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행복합니다>의 한 장면 ⓒ 블루스톰
푸른 잔디밭 위에 벤치가 하나 있고 거기 앉은 남자는 행복해 보인다. 부신 햇볕 탓이었을까.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남자는 평화롭다. 그래서 쓸쓸하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 로버트 저메키스)의 마지막 장면을 닮은 이것은 윤종찬 감독의 신작 <나는 행복합니다>(2008) 포스터에 정지된 장면.
정신병동에 갇혀서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지난 7월 타계한 작가 이청준 선생의 단편 <조만득 씨>를 각색한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정신병동에 갇혀서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 자살한 형이 남겨준 도박 빚, 이 모든 현실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정신병동의 하루하루가 꿈만 같은 만수(현빈 분). 연인에게 버림받고 직장암 말기의 아버지를 간호하며 힘든 일상을 보내는 수간호사 수경(이보영 분)은 월급마저 차압당해 괴로운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는 현실을 배겨낼 수 없어 미쳐버린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가 환자에게서 위안을 얻는 역설적인 이야기. 감독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불행한' 두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십니까? <나는 행복합니다>는 올해 제 13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부산을 찾았다.
"올해 부산영화제의 표어는 '힘내라, 한국영화'라 폐막작으로 한국영화를 상영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윤종찬 감독은 상업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꾸준히 좋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현빈, 이보영은 <나는 행복합니다>에서 지금까지의 이미지와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역설적 제목은 축제의 현장에서 고통스러운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위안을 얻기 바라는 영화제의 의도와 일치한다. 동시에 이 영화는 'PPP'(부산프로모션플랜) 프로젝트 선정작이기도 하다."
부산영화제 이상용 프로그래머는 폐막작으로 <나는 행복합니다>를 선정한 이유를 이같이 밝혔다. 부산영화제 폐막 하루 전인 지난 9일 오후 2시,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나는 행복합니다>의 기자회견이 그 무대였다. 기자 시사가 끝난 뒤 이어진 기자회견은 부산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과 이 프로그래머 그리고 윤 감독과 배우 이보영, 현빈이 참가한 가운데 한 시간여 진행됐다.
청춘스타 이보영, 현빈 연기 변화 시도
▲ 부산영화제 폐막 하루 전인 지난 9일 오후 2시 부산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나는 행복합니다>의 기자회견장. 윤종찬 감독과 배우 이보영, 현빈이 참가한 가운데 한 시간여 진행됐다. ⓒ 성하훈
윤 감독은 "장편영화 데뷔 전 단편영화를 들고 부산영화제에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는 폐막작으로 다시 부산을 찾게 돼 감회가 새롭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 했다. 제작사 '블루스톰(주)'의 제안으로 원작 소설을 읽게 됐다는 감독은 "작품에 공감했다기보다 고통의 절정에 달한 인물이 미치고 만다는 설정이 좋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원작보다는 모티브를 염두에 뒀다고.
"영화 속 두 주인공의 고민은 상투적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동시에 피해갈 수 없는 고민, 익숙한 고민들이기 때문에 주인공의 고통을 심도 있게 묘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도를 넘지 않으려 애썼다."
반면 이보영과 현빈은 올해 처음 부산영화제를 방문했다. 이 프로그래머가 지적했다시피 이들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청춘스타의 이미지를 이 영화에서 과감히 벗어던졌다. 연기 변화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보영은 "항상 변화하고 싶었고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대답한다.
"이전에는 오락영화를 했는데 늘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행복합니다>의 시나리오를 받고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는데 감독을 믿고 '감히' 시도해봤다. 작업은 즐거웠다."
현빈은 그러나 "갑자기 캐릭터를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자신의 연기가 미숙하다고 자평한 현빈은 시나리오가 맘에 들어 이 영화를 선택했고 또 최선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일을 연기하기는 어렵다. 정신병자 역할은 간접 체험조차 불가능한 거였다. 관련 영화를 많이 찾아봤고 책도 읽었다. 촬영 직전에는 요양원을 방문해 과대망상, 피해망상 증세를 앓고 있는 환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을 인터뷰하며 느낀 것을 연기로 시도했다."
영화의 흥행 전망을 묻는 질문에 현빈은 젊은 배우다운 재치로 응수해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결과가 나쁘면 (다른 작품을) 또 하면 된다. 나는 아직 젊다."
"요즘 사람들 너무 쉽게 삶을 포기 한다, 살아만 있다면 행복할 것을"
▲ <나는 행복합니다>의 한 장면 ⓒ 블루스톰
그런데 이상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불행한데 제목이 <나는 행복합니다>? '현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렸을 때 차라리 행복하다'고 감독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작을 읽고 슬펐다. 주인공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삶을 포기하는 것 같다. 너무 약해져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어떻게든 살아남은 그들이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살면 행복한 거다. 살아만 있다면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영화제 개·폐막작으로 선정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한 전례가 없다는 속설은 감독도 들은 바 있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영화가 관객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감독은 담담하게 토로했다. 결과까지 생각하면서 영화를 찍지는 않았으니까.
영화는 무겁다. 시종일관 어둡다. 직접 연기한 두 배우에게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왔을까. 현빈의 경우 "다시 하자면 안 하고 싶을 만큼", 이보영은 "하루가 한 달 같이 느껴질 만큼" 힘든 작업이었단다. 현빈은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영화 촬영이 진행된 3월~5월 두 달간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될 거라며.
"영화를 하면서 나는 과연 행복한가 생각해봤다. 지금도 답을 찾지 못했다. 연기는 내가 선택했지만 여러분이 나를 찾아주지 않으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는 부분이라 불행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행복한가. 이것은 평생의 숙제로 남을 것이다. 이 영화 찍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반면 이 영화를 통해 연기에 자신감을 얻었다는 이보영은 힘든 작업이었지만 배운 점이 많다며 의욕을 보였다.
"아버지가 죽는 장면을 찍을 때 내 감정이 저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구나 생각했다. 이럴 수도 있구나… 다양한 감정선을 경험했다.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하게 될지 모르나 다음 영화에서는 더 성숙해질 것 같다."
"세상에 만수 같은 사람 많겠죠?"
▲ <나는 행복합니다>의 한 장면 ⓒ 블루스톰
두 배우에 대한 감독의 반응은 냉철했지만 동시에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여담이라는 토를 단 감독은 두 배우의 변화를 이렇게 '증언'했다.
"처음에 현빈이라는 배우가 (이 영화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없었다. 회사에서 연기 연습을 시키기 위해 (이 영화를) 하려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개인적으로 물어봤더니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고 선택했다고 했다. 원래 주인공은 30대 중반의 남자로 설정됐는데 (현빈을 위해) 시나리오를 바꿨다.
현빈은 지금까지 부잣집 아들 역할만 했다. 이 영화 속의 옷 같은 건 입어본 일도 없을 것이다. 알아봤더니 현빈은 강남 산다고 하더라. 고생이라는 걸 해본 일이 없는 배우다. 이보영도 미스코리아 출신에 거리에서 캐스팅 됐다 하고 또 즉시 TV연속극 주연을 맡아 고생을 해본 적 없을 것이었다. 영화 캐릭터와 맞지 않았다. 두 사람과 만나서 얘기를 해봤더니 아무 생각이 없더라(웃음). 배우를 비하하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요즘 젊은 배우들의 특징이다. 그냥 '쿨'하다.
제작비도 적고 촬영 기간도 짧아 감독이 악마 역을 도맡아야 했다. 첫날부터 (배우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고 새벽까지 촬영을 했다. 노래방 장면은 아침 7시까지 촬영했다. 현빈은 제 촬영분이 끝나면 피곤하다며 먼저 들어가곤 했는데… 아마 영화 촬영이 40% 정도 진행된 시점이었을 거다. 이때 현빈이 물었다. '세상에 만수 같은 사람 많겠죠?'"
마지막으로 감독은 덧붙였다.
"요즘 한국영화가 어렵다."
한국영화가 고전하는 '요즘' 그러나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의 '낙관'에 수긍한다면.
"새로운 영화는 자국 영화가 위기에 빠졌을 때 나온다. 산업적, 예술적 새로움을 요구하는 지금은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는 시기다. 한국에는 재능 있는 감독들이 많다."
▲ 왼쪽부터 윤종찬 감독, 배우 이보영, 현빈 ⓒ 성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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