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가 육아주머니에서 새끼를 기르듯 성인이 되었는데도 부모 집을 떠나지 않는 청년들을 가리켜 캥거루족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추세는 전 세계에서 일어나나 보네요. 캥거루족을 두산백과사전에서 검색해보니까 친절하게 다른 나라의 캥거루족들까지 소개해주네요.

미국에서는 대학 졸업 후에도 결혼도 미룬 채 독립을 못하고 부모 집에 얹혀사는 세대를 트윅스터(twixter)로 부르는데, 중간에 낀 세대(betwixt and between)란 뜻이지요. 이탈리아에서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에 집착하는 사람을 일컫는 맘모네(mammone), 영국에서는 부모의 퇴직연금을 까먹는 키퍼스(kippers), 캐나다에서는 떠돌다 집으로 돌아와 생활하는 부메랑 키즈(boomerang kids)라고 하네요.

그밖에 독일에서는 집에 눌러 앉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네스트호커(Nesthocker), 프랑스에서는 영화 <탕기 Tanguy>[2001. 에티엔 샤틸리에즈 감독]의 제목을 그대로 따서 탕기라고 부르네요.

"탕기도 독립해야지" 여자친구들을 데려와 '화끈한 밤'을 보내는 통에 부모는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지요. 아침마다 새로운 여자친구들과 인사나누는 것도 고역이네요. 그래도 자식이기에 다 받아주지요.

▲ "탕기도 독립해야지" 여자친구들을 데려와 '화끈한 밤'을 보내는 통에 부모는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지요. 아침마다 새로운 여자친구들과 인사나누는 것도 고역이네요. 그래도 자식이기에 다 받아주지요. ⓒ 거원시네마(주)


한국엔 캥거루족, 프랑스엔 탕기

탕기(에릭 베르제)는 28살-한국 나이로는 서른-이 되도록 집에 얹혀사는 프랑스 청년이에요. 강사와 과외로 달마다 4천 달러의 수입이 있는 그는 박사논문을 준비하며 중국어에 일어까지 능통한 재원이지만 독립을 하기보다 부모와 같이 사는 게 훨씬 편하기에 눌러앉으려 하지요.

툭하면 여자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식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하는 탕기를 보면서 더 이상 부모는 참지 않지요. 집을 사줘서 내보내자고 탕기 엄마 에디뜨(사빈느 아제마)가 얘기하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 보살피게 된다는 생각에 탕기 아빠 폴(앙드레 뒤솔리에)은 반대하죠. 급기야 에디뜨가 정신과 진료를 받게 되는 상황에 이르자 에디뜨와 폴은 괴롭혀서 쫒아내자는 계획을 세우네요.

이때부터 탕기 부모의 황당하고도 재미있는 괴롭힘이 시작되어요. 새벽에 번갈아 일어나서 탕기를 깨우기, 상한 생선을 탕기 방에 감춰두기, 아끼는 옷을 버리고 가위로 난도질하기, 탕기가 강사로 일하는 학교 찾아가서 수업듣기 등 자식 성공에 온 몸을 바치는 한국부모라면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을 벌이지요.

"엄마, 옷이 왜 이래요?" 옷을 망치고 바이러스메일을 보내며 화장실에 나사를 일부러 빼놓아 찔리게 하면서 탕기를 괴롭히지만 탕기는 집에 붙어서 나갈 생각을 안 하지요.

▲ "엄마, 옷이 왜 이래요?" 옷을 망치고 바이러스메일을 보내며 화장실에 나사를 일부러 빼놓아 찔리게 하면서 탕기를 괴롭히지만 탕기는 집에 붙어서 나갈 생각을 안 하지요. ⓒ 거원시네마(주)


내보내려는 부모, 나가지 않으려는 자식

더 웃긴 건 그러한 냉대에도 동양 고전의 한 구절을 읊으며 도인처럼 행동하는 탕기, 부모의 짓궂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씩 웃으며 넘어가지요. ‘초강력 진드기’가 된 탕기에게 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집을 구해놓고 나가라고 엄포를 놓아요.

그런데 이사한 첫날부터 탕기는 호흡곤란을 일으키며 부모 집이 아니면 잠을 못 이루죠. 급기야 동거문제가 법정으로 가게 되고 탕기가 승소해서 집으로 들어오게 되죠.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자식을 쫓아내려는 부모와 나가지 않으려는 자식 사이에서 연간 900건 가까운 소송이 제기된다니 색다르네요.

한국은 결혼할 때까지 부모 집에 머무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죠. 그래서 어느 학자는 현대의 청소년기를 예전보다 늘어나서 십대 때부터 결혼해서 독립할 때까지라고 주장해요. 몸만 ‘어른’이지 경제와 심리에서 독립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죠.

말 그대로 '눈칫밥' 캥거루족은 집에서 눈칫밥을 먹지요. 청년실업이 어떻고, 실업률이 어떻다는 등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밥맛이 떨어지지요. 몇몇 '엄친아'들의 얘기에 독립을 하고 싶어도 집과 직장이 없네요.

▲ 말 그대로 '눈칫밥' 캥거루족은 집에서 눈칫밥을 먹지요. 청년실업이 어떻고, 실업률이 어떻다는 등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밥맛이 떨어지지요. 몇몇 '엄친아'들의 얘기에 독립을 하고 싶어도 집과 직장이 없네요. ⓒ 거원시네마(주)


캥거루족이 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

그러나 몸만 어른이고 경제능력과 독립심에서는 ‘청소년’인 탕기에 비해 한국의 캥거루족은 경제능력을 제도권에서 박탈당하여 독립을 하고 싶어도 못하지요. 이태백을 넘어 삼태백이 되고 있는 청년실업만성화시대에 사회는 요구사항만 많아지고 문은 점점 좁히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이 부모의 ‘육아주머니’에서 빠져나오기란 그렇게 쉽지 않지요.

노동의 유연화를 외치며 정규직을 비정규직화한 지도 오래되었고 신규고용도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청년들의 한숨 소리는 깊어만 가죠. 평생 벌어야 간신히 마련할 거 같은 거품이 잔뜩 낀 집값을 바라보며 결혼은 언감생심, ‘작전상 후퇴’를 외치며 ‘육아주머니’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요. 잠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평생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래도 눈치가 보이니 용돈이라도 벌어보려고 알바를 뛰어보지만 형편없는 대우에 기가 막힐 뿐이죠. 노동자에 대한 대우가 좋은 외국에서는 파트타임에서 번 돈으로 부족하지만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는데 한 시간에 5천원을 버는 한국에서는 미래를 위한 투자는커녕 용돈벌이도 빠듯한 실정이에요.

이제 자유?! 탕기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 뒤 기뻐하는 탕기 부모,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식을 내보내고 속 편할 부모가 없지요. 나가봤자 헉헉되면서 세상에 치일게 뻔하기에 결혼할 때까지 집에서 돌보는 게 오히려 속편하지요.

▲ 이제 자유?! 탕기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 뒤 기뻐하는 탕기 부모,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식을 내보내고 속 편할 부모가 없지요. 나가봤자 헉헉되면서 세상에 치일게 뻔하기에 결혼할 때까지 집에서 돌보는 게 오히려 속편하지요. ⓒ 거원시네마(주)


캥거루족들의 탈출구는 어디에?

수백억씩 스톡옵션을 가져가고 몇 억씩 성과급 잔치를 하는 기성세대들은 “너희도 열심히 하면 우리처럼 잘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달래지만 더 이상 먹히지 않지요. ‘낙하산’이 떨어지고 ‘상층부의 2세’들이 김일성-김정일 세습하듯 한 자리씩 차지하여 떵떵거리는 현실을 보면 누구나 1%가 될 수 있다는 집단 최면이 부서질 수밖에 없지요.

이미 결정된 지배층을 향해 애타게 문을 두드리며 자신도 들여보내달라는 일은 이제 그쳐야겠지요. 콩고물 떨어지길 기대하며 빌붙어 있기엔 인생이 아까우니까요. 이제는 결정된 구조의 타당성을 두드리며 왜 이렇게 되었는지, 불공평한 세상에 대해 근본부터 의문을 제기해야겠지요.

영화에서 가족과 함께 하지 않으면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탕기는 결국 중국인과 결혼하여 중국가족으로 들어가네요. 탕기가 새로운 가족에 편입하여 안정을 찾은 것과 달리 한국의 캥거루족들에게 탈출구는 쉽게 보이지 않네요. 청년실업에 비정규직, 억대집값이란 거친 짐승들이 난동을 부리는 현실에서 캥거루족들은 언제 주머니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뛸 수 있을까요.

탕기는 괴물? 독립을 하지 않아 탕기는 괴물이 되네요. 그렇다면 독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캥거루족들을 만들어 내는 한국은 초대형 괴물공장?

▲ 탕기는 괴물? 독립을 하지 않아 탕기는 괴물이 되네요. 그렇다면 독립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캥거루족들을 만들어 내는 한국은 초대형 괴물공장? ⓒ 거원시네마(주)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씨네21개인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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