 주루로 화제를 모으던 1998년 6월 23일, 한신 타이거즈의 투수 가와지리가 던진 몸쪽 공이 이종범의 오른쪽 팔꿈치를 부러뜨렸고, 3개월의 공백 끝에 복귀한 그는 이전과 조금 달라져있었다.

보통 천재라 불리는 다른 선수들과 또 달랐던 이종범의 매력은 치열함이었다. 타고난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인 몸놀림은 자연스레 '천재'라는 별명을 만들었지만, 강기웅이나 박준태가 보여주던 우아함과는 또 다른 격렬함, 구르고 부딪히기를 즐기며 몸 쪽 공을 '밥'으로 삼는 도전적인 몸놀림이 그의 개성이었다.

그러나 가장 예민한 뼈가 부러지던 순간에 신경 속으로 각인되어버린 몸 쪽 공에 대한 두려움이 타격의 밸런스를 미세하나마 연쇄적으로 무너뜨려버렸던 것이고, 그 뒤로 남겨진 2년 반의 세월은 그가 야구인생 최초로 2군을 들락거리며 스스로 야구에 대한 열정을 의심하며 괴로워하는 시기로 채워지고 말았다. 백인천과 이승엽 사이에 이어질 뻔 했던 일본야구의 한류 타자 계보는 그렇게 허무하게 끊어지고 말았다.  

2001년에는 KIA로 신장개업한 친정팀 타이거즈로 돌아와 다시 몇 년간 3할 타율에 '20홈런-50도루'를 하는 정상급 선수로 군림했지만, 왠지 'KIA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와 다른 것처럼, 21세기의 이종범은 20세기의 이종범과 달랐다. 그는 참 잘 하는 선수이긴 했지만, 예전처럼 상대팀 팬들을 숨막히게 만드는 선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상, 선수생활의 갈림길 1998년 6월 23일, 한신 투수 가와지리의 공이 이종범의 팔꿈치뼈를 부러뜨렸다. 한일 야구사의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 부상, 선수생활의 갈림길 1998년 6월 23일, 한신 투수 가와지리의 공이 이종범의 팔꿈치뼈를 부러뜨렸다. 한일 야구사의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그의 내리막길을 응원하다

그렇다. 지금의 그는 몇해 전의 그가 아니고, 몇해 전의 그는 또 십수 년 전의 그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고, 내년과 후년의 이종범 역시 우리 기억 속의 그 이종범에 많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정상에 서있을 때, 박수 받을 때 떠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남은 길이 내리막뿐인데, 도대체 무슨 꿈을 꾸며 달릴 수 있을 것이냐고. 

그러나 이제 그만 됐다며 미리 위로의 박수를 치려는 이들에게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대부분 애초에 무엇에 관해서든 최고 따위는 꿈꿀 수조차 없으면서도 진지하게 하루를 살아가듯, 그리고 한창 좋을 나이를 이미 지나보낸 그 누구도 남은 삶을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지 않듯, 내리막길에는 몸 젖히고 중심 잡으며 속도를 조절하는 멋과 맛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추한 것은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내리막길을 오르막길처럼 달리다 고꾸라지는 아둔함이다. 이종범이 그저 옛날의 영광에 기대어 볼멘 소리나 하고 있다면 은퇴를 권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대주자든 대수비든, 팀의 열번째 우승을 위해 무엇이라도 좀 해보고 싶다고 한다면, 좀 더 박수를 보내주는 것도 좋겠다.

196개의 안타를 치며 .393의 타율로 84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던, 혹은 30홈런-64도루를 기록하며 두 번째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던 이십대 중반의 이종범이 아름다웠던 것 못지않게 8회 말 대주자로 나와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진흙탕에 몸을 날리며 상대 배터리를 흔들어내는 마흔 무렵의 이종범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WBC 결승타 이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2006년, 이종범은 WBC8강 일본전에서 0대0으로 맞서던 8회 일본의 전설적인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큐지의 공을 2타점 2루타로 때려 한국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 WBC 결승타 이미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던 2006년, 이종범은 WBC8강 일본전에서 0대0으로 맞서던 8회 일본의 전설적인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큐지의 공을 2타점 2루타로 때려 한국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 한국야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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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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