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내내 주전 1루수 겸 4번 타자로서 인천 팀의 중심을 지켰던 '미스터 인천' 김경기 코치에게 들은 이야기다.

"1994년도 시즌 전인데, 누가 방으로 찾아 와서 그러더라고. '이번에 2차 지명 1번으로 들어온 이숭용이라고 합니다. 제가 선배님의 1루수 자리를 뺏어보겠습니다' 라고. 그래서 나도 '그래, 열심히 해봐라. 나도 다시 한 번 분발하는 계기가 되겠구나'하고 보냈는데, 말하자면 '도전장'을 받은 거지."

1994년 신인드래프트에서는 서울 출신 선수들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투수로 류택현과 인현배가 있었고, 야수로는 월척급의 유지현을 빼더라도 김한수, 김종훈, 혹은 한두 해씩 늦게 들어온 임수혁과 박재용 등이 준척급으로 통했다. 지방 출신중에는 인천의 최상덕과 부산의 강상수 정도가 눈에 띌 뿐이었다.

그 중에서 서울 팀 베어스와 트윈스가 각기 류택현과 유지현을 1차로 지명한 뒤 전년도 꼴찌로서 2차 1번 지명권을 쥐고 있던 돌핀스가 찍은 것이 국가대표 1루수 이숭용이었고, 한참을 건너 뛰어 전년도 우승팀 타이거즈가 지명한 것이 그와 국가대표 1루를 분담했던 허문회였다. 단국대 출신의 동갑내기 1루수 서용빈이 그 해 드래프트 파장 직전에 턱걸이 하다시피 트윈스의 지명을 받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1994년 최고의 유망주

이숭용의 타격자세 신인시절, 그는 한껏 웅크렸다가 공을 맞히는 순간 온몸을 활짝 전개하며 퍼 올리는, 마치 온몸의 체중을 실은 원심력으로 날려대는 대포 같은 타격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 이숭용의 타격자세 신인시절, 그는 한껏 웅크렸다가 공을 맞히는 순간 온몸을 활짝 전개하며 퍼 올리는, 마치 온몸의 체중을 실은 원심력으로 날려대는 대포 같은 타격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 우리 히어로즈


왼손타자 부재와 거포 부재. 인천 야구의 해묵은 과제를 해결해줄 적임자로 선택된 그에게 거는 안팎의 기대는 컸다. 과연 '미스터 인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았던 것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185cm의 키에 90kg에 육박하는 거구의 왼손 타자. 게다가 그의 타격자세는 꽤나 낯설면서도 거창했다. 타격 준비단계에서 그의 앞쪽 다리는 엉덩이 뒤쪽으로 한참 물러난 곳을 디딘 채 투수를 바라보는 듯한 오픈스탠스였고, 한껏 길게 배트를 늘여 쥔 두 주먹은 바로 헬멧의 왼쪽 귀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막상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오른쪽 다리를 홈플레이트 앞까지 당겨 넣은 크로스스탠스로 전환하며 한껏 웅크렸다가 공을 맞히는 순간 온몸을 활짝 전개하며 퍼 올리는, 마치 온몸의 체중을 실은 원심력으로 날려대는 대포의 느낌.

그러나 데뷔 첫 해 그는 그렇게 격하게 휘두른 배트로 공을 제대로 맞춰내지 못했고, 어쩌다 한 번씩 제대로 맞혀냈다 싶은 타구의 비거리 역시 생각보다 길지 못했다. 그는 좋은 선구안과 배트컨트롤, 그리고 힘까지 겸비한 데 반해 순간동작이 민첩한 편은 못되는 선수였다. 타격 준비단계에서부터 잔뜩 힘을 집중하다보니 오히려 한 순간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곤 했던 것이다. 그는 그 해 주로 교체멤버로 가능성을 시험 받으며 84경기를 뛰었고 2할3푼에도 못 미치는 타율에 단 세 개의 홈런만을 기록했을 뿐이었다.

반면 그의 도전 상대였던 김경기는 무려 23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시즌 막판까지 김기태와 함께 홈런왕경쟁을 벌였고, 그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인천야구 사상 처음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경사를 맞았다. 게다가 그가 경쟁상대라고 생각해본 적조차 없었던 LG의 서용빈은 팀 내 동기생 허문회(해태에서 LG로 지명권 양도)를 일축하며 주전 자리를 잡은데 이어 3할 타율에 사이클링히트라는 훈장까지 얹어가며 그 해 1루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기까지 했다.

벅찬 목표를 놓치고 한숨 몰아쉬는 사이 까마득한 뒷줄에서 출발해 순식간에 추월해서는 저만큼 멀찍이 달아나버린 후발주자에게 쏟아지는 환호들. 그것은 '질투심' 이전에 자신의 처지를 비추어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거울이었다.

지나친 기대와 찬사, 그리고 넘치는 자신감. 그러나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새 무대에서의 좌절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짐이 되어 내리누르며 무릎을 꺾이는 유망주의 길을 그도 따라 가고 있었다. 욕심을 버리고,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충고인 듯 조롱인 듯 귓전에 쌓여가던,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해 말쯤엔가, 숭용이가 다시 내 방을 찾아왔어. 그리고, '선배님한테는 제가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1루수 포기하고 외야로 나가겠습니다' 그러더라고. 그 때부터 그 녀석하고 굉장히 친해졌어. 용감하게 도전장 내밀고, 당당하게 경쟁하고, 깨끗하게 승복하고. 이게 '사나이'잖아."

김경기 코치는 상대하는 사람들을 곧잘 '사나이'와 '양아치'로 구분한다. 제 힘만 믿고 우쭐대다가 더 강한 힘과 마주하면 어쩔 줄 몰라 무너지는 '양아치', 그리고 힘은 힘대로 겨루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투명하게 눈빛과 웃음을 나눌 줄 아는 '사나이'.

사실 기막히게 잘했던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물 나는 어떤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도 아닌 야구선수. 그래서 지금껏 15년간의 선수생활동안 딱 세 번 3할 타율에 턱걸이를 해봤을 뿐이고, 스무 개 이상의 홈런을 날려본 적도 없는데다가 개인타이틀은커녕 골든글러브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평범한 이름 '이숭용'이 가지는 매력의 핵심은 '사나이'라는 그 단어에 응축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사나이' 이숭용에서 유니콘스의 '캡틴'으로...

달려라, 이숭용 달릴 때면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둔한 몸.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는 선수이기도 하다.

▲ 달려라, 이숭용 달릴 때면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둔한 몸.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달리는 선수이기도 하다. ⓒ 현대 유니콘스


1996년, 현대가 태평양으로부터 돌핀스를 인수해 유니콘스로 새 출발을 하면서 그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달릴 때면 머리가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둔한 몸이지만 이를 악물고 달려대며 중견수 수비를 감당했고, 타선에서는 동갑내기 권준헌과 함께 '형님' 김경기 앞뒤로 늘어서 최소한 시각적으로는 '8개 구단 최고'를 넘어 '메이저리그 급' 중량감을 과시하는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하기도 했다. (김경기, 이숭용, 권준헌은 모두 185cm의 거한들이다.)

2000년부터는 SK로 옮겨간 김경기로부터 1루수 자리를 물려받았고, 해마다 오고 갔던 외국인선수, 혹은 심재학, 심정수, 박경완 등 거포들과 짝을 이루어 중심타선을 지켜갔다. 그래서 현대의 첫 해였던 1996년 .280의 타율에 12개의 홈런을 날리며 주전에 자리를 잡은 이래, 현대의 마지막 해였던 지난 2007년 .301의 타율을 기록하기까지, 이숭용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거의 전 경기를 출장하며 2할 대 후반의 타율로 '변수'가 많았던 현대 타선의 '상수' 역할을 했다.

꾸준한 활약과 사나이의 기질. 연차가 쌓이자 자연히 그는 선수단의 리더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2003년부터는 또 자연스럽게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야구팀에서 주장의 역할은 생각보다 크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큰 팀이 이기는' 경기라고 할 만큼 선수들의 뜻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경기가 야구인데다가, 아무래도 선 자리가 다른 코칭스태프가 할 수 없는 고참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동료애와 더불어 복잡한 목소리 사이를 잇고 맺는 판단력이 채워지지 않으면, 일 년 내내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하는 수십 명의 사내들은 흔히 패거리나 파벌 따위의 수렁에 빠지기 쉬운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숭용은 역대 최고의 주장 중 하나로 꼽힌다. 그는 지켜주어야 할 것과 고쳐주어야 할 것을 잘 구분하는 선배였고, 얄팍한 임기응변 대신 진정성 있는 뚝심으로 상대를 설득하는 리더였기 때문이다.

그가 팀의 주장을 맡은 2003년과 2004년에 유니콘스는 연속 우승에 성공했고, 그 우여곡절을 겪어가면서도 선수단이 8년째 남다른 인연도 없는 임수혁 선수 돕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한 것 역시 그의 힘이었다. 그 모든 과정에서 이숭용의 역할을 보아온 이들이 붙여준 별명이 바로 '캡틴'이었다.

유니콘스, 그리고 히어로즈...

연고지 인천을 떠난 2000년 이후, 현대 유니콘스는 프로야구계의 미아가 되어버렸다. 7년 동안이나 1차 지명을 할 수 없었고, 임시 홈구장으로 쓰던 수원구장은 대개 원정 팀 관중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리곤 했다. 그리고 지난겨울, 끝내 역사상 두 번째로 해체된 야구단의 비운을 맛보아야 하기도 했다.

부산 원정이라도 가서 서러운 일 당한 날이면 '다음 홈경기 때 보자'고 벼를 언덕조차 없었던 그 일곱 해. 그리고 하루하루 다가오는 해체와 집단실직의 운명 앞에서 발버둥 치며 눈물 뿌렸던 지난 가을과 겨울 사이의 시간들. 그 사이에 다시 세 번이나 우승을 이루어냈던 것은 그만 두더라도, 그 거칠고 막막한 시간을 지나면서도 끝내 무너지는 모습 보이지 않아준 것만으로도, 유니콘스 선수단은 참 대단했고, 그 중심에 서 있던 이숭용도 참 훌륭했다.

공 하나의 움직임을 따라 수십억의 돈이 오가는 그라운드.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맨몸으로 부딪혀 힘을 겨루며, 때로는 한방을 쓰는 동료의 부상을 내심 기뻐해야 하는 그곳을 어떤 이는 '정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자'를 만나기는 쉬워도 '남자'를 만나기는 어렵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어쩌면 가장 강하지도 못했고, 가장 화려하지도 못했지만 이숭용이라는 이름이 여러 가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역설적이지만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유니콘스가 12년간의 팀의 역사에서 네 번이나 우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민태와 박진만이 있었기 때문이고, 쿨바, 퀸란, 브룸바 같은 좋은 외국인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라진 팀 유니콘스를 기억할 때, 그들의 이름보다 더 깊은 떨림을, 이숭용이라는 이름에서 느끼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함께 웃은 기억보다,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견뎌낸 시간이 더 깊이 새겨지기 때문이다.

현대 유니콘스 유니콘스 우승의 주역은 정민태, 박진만, 그리고 좋은 외국인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팀 유니콘스를 떠올리며 이숭용이라는 이름에서 더 깊은 울림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 현대 유니콘스 유니콘스 우승의 주역은 정민태, 박진만, 그리고 좋은 외국인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라진 팀 유니콘스를 떠올리며 이숭용이라는 이름에서 더 깊은 울림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 한국야구위원회


덧붙이는 글 기자소개 :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이상 풀로엮은집) 등이 있다.
이숭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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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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