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날의 광팬인 영국 작가 닉 혼비는 이렇게 말했다. 스포츠 팀에 대한 충성심이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은 있지만, 몰래 토트넘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 팬의 마음인지라, 자신이 사랑하는 팀이 지고 지고 또 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TV를 끄고, 스포츠 신문을 멀리하며, 야구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을 피해 스스로 따돌리며 겉돌아보지만 마음은 오히려 또렷이 그라운드를 향해 달리고, 그럴수록 그렇게 깊이 파인 상처를 따라 스며든 애틋함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새겨지곤 한다.

너무 못난 팀을 사랑한 탓에 학대받는 느낌을 가져본 이들이라면, 사라진 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1999년을 음미할 자격이 있다.

1999년 봄,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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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봄, 쌍방울 레이더스의 팬들은 거대한 해일을 맞이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레이더스는 모기업의 부도 속에 공수의 핵이자 거의 모든 것이었던 김기태와 박경완, 김현욱과 조규제를 팔아치워 운영비를 댔고, 그 네 선수를 빨아들인 두 공룡 삼성과 현대를 비롯해 상대해야 할 일곱 팀은 저마다 수십만 달러짜리 외국인 선수들을 끌어들이며 더욱 강해져 있었다.

마치 돈 될 만한 장기들을 적출해 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링에 선 복서처럼, 쌍방울 레이더스는 그 마지막 해인 1999년 시즌을 맞이했다.

정말 고통스런 절망감은 어설픈 희망으로 포장되어 있는 법일까. 그 해 봄, 레이더스의 분전은 눈물겨웠다.

6년 동안 배팅볼을 던지며 재기의 몸부림을 치다가 쫓겨온 왕년의 신인왕 박정현이 선발 4연승으로 용틀임했고, 첨병 조원우가 3할 타율에 홈런까지 펑펑 때려내며 불씨를 피웠다.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는' 동병상련의 IMF팀 해태 타이거즈의 김응룡 감독이 "우승을 누가 할지는 모르지만 레이더스가 꼴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덕담'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러나 5월로 넘어가며 다른 팀 선수들은 '경기 감각'을 찾기 시작했고, 쌍방울 레이더스 팬들은 '현실 감각'을 찾기 시작했다.

개막 후 4연승을 이어가던 박정현은 친정팀 현대를 만나 뭇매를 맞은 뒤 날개가 꺾여 연패 행진을 시작했고, 초반 마흔일곱 경기에서 .314의 타율에 6홈런과 11도루, 22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톱타자 조원우는 연습 중 공을 밟는 어이없는 실수로 왼쪽 고관절 인대가 손상되는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구색 맞추기로 데려온 외국인 투수 앤더슨과 비아노는 7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 팀 평균자책점만 높여갔다.

그 해 쌍방울 레이더스는 시즌 막판 열여덟 번 연달아 패하며 1985년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어깨를 나란히 했고, 1982년의 삼미 슈퍼스타즈와 경쟁하며 .224의 역사적인 승률을 만들어냈다. 팀 평균자책점은 6점에 육박했고, 팀 타율은 2할5푼을 밑돌며 일관된 꼴찌였다.

승부는 이미 선수들이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결정되어 있었다. 만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한다고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는 피할 수 없는 진실을 증명하듯, 그리고 성실함이나 용기 따위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과 별 관계가 없다는 IMF 시대의 진리를 되새겨주듯 말이다.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IMF시대의 진리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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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우가 은퇴한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 짧았던 봄, 레이더스의 마지막 돌격전을 떠올렸다. 끝내 기적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쓸쓸한 기억 속에 긴 여운을 남기는 아쉬움의 근거로 살아있는 그 절박한 근성의 눈매와 짧게 움켜쥔 방망이. 상대 투수들을 짜증스럽게 만들던 질긴 승부들.

부산고와 고려대를 거치며 괜찮은 활약을 했지만 발이 빠르고 수비가 견실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체격도 재능도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기에 94년 쌍방울 2차 지명 5번으로 막차 타듯 프로무대에 올랐던 그.

그러나 근성과 헌신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덕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끈끈한 근성의 팀으로 재편된 돌격대의 선봉장으로 낙점을 받게 했다.

97년과 98년에는 전경기 출장하며 3할대 타율과 스무개 안팎의 도루를 기록했고, 특히 97년에는 .321의 타율로 팀 공격을 이끌면서도 무려 39개의 희생타를 성공시키는 진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희생타를 제외하면) 어떤 부문에서도 1등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타율 높고, 출루율 높고, 도루 많고, 타점과 득점과 희생타까지도 많은, 그래서 남들 눈에는 쉽게 띄지 않지만 안으로 혼자 살림 다 하는 일꾼 역할을 그가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99년, 홀로 팀의 혈로를 개척하다 쓰러진 그와 함께 팀도 무너졌고, 쌍방울의 역사도 끝이 났다. 누구도 그 후예임을 자처하지 않는, 그래서 삼미 슈퍼스타즈보다도 더 불운했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잊힌 전설' 속에 그 전성기를 묻어둔 선수 조원우도 더 많은 이에게 기억될 기회를 잃었다.

물론 그의 선수 생활은 그 뒤로도 10년간 더 이어졌다. 특히 FA계약에서 수모를 당한 끝에 트레이드의 설움까지 겪은 2005년에는 다시 한 번 3할 타자로 복귀하기도 했고, SK에서 뛰던 2001년 7월 6일부터 한화로 옮긴 2006년 5월 23일 사이에는 무려 1784일간 494경기에서 무실책을 기록하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메이저리그 외야수부문 연속무실책기록은 오클랜드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런 루이스가 세운 392경기) 그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는 어디서든 '프랜차이즈 스타'도 아니었고, '꽃미남 스타'나 '타이틀 홀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활약, 대기록. 그러나 잊힌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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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약한 팀의 가장 약한 부분을 홀로 메워갔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던 이름. 그리고 뿌리 뽑힌 수초처럼, 끈 떨어진 연처럼, 항상 치열한 싸움을 했지만 그만큼 사랑받지 못했던 선수. 한국 야구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온, 그러나 나조차 기억할 수 없이 사라져간 많은 이들을 대표해 박수를 받을 만한 이름, 조원우.

그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1999년의 가을을 생각한다. 그 해 10월 6일부터 8일까지 LG와 현대를 번갈아 상대했던 3연전을 합해 전주구장을 찾은 관중은 148명이었고, 그 세 경기는 지금껏 각각 한구프로야구 역대 최소관중경기 1, 3,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거의 완벽하게 빈 관중석을 보며 한층 더 냉기가 돌았을 더그아웃.

그러나 지금에야 생각하면 경기를 한다기보다 현실의 벽 앞에서 일방적인 린치를 당하는 듯한 레이더스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고, 그들을 통해 거울에 비친 못난 제 모습을 비추어보는 듯한 섬뜩함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지, 레이더스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으리라.

97년 겨울을 닮은 2008년의 겨울에 다시 떠오르는, 그리고 앞으로도 쓸쓸한 계절마다 다시 떠올라 한 번씩 눈을 꼬옥 감게 만들 쌍방울 레이더스, 그 그립고 미안한 이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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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사진 및 자료 협조 : 다음카페 '쌍방울 레이더스 팬클럽'(http://cafe.daum.net/sbwrai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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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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