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에서 기록의 가치를 굳이 비교하자면 '최고' '최초'보다는 '통산최다'가 앞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절대 깨지지 않을' 희소성을 따져보자면 장명부의 시즌 30승과 427이닝투구, 백인천의 .412타율, 선동열의 0.78 평균자책점이 앞서겠지만, (게다가 모든 '최초'의 기록들은 애초에 깨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록된 숫자 하나하나로부터 미루어 상상하게 되는 삶의 굴곡과 피땀의 농도를 놓고 더 깊이 고개 숙여지는 것은 양준혁의 안타수와 송진우의 승수, 그리고 전준호와 조웅천의 출장경기 수 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도 현역으로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며 하루하루 통산기록을 바꾸어나가는 그들 '살아있는 전설'의 모습을 직접 지켜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가 선동열과 최동원의 전설적인 완투대결을 직접 경기장에서 지켜보았더라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듯, 언젠가는 양준혁과 송진우가 만들어낸 마지막 숫자의 현장에 관한 나의 증언에 귀 기울일 다음 세대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7월 23일 경기에서 130승 고지를 밟은 김원형도 통산 승수 부문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한 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물론 통산 1, 2위를 달리고 있는 송진우와 정민철에 비하면 갈 길이 멀지만, 그 뒤로 돌아보면 현역 투수들 중 통산 100승 고지를 간신히 넘어서고 있는 김수경 정도가 눈에 띌 정도로 멀찍이 앞서온 길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들 중에서도 김원형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은 많이 다르다. 그는 송진우와 정민철, 그리고 후배 김수경과도 달리 단 한 번도 '최고'로 꼽힌 적이 없는 투수이며, 또 그만큼의 열광적인 성원과 주목을 받아본 적도 없는 선수다.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미치지 않는 저 뒤쪽 어딘가에서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선수였다. 그래서 어느새 정민태와 김시진과 조계현을 넘어 선동열이 멈춰섰던 그 자리를 향해 기어오르며 새삼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거북이 같은 사람이다.

선동열 상대로 완봉승한 18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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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신생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18세였다. 그 때만 해도 흔하지는 않았던 고졸 신인이었고, 신인으로서 쉽지 않은 선발요원이었다. 그리고 4월 26일에 일찌감치 역대 최연소 완투승을 기록하면서 기분 좋은 출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의 승리를 경험하기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연속된 패배를 당하도록 무심하게 선발 로테이션에 넣어두었던 김인식 감독에게 그만 2군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하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매서운 담금질을 경험하기도 했다.

흔히 '믿음의 야구'로 불리는 김인식 감독에게서 그저 마음 좋은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오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근거 없는 믿음은 그저 미련이거나 도박일 뿐이고, 그것에 매달려서는 결코 '명장'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김인식 감독의 '믿음'이 결국 통하는 것은 그만큼이나 날카로운 안목과, 그것에 대한 꼼꼼한 자기검증의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김원형은 원체 좋았던 직구에 아직까지도 역대 최고의 명품구질 중 하나로 꼽히는 낙차 큰 '김원형표 커브'를 이미 완성된 형태로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역 명문 군산상고에 밀리며 전국무대에 이름 한 번 제대로 내밀어보지 못했던 전주고의 에이스였던 이유로 어깨마저 싱싱한 재목이었다.

명투수조련사 김인식 감독이 그런 강점을 몰라볼 리 없었고, 아홉 번의 실패 속에서 몸으로 느낀 깨달음과 이를 악물며 다져놓은 근성은 그 해 8월 21일,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2안타 10탈삼진으로 완봉승을 거두게 했다.(그날의 패배는 프로야구사상 유일무이한 '3년 연속 20승'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며칠 뒤 5회부터 등판해 이강철의 승수를 가로채는 등의 자존심 상하는 무리를 감행하게 만든 계기였다는 점에서 정말 뼈아픈 일격이었다고, 선동열 역시 자신의 자서전에서 술회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두 해 뒤 93년 4월 30일에는 OB 베어스를 상대로 최연소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특급투수'로 성장하는 밑바탕이 될 수 있었다.

꼴찌의 전설, 레이더스의 에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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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력으로는 특급이었던 그가 특급으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던 것은, 그가 속한 팀 쌍방울 레이더스가 워낙 빈약하고 빈틈 많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출범 첫 해 탈꼴찌에 성공하며 가능성을 보이던 레이더스는 팀 주전의 절반 이상이 함께 '2년생 징크스'를 겪으며 꼴찌로 추락하더니 좀처럼 바닥을 헤어나지 못하고 95년까지 '7-8-8'의 성적을 남기며 앞 세대 삼미 슈퍼스타즈를 잇는 새로운 꼴찌 팀의 전설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김원형은 해마다 140이닝 안팎을 던지며 부실한 수비와 맥 빠지는 공격력을 등에 업은 채 3점대 안팎의 무난한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1승을 올린 93년을 제외하면 해마다 승수는 5승에서 9승 사이를 오갈 뿐이었다.

96년과 97년, 쌍방울은 '돌풍의 설계사' 김성근을 감독으로 맞으며 두 해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기적을 일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두 시즌 역시 제 1선발로 맨 앞에서 돌격해나간 투수 김원형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김원형의 성적은 5승과 9승에 불과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안정된 수비망과 끈끈해진 공격력 한편에서 마운드는 특유의 '벌떼 식 운영'으로 전환되며 에이스인 김원형이라도 조금만 흔들리면 앞서가는 경기 5회 진행 중에라도 지체 없이 교체되는 상황이 무한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작 그가 선수 인생 최고의 성적을 올린 것은 1998년, 바로 쌍방울 레이더스라는 야구단의 뿌리가 뽑혀나간 IMF 당시였다. 그 해 김원형은 마무리 역할을 대부분 감당하며 무려 150이닝을 던졌고, 2.52의 평균자책점으로 12승과 13세이브를 따내는 대활약을 펼치며 공수의 핵인 포수 박경완과 마무리투수 조규제를 현대로 팔아넘겨야 했던 팀의 몰락을 그나마 6위권에서 멈춰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9년. 김원형은 선수생활의 가장 끔찍한 터널을 지나가야 했다. 바로 그 해 7월 10일, 때로는 내야수가 점프를 해서 잡으려고 시도할 정도의 낮은 궤적의 직선으로 펜스를 넘길 만큼 강했던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고 광대뼈와 코뼈가 내려앉는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몇 차례의 수술과 재활에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이제 김기태와 김현욱마저 삼성에 팔아넘기고 받은 얼마간의 돈으로 운영비를 메워야 했던 '빈 껍질' 쌍방울 레이더스는 KBO로부터 법정퇴출을 선고받았고 한국 프로야구사상 첫 해체의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가 자리를 털고 돌아왔을 때, 이미 홈구장은 전주에서 인천으로 옮겨져 있었고, 동료들은 SK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2000년 5월, 10개월 만에 경기장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채 지워지지 않은 타구에 대한 공포감은 그의 투구 폼을 묘하게 흔들어놓았고, 그렇게 몸 사리고 눈치 봐가며 던지는 밋밋한 공은 지긋지긋하게 맞아나가기 시작했다. 무려 13개월간 이어진 14연패. 그 해 8월 22일 1이닝만을 던지고 기록원에 의해 '가장 효과적인 투구'로 인정받아 행운의 구원승을 얻기까지 그를 옥죄어댔던 연패의 사슬은 그렇게나 길고 질겼다.

유독 자신에게만 불친절한 운명, 그리고 엎친 데 덮친 듯한 치 자비도 없이 찾아드는 불운. 약체 팀의 불운은 팀 해체라는 비운 앞에서 그나마 그리운 과거가 되어버리고, 마음에 차지 않는 성적은 그나마 13개월 동안이나 연패의 늪을 헤매게 만들어버린 부상과 독한 슬럼프 앞에서 감지덕지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그런 운명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은 질긴 근성,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김원형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인지 모른다.

그 13개월간의 슬럼프를 간신히 뚫고 지나왔을 때, '어린왕자'로 불렸던 얼굴 뽀얀 고졸신인은 이미 서른 줄에 들어서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직구의 구속과 볼 끝도 조금은 무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원형은 운명과 세월에 맞서 '아직 죽지 않았다'고 고집부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새롭게 슬라이더를 연습하고 볼 배합을 새로이 연구하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유연한 선수였다.

새 팀 SK에서도 그의 보직은 여러 번 바뀌었다. 선발로 기용되기도 했고, 마무리로 뛴 적도 있으며, 최근 몇 시즌은 계투로 주로 투입되고 있다. 그것도 흔히 '마당쇠'라고 불리는 '롱릴리프', 즉 일찌감치 선발이 무너지거나 마무리가 조기에 소진된 연장경기, 혹은 주력 필승 조를 아껴야 하는 패전처리의 상황까지 그는 무시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투수진 최고참급으로서 그 모든 과정에 한 마디 불평 없이 최선을 다하며 선수단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바로 김원형이다.

가늘고 길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 걸어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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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시즌 전 전지훈련장에서 만났을 때,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좀 더 강한 팀에서 선수생활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 밖의 답을 돌려주었었다.

"저는, 약한 팀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강한 팀에 있었다면, 이렇게 길게 선수생활을 할 기회가 주어졌겠습니까?"

덧붙여 원래도 그랬지만, 두 아이의 아빠가 되고 보니 보다 확실히 '가늘고 길게 주의자'가 되었다며 웃는 김원형.

그는 지금껏 130번 승리하며 웃은 투수이기도 하지만 무려 137번이나 패배하며 눈물 흘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어린왕자'라는 별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어둡고 험한 길만을 걸어온 그늘 속의 투수였으며, 몇 되지 않는 팬들의 기억 속에서 안타깝고 안쓰러운 눈물을 함께 흘린 눈물의 영웅이기도 하다.

강팀의 선봉장은 시원한 쾌감을 주지만 약팀의 버팀목은 진한 감동을 준다. 김원형은, 잊고 있던 세월동안 진하게 우러나 자신을 삭혀온 세월을 돌아보게 만드는 와인처럼 뒷맛이 깊은 이름이다.

덧붙이는 글 관련 자료를 제공해주신 다음카페 '쌍방울 레이더스'(http://cafe.daum.net/sbwraiders)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김은식 기자는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이상 풀로엮은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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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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