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야구중계 허구연과 하일성의 해설이 각각 대학의 전공과목과 교양과목 강의같은 느낌이라면, 이병훈의 해설은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TV 중계라면 분명 눈 앞에 펼쳐지는 여백의 긴장감을 방해할만한 소소한 곁다리들을 가지고 그는 라디오 중계에 꼭 맞아 떨어지는 야구해설의 유형을 선보이고 있다. 김동연 캐스터(왼쪽), 이병훈 해설위원(오른 쪽)

▲ TBS 야구중계허구연과 하일성의 해설이 각각 대학의 전공과목과 교양과목 강의같은 느낌이라면, 이병훈의 해설은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TV 중계라면 분명 눈 앞에 펼쳐지는 여백의 긴장감을 방해할만한 소소한 곁다리들을 가지고 그는 라디오 중계에 꼭 맞아 떨어지는 야구해설의 유형을 선보이고 있다. 김동연 캐스터(왼쪽), 이병훈 해설위원(오른 쪽)ⓒ 교통방송


지난 10월 4일, LG와 롯데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중계하며 해설자와 캐스터가 돌아가며 청취자와 방송국 '고위 관계자'들을 향해 그토록 애절한 부탁의 메시지를 날려댔음에도 TBS(교통방송)의 포스트시즌 중계방송은 무산되고 말았다. 때문에 꽉 막힌 퇴근길 라디오 중계에 귀 기울이며 이병훈 해설위원의 입담에 남몰래 키득거리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이들도, 뭔가 다른 수를 내야만 하게 되었다.

이병훈은 분명 한국의 야구해설계에 새로운 차원을 개척했다. 그는 질주하는 순간들의 사이마다 한없이 늘어지기도 하는 야구경기의 비어있는 시간들을, 특유의 자유분방한 유머감각으로 채워 넣고 있으며, 그래서 결코 '깊이'가 있는 것도, '날카로움'이나 '푸근함'이 있는 것도 아니며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할 만큼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그다지 경기에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의 해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다.

여전히 '양대산맥'으로 불리는 허구연과 하일성의 해설이 각각 대학의 전공과목과 교양과목 강의 같은 느낌이라면, 이병훈의 해설은 백화점 문화센터 강의 같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TV 중계라면 분명 눈 앞에 펼쳐지는 여백의 긴장감을 방해할 만한 소소한 곁다리들을 가지고 그는 라디오 중계에 꼭 맞아 떨어지는 야구해설의 유형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성준 투수가 등판한 경기를 치르다 보면 수염이 한참 자라있었다느니, '40-40'(한 시즌 40홈런 40도루 이상)을 바라볼 수 있었던 박재홍 선수에 관한 이야기 끝에 자신은 '5-5'도 불가능한 선수였다느니, 해설 내내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다 보니 그가 전직 선수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한때 최고 인기프로그램이었던 SBS TV '꾸러기카메라'에 현직 선수로서는 유일하게 출연했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던 선수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리 길지 않았고, 특히 주전급이었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은 3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동안에 짧고 강한 인상을 남긴 선수였기 때문이다.

90년 LG 창단과 함께 등장한 유망주

1차 지명권이 3장에서 2장으로 줄어들었던 1990년 신인선발에서 LG트윈스가 대학 최고의 포수였던 김동수와 더불어 뽑은 카드가 고려대 출신의 이병훈이었다. 선린상고 3학년 시절 화랑기 결승에서 광주일고를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둔 투수이기도 했고, 1루수 겸 4번 타자로서 타선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고려대 시절에는 외야수로 뛰면서 김경기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루던 선수였다. 

그 1990년, 트윈스는 창단 첫 해 곧바로 우승을 이루어냈을 만큼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태원, 김용수, 정삼흠 등의 안정된 마운드를 바탕으로 윤덕규, 김상훈, 박흥식 등의 신진들이 김재박, 이광은 등 기존의 중심 타선과 상승 작용했고, 노쇠기를 보이던 심재원을 대신해 안방을 책임진 김동수는 팀(청룡 시절 포함)의 세 번째 신인왕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훈은 박흥식·윤덕규·노찬엽·김영직 외에도 원년 멤버 신언호·양승관까지 가세한 외야진에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대타로 이따금 출전하며 .258의 타율로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 시즌 중반에 백인천 감독이 재계약 포기를 발표하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전년도 우승팀 트윈스는 곧장 탈꼴찌싸움의 진흙탕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이광환 감독으로 사령탑이 바뀐 1992년에는 그야말로 바닥을 쳐야 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팀을 지탱해 주던 김용수가 갑작스런 좌골신경통으로 전력에서 이탈했고, 계투진의 핵심인 김기범이 방위병으로 입대한 데다가,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 재기를 시도하던 김건우가 또다시 부상 앞에서 무너진 것도 그 해였다.

이광은과 김재박을 은퇴시켰지만(김재박은 은퇴에 반발해 사상 최초의 '무상 트레이드'로 태평양 돌핀스의 유니폼을 입었다) 아직 서용빈과 유지현과 김재현은 등장하기 전이었던, 말하자면 트윈스 리빌딩 과정의 가장 어두웠던 시간에, 타선의 중심을 잡은 것이 선린상고 1년 후배 송구홍과 더불어 이병훈이었다.

규정타석에는 조금 못 미쳤지만 정확히 3할의 타율과 16개의 홈런, 그리고 45개의 타점과 5할대 중반의 장타율. 물론 팀 최초의 20-20을 달성했던 송구홍만은 못했지만, 7위 팀의 것 치고는 무게감이 있는 타선으로서 자존심을 지켰고, 팬들은 아직 건재한 김상훈, 노찬엽과 함께 그가 팀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버라이어티'에 출연했던 현역 선수

그 시절만 해도 비교적 날렵했던 몸매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던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준수한 성적에다가 홈런을 치거나 결정적인 안타를 때려낼 때마다 작렬시키던 격한 세리머니. SBS가 '꾸러기 카메라'를 그의 일상에 들이민 것이 바로 그런 그의 상품성 때문이었다.

(연습경기에서 상대팀 투수는 유독 그에게만 밋밋한 공을 진상했고, 혹 공이 뜨더라도 야수들은 엉거주춤 피해 다니며 안타를 만들어주었다. 결국 전 타석 안타를 치며 승리를 이끈 이병훈은 경기 종료 후 내내 내린 비로 진창이 된 홈으로 슬라이딩을 하며 자신만의 트레이드마크인 득점 세리머니를 펼쳤고, 진행자가 그 순간 들이닥쳐 모든 것이 조작된 것임을 폭로하는 내용이었다.)

타석에 들어서면 피해갈 곳이 없을 듯한 존재감을 과시하다가 그리 크지도 않은 스윙으로 광활한 잠실구장의 하늘을 갈라 홈런을 날리는 괴력, 그러나 잡아먹을 듯 그 크고 험한 눈을 부라리다가도 눈에 보이는 유인구에 어이없는 스윙을 해 삼진을 먹고는 민망해 죽겠다는 듯 웃으며 돌아서 더그아웃으로 향하는 천진난만함. 또 그렇게 기어 들어간 더그아웃에서는 '그라운드의 개그맨'으로 불릴 정도로 웃음꽃을 피우며 분위기를 풀어놓던 여유.

그래서 90년대 초반의 트윈스에게서 느꼈던 묘한 매력을 나는 이렇게 상상해 본다. 김용수와 노찬엽의 묵직함과 김영직, 윤덕규의 소탈함, 그리고 송구홍의 독한 근성과 어우러져 차명석, 이병훈이 주거니 받거니 늘어놓았을 만담의 세계까지. 그 백인백색의 개성이 연출하던 다양성과 자유로움. 그래서 송구홍이 죽을 힘을 다해 홈으로 파고들어 결승점을 만든 채 찢어진 유니폼 앞섶 덜렁거리며 개선할 때면 엉덩이 툭 치며 던지는 이병훈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뭘 그렇게 목숨 걸고 뛰냐'는 역설적인 농담이 오히려 팀 분위기를 상승시키던 여유로움.

다양성과 자유로움, 그리고 여유

1990년, 트윈스의 첫 우승 우승 확정 순간 백인천 감독(가운데)에게 샴페인을 퍼붓고 있는 이병훈(오른쪽)

▲ 1990년, 트윈스의 첫 우승우승 확정 순간 백인천 감독(가운데)에게 샴페인을 퍼붓고 있는 이병훈(오른쪽)ⓒ LG 트윈스

그는 그리 정확한 타자가 아니었다. 선구안이 좋지 못해 삼진이 많았고, '결대로' 치는 세밀한 기술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난해한 노림수로 상대투수를 공략했고, 보기와는 또 다른 집중력으로 종종 결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어쩌면 '서울판 이만수'쯤 되는 모습이었다고 할까. 어쨌든 그는 기록된 성적 이상의 존재감과 즐거움을 주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듬해 충분한 출전기회를 얻었음에도 오히려 2할대 중반으로 떨어진 타율과 6개로 줄어든 홈런은 기대를 영 벗어나는 것이었고, 점점 비대해지는 몸매와 더불어 점점 좁아지는 외야 수비범위는 그를 '계륵' 같은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분명히 중심타자의 자질을 가졌지만, 딱히 써먹을 곳이 마땅치 않은 선수.

결국 93년 시즌을 마치고 그는 한대화·신동수·허문회를 받는 트레이드에 끼워져 김상훈과 더불어 해태로 보내졌다. 간혹 그의 선수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이 떠올리는 것도 거기까지다. 물론 여전히 그의 가능성과 존재감에 미련을 가지던 팬들은 아쉬워했지만, 곧 그 자리를 채운 한대화와 신인 3인방이 그 빈자리를 말끔히 메우며 그는 순식간에 잊혔기 때문이다.

그 뒤 해태 타이거즈에서 두 시즌, 삼성 라이온즈에서 한 시즌을 더 뛰었지만 그는 더 이상의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해가 갈수록 몸은 비대해졌고 더욱 느려진 발은 외야수로서의 가치를 빼앗은 데다가, 반대로 얻었어야 할 장타력마저 점점 줄어드는 역설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 충실하지 못했던 몸 관리가 지명타자로서 가져야만 하는 파괴력마저 더 이상 과시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마지막 몇해는, 선수생활과 병행했던 사업이 실패하며 그에게 정신적으로도 힘든 시간이었고, 원래 좋아하던 술은 점점 더 자주 문제를 일으키곤 했다. 그리고 결국 97년 시즌 개막 전의 어느 날, 음주운전 끝에 일으킨 교통사고로 도저히 선수생활을 이어갈 수 없을 후유증마저 얻게 되며 그의 길지 못했던 선수생활은 끝이 나고 말았다.

숨 고르고 다시 생각하며 달리는, 야구의 매력

트윈스는 90년과 94년, 길지 않은 간격으로 두 번의 우승을 맛본 팀이지만, 참 신기하게도 그 두 해 사이의 3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두 번의 너무나 짜릿한 영광의 순간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역설적인 어둠일 수도 있고, 굳이 챙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밑바닥의 시간들이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3년간도 트윈스는 매력적인 팀이었고, 기억할 만한 순간들을 만들어냈었다.

이병훈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92년을 떠올린다. 해태나 롯데가 종종 보여주던 독한 근성과 비장미, 혹은 삼성과 한화가 흘리던 좌절의 눈물, 그런 것들이 엇갈리며 연출하던 승리와 패배의 격전장에서 문득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다음에 이기면 되잖아' 라는 듯 짓궂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야구 자체를 즐기던 트윈스의 여유로움.

9회 마지막 순간이라도 TV를 통해 보고 싶은 마음에 핸들을 쥔 손이 더욱 조급해지는 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거침없는 농담은 그런 여유를 일깨운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케이블 TV 재방송으로 보면 되지. 그게 뭐 큰일이라고. 내일 다시 잘 하면 되지.

일이 날 안 풀릴 때, 대개는 붉으락푸르락 되새기고 곱씹는 것보다 별 것 아니라고 털어버리는 것이 낫다. 야구경기는 내년에도 열리는 것이고, 인생은 매순간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던가.

질주하는 것이 육상경기의 매력이라면, 때로는 숨도 고르고 생각도 고쳐먹으며 느끼는 것이 야구의 매력이다.

덧붙이는 글 김은식 기자는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이상 풀로엮은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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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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