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스 21번 20년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을 때마다 그가 민망해하며 그저 ‘타고난 통뼈라서’라고 답하는 것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기도 한다. 그러나 그 20년간의 ‘전설’은 끊임없는 위기와 극복이었고 도전과 응전이었으며, 불운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오기와 노력의 역사였다.

▲ 이글스 21번 20년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을 때마다 그가 민망해하며 그저 ‘타고난 통뼈라서’라고 답하는 것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기도 한다. 그러나 그 20년간의 ‘전설’은 끊임없는 위기와 극복이었고 도전과 응전이었으며, 불운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오기와 노력의 역사였다. ⓒ 한화 이글스

1991년, 빙그레 이글스는 출루율과 도루를 제외한 공격 전부문을 석권하며 '다이너마이트'로 불리기 시작한 타선을 앞세워 창단 첫 우승을 위한 세 번째 도전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상대는 해태 타이거즈였고, 이글스는 첫 두 판에서 한희민과 한용덕이 각각 선동열과 이강철에 밀리며 2패를 떠안게 되었다. 완패와 기사회생의 갈림길이 될 3차전, 타이거즈 문희수에 맞서 이글스의 김영덕 감독이 꺼낸 선발카드는 송진우였다.

한 해 전 38세이브포인트로 역대 최다 구원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송진우는, 그 해에도 열한 번의 완투를 곁들이며 11승과 11세이브를 기록했던 이글스 마운드의 전천후 해결사였다.

그리고 그 날, 자신이 세워진 전장이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막다른 고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송진우의 공은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으로 유난히 날카롭게 꽂혀들었다.

8회 2사까지 무안타, 무사사구, 무실책. 단 한 명의 타자도 누상에 살려 보내지 않은 완벽한 투구였고, 맞상대인 타이거즈의 문희수 역시 만만치 않은 공을 뿌리고 있긴 했지만 이글스의 타선은 강정길이 2회 말에 때려낸 적시타로 먼저 한 점을 뽑고 있었다. 그리고 스물네 번째로 타석에 들어선 타이거즈의 정회열이 때려낸 공은 힘없이 1루쪽 파울지역으로 솟구쳤고, 송진우의 퍼펙트 행진이 8이닝 째를 채우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10년을 채워가던 한국프로야구 사상 단 한 번도 세워진 적이 없는 대기록 앞에서 몸이 굳었던지, 아니면 절대강자 타이거즈를 잡아내기 직전이라는 설렘 때문이었는지 1루수 강정길과 포수 유승안은 서로 엉덩이를 빼며 주춤댔고, 어이없게도 타구는 두 야수의 중간 쯤에 살포시 내려앉고 말았다. 한숨을 몰아쉬며 방망이를 고쳐 쥐는 정회열,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자리로 돌아간 유승안과 강정길. 그리고 괜찮다는 듯 땀을 닦아내며 다시 투수판에 발을 올린 송진우.

그러나 끝낼 수 있었던 순간에 끝내지 못한 안이함이 승부의 추를 미세하게 건드려놓았던지, 바로 그 순간부터 운명의 물길은 엉뚱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풀카운트 끝에 정회열에게 볼 넷을 허용하며 퍼펙트게임 무산. 후속타자 홍현우에게 던진 초구가 좌전안타로 이어지며 노히트노런 무산. 그리고 다시 장채근에게 동점 적시 2루타를 맞으며 완봉과 승리가 동시에 날아간 데 이어 윤재호에게 마저 연달아 역전 3루타를 얻어맞으며 기록은 순식간에 '패전'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결국 빙그레 이글스는 그 해 역시 4연패로 밀리며 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대결에서 악몽 같은 세 번째 패배를 기록해야 했다.

항상 완벽함의 경지 한 걸음 앞에서 무언가 조금씩 넘치고 모자라고 틀어지는 불운. 그래서 매번 허탈한 표정으로 진땀 훔쳐내는 얼굴을 보며 이제는 꺾이나보다 하는 쓸쓸한 안타까움을 주는 선수. 그러나 지나고 보면 아직도 그 자리에서 씩씩하게 달려가며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선수. 무려 20년간 무수한 기록, 그리고 그만큼이나 극적인 순간들을 양산해온 송진우라는 이름에서 내가 가장 먼저 91년 한국시리즈 3차전의 그 순간을 떠올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보직? 뭘 하든 잘하는 전천후!

세광고 시절의 송진우 1983년 제 36회 황금사자기. 세광고가 야구부창설 29년 만에, 그리고 충북지역 고교 역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전국 야구대회 우승을 이루어냈던 그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것이 경남고와의 결승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2학년생 송진우였다.

▲ 세광고 시절의 송진우 1983년 제 36회 황금사자기. 세광고가 야구부창설 29년 만에, 그리고 충북지역 고교 역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전국 야구대회 우승을 이루어냈던 그 역사의 중심에 서있던 것이 경남고와의 결승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2학년생 송진우였다. ⓒ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1983년 제 36회 황금사자기 대회에서는 작은 이변이 연출되었다. 세광고가 야구부창설 29년 만에, 그리고 충북지역 고교 역사상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해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것이 경남고와의 결승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2학년생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1980년 대붕기 고교야구대회에서 선동열과 박노준을 연파하며 파란을 일으켰던 민문식에 이어 세광고가 배출한 두 번째 '초고교급 투수'였을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의 재능을 과시했다.

비록 얇고 허약했던 팀 전력 탓에 한 번의 우수투수, 한 번의 감투상으로 고교시절을 마무리해야 했고, 누적된 무리 때문에 찾아온 팔꿈치 통증으로 대학 2,3학년 시절을 통째로 쉬어야 하기도 했지만, 채찍 끝처럼 파고들었던 옹골찬 강속구와 대찬 스윙, 더구나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왼손잡이라는 경쟁력을 무기로 그는 조계현, 문희수 등과 함께 쟁쟁한 84학번의 맨 앞줄에서 달려 나갔던 유망주였다.

대학 졸업 후 88 서울올림픽 출전을 위해 1년간 실업무대를 거쳐야 했던 그가 프로에 입문한 것은 89년이었다. 그 해 창단 5년, 1군 합류 4년째를 맞이한 팀 이글스는 창단멤버 한희민과 이상군이 버텨온 마운드와 유승안이 중심을 잡고 있던 타선에 이정훈, 이강돈, 강정길 등이 합류하고, 세광고 출신의 연습생 장종훈이 서서히 힘을 내기 시작하면서 강팀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 해 김영덕 감독은 송진우를 여러 가지 상황에서 등판시키며 효용을 실험했고, 송진우는 선발 중간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156.2이닝을 던지면서 9승과 10세이브, 2.8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엇을 맡기든 잘 해냄'을 입증했다.

비록 19승을 올렸던 태평양 돌풍의 핵 박정현(평균자책점 2.15, 2위)을 비롯해 그와 더불어 '10승대-2점대 신인트리오'를 이루었던 최창호(10승, 2.22, 평균자책점 3위)와 정명원(11승, 2.45, 평균자책점 4위), 15승의 이강철, 타격 2위의 강기웅(.326) 등이 길게 늘어서 '역대 최고의 신인풍년'으로 기록되는 그 해로서는 큰 빛이 나는 성적이 아니었지만 한희민, 이상군에 이어 팀 마운드의 세 번째 기둥이 세워진 순간이었고, 더불어 그의 보직이 '전천후'로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듬해인 1990년부터, 원체 '믿는 투수 하나만 데리고 시즌 치르기'로 유명했던 김영덕 감독은 송진우를 주무기로 낙점했다. 그의 보직은 일단 '마무리'였지만, 등판 시점은 일정하지 않았다.

경기가 쉽게 풀리는 날이면 8회나 9회에 등판해 부담 없이 세이브를 챙겼지만, 한두 점 쯤 앞서거나 뒤져있는 경기의 심상치 않은 순간이면 5회든 6회든 그가 불려나왔다. 그렇게 한 시즌 50경기에서 거둔 세이브가 27개로 통산최다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11번의 구원승을 합친 38세이브포인트는 통산최다 신기록이 되었다. 평균자책점은 1.82.

마무리보다는 선발 쪽의 효용을 조금 더 활용했던 91년에는 11번의 완투까지 곁들이며 11승과 11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고, 다시 마무리 쪽에 조금 더 집중했던 92년에는 4번의 완투를 포함해서 48경기에서 무려 191.1이닝을 던지며 19승과 17세이브로 다승왕과 구원왕 타이틀을 혼자서 석권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다승-구원 동시석권의 금자탑 그리고 얼룩진 19승

그러나 91년 한국시리즈 8회초가 그에게 '한 치의 모자람'이었다면, 92년의 19승째는 그에게 '한 치의 넘침'이었다. 동국대 1년 후배이자 프로입문 동기인 해태의 이강철과 나란히 18승으로 다승 공동선두를 이룬 채 이글스와 타이거즈가 맞붙은 시즌 최종 3연전. 그 중 2차전에 초반 6-0으로 앞서기 시작하자 김영덕 감독은 5회 투아웃 상황에서 무실점으로 호투하던 한희민을 내리고 송진우를 등판시키는 무리를 감행했다.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시즌 19승째를 만들어주기 위한 민망한 배려였다.

남은 이닝을 잘 마무리한 송진우는 19승을 올렸고, 다음 날 등판한 이강철은 장종훈에게 홈런을 얻어맞으며 패해 18승에 멈춰 섰다. 단독 다승왕 겸 구원왕. 마운드의 천하통일. 그러나 사람들은 '조작된 기록'이라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했고, 기자들은 시즌 MVP와 골든글러브 투표에서 41홈런의 장종훈과 17승의 신인 염종석에게 몰표를 주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정규시즌 내내 무리했던 어깨 때문이었는지, '19승'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송진우는 그 해 최고의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는 쓴 맛을 보아야 했다. 1차전부터 3차전까지 선발과 구원으로 연속 등판했지만 승부의 고비마다 매번 실점하고 무너지면서 롯데의 우승 헹가래를 가장 고통스런 자리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일을 벌인 것은 감독이었고, 송진우는 기자들 앞에서 '자신은 원래 타이틀을 탐내는 성격이 아니'라며 난감해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18승이었다고 해도 충분히 위대했을 그의 금자탑은 꺼림칙했던 마지막 1승 때문에 두고두고 뒷말을 남기는 얼룩을 묻히고 말았다.  

세 번의 침체기, 네 번의 전성기

송골매의 눈빛, 송골매의 날갯짓 1999년은 그런 점에서 송진우의 선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껏 ‘강하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달려왔던 송진우는 그해부터 ‘의도적으로 느리게 던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했고, ‘약하게, 약하게, 갑자기 강하게’를 구사하는 선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 송골매의 눈빛, 송골매의 날갯짓 1999년은 그런 점에서 송진우의 선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껏 ‘강하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달려왔던 송진우는 그해부터 ‘의도적으로 느리게 던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했고, ‘약하게, 약하게, 갑자기 강하게’를 구사하는 선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 한화 이글스

이듬해인 1993년에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한 숨 쉬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는 지도 모른다.

홈경기에만 출전하는 '반쪽짜리 선수'로서는 적지 않은 72.2이닝을 던지며 7승과 8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데뷔 이래 4년간 마구잡이로 무리해온 어깨를 아끼고 복잡한 마음도 진정시키며 조금 물러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 팀 사정에도 조금 변화가 생기며 송진우에게 여유를 주기 시작했다. 92년부터 선발진에 가세한 정민철에 이어 93년에 입단해 94년부터 실력발휘를 하기 시작한 구대성은 불펜 쪽의 허전함을 일시에 해결해주었던 것이다.

김영덕 감독에 이어 94년부터 지휘봉을 잡기 시작한 강병철 감독은 그 해 구대성과 송진우를 더블스토퍼로 활용하며 송진우의 비중을 선발 쪽으로 옮겨놓기 시작했고, 95년부터는 선발투수로 전업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송진우가 선발투수로서 95년 13승, 96년 15승을 거두며 제 2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적절한 상황의 변화와 후배 투수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97년과 98년, 평균자책점이 4점대 후반까지 치솟은 가운데 6승씩을 올리는데 그치며 부진하자 송진우의 선수생활이 이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평가가 되어버렸다. 두 해 연속된 성적도 그랬지만, 이미 삼십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와 선수생활 초년기의 무리에 대한 기억이 충분한 근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공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고, 변화구의 각도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으며, 타자들의 타격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진우 자신은 관성에 빠져 있었고, 어제까지는 통하다가 오늘 갑자기 막히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 때마다 공은 맞아나갔고, 송진우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감도 부쩍 줄어들고 있었다.

1999년은 그런 점에서 송진우의 선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껏 '강하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달려왔던 송진우는 그 해부터 '의도적으로 느리게 던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했고, '약하게, 약하게, 갑자기 강하게'를 구사하는 선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완급조절'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힘으로 윽박질러 상대를 무너뜨리고 싶은 짜릿한 유혹을 이겨야 하고, 더 이상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씁쓸한 현실과도 마주해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해진 송진우가 8번의 완투를 곁들여 186.2이닝이나 소화하며 15승을 올리는 의외의 활약 속에서, 팀은 드디어 첫 우승에 성공하기도 했다.

20년간의 도전, 20년간의 응전

20년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을 때마다 그가 민망해하며 그저 '타고난 통뼈라서'라고 답하는 것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기도 한다. 그러나 그 20년간의 '전설'은 끊임없는 위기와 극복이었고 도전과 응전이었으며, 불운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오기와 노력의 역사였다.

2000년에는 선수협 '회장님'으로서 회오리의 중심에서 거의 혼자 몸으로 버텨내면서도 마운드에서도 13승을 올리며 삐딱한 시선을 정면돌파하기도 했고, 지난 2007년에는 데뷔 후 최악의 성적으로 '마지막'을 예상하게 하다가도 올 시즌 또다시 부활하며 '제 4의 전성기'를 열고 있기도 하다.

프로야구에서 투수부문 역대 '최고령'과 '최다'에 관한 모든 전설적인 기록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6년이나 손해를 보며 이 경주를 시작했다. 소년체전 출전 때문에 초등학생 시절 호적을 한 번 고쳐 1년을 '꿇었고', 대학 4년을 보낸 데 이어 올림픽 출전을 위해 대학 동기들보다도 1년 늦게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사실 소심한 편이다. 프로생활 초엽에 겪은 퍼펙트게임 무산의 순간이 그랬듯, 대기록 수립의 코앞에서 그는 늘 주춤거리곤 한다. 지난 2006년 8월 29일 광주에서 역사적인 200승의 대기록을 작성하기 전에도 네 번이나 고개를 숙인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고, 올 6월 6일 통산 2000탈삼진 기록을 달성하기 전에도 한 경기에 삼진 두 개 잡기도 빠듯해하며 팬들이 준비한 플래카드를 말아쥔 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게 만든 5월 한 달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남들보다 늦게 출발해 뛰고 걷고를 반복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번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목표지점을 향해 걸어왔고, 좋은 날에는 토끼처럼 뛰어서, 궂은 날에는 거북이처럼 기어서 누구도 꿈꾸어보지 못한 곳에 닿았으며, 또 지나치고 있다. 분명한 목표의식과 끈질긴 도전이야말로 가장 강한 무기임을, 그는 한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6이닝을 더 던진다면, 통산 3000이닝이라는 또 하나의 금자탑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라운드에서 그가 도달할 마지막 목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최초로 150승을 돌파하고 200승을 돌파해 모두가 '다 이루었다'고 박수칠 때도 혼자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짜릿한 승리와 찬란한 기록, 그리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반전과 그 끈질긴 승부의 감동. 그와 더불어 우리는 야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깊이 느꼈고, 미처 알지 못하던 구석을 새로이 배우기도 했다. 굴곡이 있었고, 소소한 논쟁거리들을 남기기도 했지만 삶 전체로써 모든 논쟁을 덮기에 충분했던, 그래서 '최고의 선수'로서 논쟁의 여지 없이 꼽을 수 있는, 그런 선수를 직접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 모든 야구팬들의 커다란 행운이다.

20년 에이스, 송진우 그는 남들보다 늦게 출발해 뛰고 걷고를 반복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번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목표지점을 향해 걸어왔고, 좋은 날에는 토끼처럼 뛰어서, 궂은 날에는 거북이처럼 기어서 누구도 꿈꾸어보지 못한 곳에 닿았으며, 또 지나치고 있다.

▲ 20년 에이스, 송진우 그는 남들보다 늦게 출발해 뛰고 걷고를 반복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번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목표지점을 향해 걸어왔고, 좋은 날에는 토끼처럼 뛰어서, 궂은 날에는 거북이처럼 기어서 누구도 꿈꾸어보지 못한 곳에 닿았으며, 또 지나치고 있다. ⓒ 한화 이글스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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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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