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트윈스 신인 트로이카 94년 유지현(가운데), 김재현(왼쪽), 서용빈(오른쪽)은 각각 1,2,3번 타자로 개근하며 203타점과 262득점을 합작해냈다. 그 해 트윈스의 우승은 그들 신인 트로이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 94년 트윈스 신인 트로이카 94년 유지현(가운데), 김재현(왼쪽), 서용빈(오른쪽)은 각각 1,2,3번 타자로 개근하며 203타점과 262득점을 합작해냈다. 그 해 트윈스의 우승은 그들 신인 트로이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 엘지 트윈스


내가 생각할 때 한국야구가 재미있는 것은, 역시 뉴욕 양키즈나 요미우리 자이언츠 같은 팀이 없기 때문이다. 자금력과 정치력으로부터 성적과 관중동원력까지 월등하게 솟아있는 '중심부'와 돌아가며 주고받는 '이변'과 '돌풍'의 알리바이로 구색을 맞춰가는 '주변부'가 질서를 만들고 있는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고만고만한 강점과 약점, 영광과 상처를 가진 여덟 개의 팀이 도토리 키 재기 하듯 어깨싸움 벌이며 만들어가는 현실감 가득한 드라마가 나를 매료시킨다. 

한 시대 '왕조'라 불렸지만 '중심부의 거만함'보다는 가장 빈약했던 자금력과 정치력을 딛고 일어선 맨손의 투혼을 떠올리게 하는 해태 타이거즈, 예나 지금이나 최고 최대의 팬을 보유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을 웃음짓게 한 세월보다 눈물 흘리게 한 세월이 훨씬 길었던 롯데 자이언츠, 그리고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최고의 선수들을 끌어 모으고도 끝내 한 고비를 넘지 못하고 흘려온 눈물로 진한 페이소스를 남긴 삼성 라이온즈까지.

그래서 굳이 삼미 슈퍼스타즈와 쌍방울 레이더스의 처절함을 갖다대지 않더라도 10여 년 넘게 한국프로야구를 지켜보아왔다면, 단지 승리와 환희의 깔끔한 기억만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야구는 함께 웃은 기억 이전에 함께 눈물 흘린 기억으로 깊숙이 뿌리내리며 자라왔다.

그러나 한국에도 '양키스'가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던 때가 있었다면 바로 1994년이다. 분명 양키스의 의식적 모방이었으리라 생각되는 줄무늬 유니폼의 트윈스가 압도적인 전력과 인기를 자랑하며 거침없이 한국야구사의 중심부로 솟아오른 해였기 때문이다.

한국판 양키스의 출현, 94년 트윈스

프로원년의 청룡 이래 트윈스는 최대의 선수 공급지이자 소비시장인 수도 서울을 연고로 가져왔지만 성적과 흥행 모든 면에서 중심에 서지 못했다. 93년까지 열두 해 동안 청룡이 준우승을 한 번, 트윈스가 창단 첫 해인 90년에 우승을 한 번 차지한 적이 있었지만 그 외의 10년간은 주로 중하위권을 맴돌며 '역시 운동은 서울보다 지방'이며 '배고픈 놈들이 독하게 뛰는 법'이라는 통념에 현실적 근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조연이었을 뿐이었고 관중 수에서도 그 두 해를 빼면 그리 두드러지지 못했던 평범한 팀이었다.

그러나 1994년, 당초 시즌 전까지 전문가들에 의해 4강권 후보로도 꼽혔다 말았다 했던 엘지 트윈스는 2위 돌핀스와 무려 11.5경기라는 사상 최대 격차를 벌리며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한국시리즈마저 4연승으로 휩쓸며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전문가들의 계산속에 '미지수'로만 남아있던 유망주 유지현과 김재현, 그리고 아예 계산 속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무명신인 서용빈이 1·2·3번 타순을 꿰차고 무려 203타점과 262득점을 합작해내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해도 신인 셋만 가지고 우승컵을 얻을 수는 없다. 해태왕조 타선의 핵으로 군림해왔지만 딱 그 무렵부터 부정적 전망이 긍정적 전망을 앞서기 시작했던 대졸 12년차의 '퇴물급 이적생' 한대화가 다시 3할에 육박하는 방망이와 극적인 클러치능력을 과시하며 4번 타순을 지켜주었고, 30세 김태원이 16선발승을 올렸고, 두 해 전 좌골신경통 때문에 선수생활이 끝날 위기에까지 몰렸던 35세 노장 김용수가 35세이브포인트를 기록하며 부활해 뒤를 지켜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18승을 올리며 에이스로 우뚝 선 2년차 이상훈, '3인방'에는 밀렸지만 역시 10승을 올린 신인 인현배, 불의의 복병 서용빈에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당초 한대화와 트레이드되어 나간 '미스터 LG' 김상훈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있었던 국가대표 1루수 출신의 신인 허문회, 그리고 2할대 후반의 타격과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자랑한 공수겸비의 4년차 포수 김동수와 3할과 20-20이 가능한 4년차 3루수 송구홍으로 이어지는 신진들의 기세는 올해보다는 내년을, 내년보다는 후년을 기대하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3년차였던 미들맨 차명석의 회상처럼, 그들 스스로도 '못해도 2년에 한 번 꼴로는 우승을 할 것으로'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전력이었다.

그리고 그들 '90년대산' 신인들은 실력 외적인 면에서도 트윈스라는 팀에 새로운 색깔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모델 뺨치는 외모와 패션 감각, 그리고 여유 있는 미소와 쇼맨십. 김인식과 이종도의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 그리고 원년 4할을 쳤던 감독 겸 선수(그리고 트윈스의 첫 우승감독) 백인천의 고비마다 꿈틀거리던 미간이 상징하던 촌스런 근성의 팀이 드디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돌파하며 OECD로 진입한 선진국의 수도 서울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중심의 정서를 몰고 온 것이다. 지난 91년과 92년 롯데 자이언츠가 개척한 '100만 관중 구단'의 영예가 고스란히 트윈스로 옮겨진 것은, 바로 그런 야구사적, 문화사적 흐름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전설의 신인 3인방, 그 선두의 유지현

더블플레이를 성공시키는 유지현 '10년짜리 유격수' 김재박이 떠난 이후 남아있던 내야의 커다란 공백을 메운 것은 또다른 '10년짜리 유격수' 유지현이었다. (오른쪽은 송구홍, 아래는 양준혁)

▲ 더블플레이를 성공시키는 유지현 '10년짜리 유격수' 김재박이 떠난 이후 남아있던 내야의 커다란 공백을 메운 것은 또다른 '10년짜리 유격수' 유지현이었다. (오른쪽은 송구홍, 아래는 양준혁) ⓒ 엘지 트윈스



그들의 중심에 유지현이 있었다. 그 전설적인 새별들의 문화혁명 와중에서도 가장 빛났던 별, 그래서 그 해 사상 첫 신인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한 서용빈과 사상 첫 신인 20-20을 기록한 김재현을 제치고 신인왕 트로피를 차지했던 것이 바로 유지현이었다.

데뷔 첫 해인 94년에 1번 타자로 개근하며 .305의 타율(출루율은 .391)과 51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무려 109번이나 홈플레이트를 밟았고, 동시에 15개의 홈런과 51타점을 기록하며 어지간한 팀 4번 타자들의 기마저 눌러 놓았던 경악스러운 성적이었다. 그러나 유지현의 가치가 돋보인 것은 오히려 공격보다는 수비 쪽이었다.

야수들 중에서도 유격수가 가지는 가치는 각별하다. 유격수는 가장 까다로운 타구가 가장 빈번하게 향하는 공간에서 건져 올린 무수한 공들을 그라운드 반대편의 1루수에게 보내야 한다. 따라서 빠른 판단력과 순발력, 글러브 컨트롤에 강한 어깨를 가져야 한다. 또 다양한 돌발상황에 대한 대처능력과 혹 실책을 범하고라도 곧바로 마음에서 털어내고 다음 공과 대결할 수 있는 대담함, 그리고 전체 내야진을 지휘하며 조화시키는 폭넓은 시야와 리더십까지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프로야구팀이 좋은 유격수를 건질 기회는 10년에 한 번 돌아온다는 속설마저 있는 것이며, 그 기회를 놓친 팀이 10여년 이상 내야 한복판에 '시한폭탄'을 품은 채 경기를 해가는 모습 또한 우리는 실제로 종종 목격하곤 하는 것이다.

유지현의 수비능력은 고교시절부터 최고로 평가받고 있었지만, 특히 주어진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순발력과 스피드, 그리고 풋워크가 좋았다. 그리고 그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선수였다.

그래서 예상했던 반대편으로 날아 외야로 빠져나가는 강습타구를 순식간에 추격해 걷어 올리거나 딱딱한 잠실구장의 바닥이 쏘아 올리는 불규칙바운드를 반사적으로 처리하는 묘기로 야구 보는 즐거움에 한 가지를 더해놓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부족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충격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야진을 구축했다. 그에 의해 '10 년 짜리 유격수' 김재박이 떠난 뒤로 5년여간 트윈스의 대표적인 약점으로 지적되어온 2루와 3루 사이의 공간은, 거꾸로 트윈스 최대의 강점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완벽에 한 치 못 미쳤던, 그러나 상대팀을 가장 괴롭혔던 선수

유지현은 완벽한 선수는 아니었다. 때로는 넓은 수비범위에 대한 자신감이 넘쳐 3루수나 2루수에게 맡겨야 할 공을 건드리는 실책으로 입맛을 다시게 했다. 이따금은 완벽한 안타성 타구를 걷어 올리며 터져 나온 탄성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1루수 뒤를 받치러 달려온 포수마저 어찌해볼 수 없는 곳으로 악송구를 날려 결국 2루까지 허용, 응원석을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첫 해 그가 기록한 실책은 24개였다.

공격 면에서도 좋은 타율과 출루율에 장타율과 도루능력까지 갖춘 그였지만, 뭔가 완벽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그의 모습이기도 했다. 예컨대 절대 초구를 건드리지 않고 끈질기게 볼카운트를 늘리며 승부하는 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이긴 했지만, 그 끈질긴 승부의 끝이 반드시 출루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타격기술과 반사신경 보다는 노림수에 의존하는 쪽이었기에 그의 계산을 읽어낸 노련한 배터리의 결정구에는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들어오는 3구를 무조건 흘려보내는 관성의 허를 역으로 찔려 허무한 삼구삼진으로 돌아 나오는 일도 심심치 않았다. 타고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선구안과 커트능력을 바탕으로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건드리지 않는 공은 무조건 볼'이었다고 할 정도로 정밀한 승부를 벌였던 타격천재 장효조와는 다른 느낌의 선수였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전성기의 장효조나 이종범, 혹은 박정태나 김기태처럼 홈플레이트를 바위로 막아놓은 듯 한 압박감을 주는 타자는 아니었다. 전성기의 유중일이 그랬고 박진만이 그렇듯 지켜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유격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팀 선수와 팬들에게 강요하는 성가시고 불쾌한 느낌으로는 저 천재들 모두를 능가했다.

그는 언제나 노림수를 준비했고, 그의 표정은 이미 그 노림수가 맞아 들어가기라도 한 듯 희열에 넘쳐있었다. 마치 '가위'를 내겠다고 미리 말해놓고 빙글빙글 웃어가며 가위바위보를 시작하는 능글맞은 동네 형처럼. 그는 상대팀 감독과 배터리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선수였다.

열 번이면 여덟 아홉 번은 아무리 가운데로 몰리는 밋밋한 직구라 하더라도 초구를 건드리지 않고 지켜보며 볼카운트를 늘려 상대 투수를 괴롭히는 그였지만, 또 한두 번은 그런 그의 계산을 읽고 들어오는 느긋한 초구를 공략해 '선두타자 초구홈런'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였다. 그리고 1루에 나가면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연달아 던져진 견제구가 역설적으로 풀어놓은 배터리의 빈틈에서 도루타이밍을 잡아내 상대방 가장 아픈 구석에 못을 박는 선수이기도 했다.

이미 '나는 지금 뭔가를 노리고 있다'고 소리치는 듯 한 표정과 몸짓으로 웅크리고 있다가, 그것이 들어맞으면 통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실패하면 이런 수까지 읽어낸 너도 제법이라는 듯 터뜨리는 그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면서,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치고 속으로 치를 떨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재능보다는 노력으로 승부한 2인자

유지현의 수비동작 그는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순발력과 스피드, 풋워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선수였다.

▲ 유지현의 수비동작 그는 순간적으로 움직이는 순발력과 스피드, 풋워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선수였다. ⓒ 엘지 트윈스



그는 순발력보다는 노림수로 상대 투수를 공략했고, 스피드보다는 오히려 타이밍을 뺏는 센스로 2루를 훔쳐냈다. 그는 통산 6위에 해당하는 무려 .777의 성공률로 296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는데, 많은 도루 시도와 개수가 발의 빠르기를 보여준다면 성공률은 타이밍과 슬라이딩과 같은 도루의 '기술'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그는 보기와 달리 재능보다는 노력으로 승부했던 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겉보기와 달리 그의 선수인생이 그렇게 내내 자신만만하고 순탄했던 것도 아니었다. 고교와 대학을 거치며 항상 '랭킹 1위'의 내야수로 꼽혔지만, 프로무대에서 그는 단 한 번도 '1인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작은 체격과 '천재'의 경지에 조금 못 미쳤던 순발력과 동체시력, 그리고 대학 4학년 때 당했던 어깨부상 때문에 줄어들었던 송구능력 같은 '운명'의 간격을 노력으로만 메우기에는 너무나 완벽했던 동시대 유격수 이종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지현은 94년 신인왕에 이어 98년과 99년 유격수부문 골든글러브를 차지해 '상복이 많은' 선수로 통한다. 그러나 그 98년과 99년에는 절정기의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가 있던 시기라는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이종범은 이미 한국에서 뛰던 93년부터 97년 사이에 4번이나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챙겨놓고 있었고, 사람들은 80년의 유격수 김재박(골든글러브 5회)과 2000년대의 유격수 박진만(골든글러브 5회) 사이에 놓인 90년대를 이종범의 시대로만 기억한다.

유지현이 '송구 하나만 빼면 거의 완벽한' 수준급 유격수였지만 이종범은 '다 좋은데 빨랫줄같은 송구는 특히 좋은' 완벽한 유격수였고, 유지현은 3할을 오르내리는 공격력을 갖춘 공수겸비형 유격수였지만 이종범은 4할마저 넘보는 '타격천재'였으며, 유지현은 50개가 넘는 도루를 성공시킨 스피드와 15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을 정도의 파워를 가졌지만, 이종범은 80개 이상의 도루능력과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할 수 있는 '완벽'한 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유지현은 팀에서는 붙박이 유격수였지만, 대표팀에 나가면 2루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물론 이종범을 위해 유격수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무너진 왕조의 꿈

90년대 말, 선동열과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 경제위기를 맞이한 한국땅에서 이종범의 팀 해태 타이거즈는 소리 없이 '왕조시대'의 막을 내렸고, 곧장 매각의 모진 운명으로 내몰렸다. 그러나 94년과 95년을 거침없이 질주했던 '한국의 양키스' 트윈스도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했다.

96년, 트윈스는 법정싸움까지 벌이고도 신인 임선동 영입에 실패했고, 4억원이라는 기록적인 계약금을 받고 들어온 투수 이정길은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한 채 사라지며 '먹튀'라는 말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그 해 에이스 이상훈은 '척추분리증'으로 경기 중에 들것에 실려 나갔고, 그 여파는 중간계투진을 거쳐 마무리까지 미치며 김태원, 김기범, 김용수가 도미노처럼 붕괴했다. 두 해 연속 우승을 다투던 트윈스는 탈꼴찌 경쟁으로 수직 하락했다.

은퇴식장의 유지현 2004년 10월 5일. 그는 누구의 예상보다도 빨랐던 그 순간 떠나갔다. 다년계약과 선수생활 연장의 욕심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트윈스에 입단해 트윈스에서 은퇴식을 가진 첫 선수'의 영예와 지도자로서의 새출발이었다.

▲ 은퇴식장의 유지현 2004년 10월 5일. 그는 누구의 예상보다도 빨랐던 그 순간 떠나갔다. 다년계약과 선수생활 연장의 욕심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선택한 것은 '트윈스에 입단해 트윈스에서 은퇴식을 가진 첫 선수'의 영예와 지도자로서의 새출발이었다. ⓒ 엘지 트윈스


그 해 구단 내부에서 울려온 삐걱거림도 결국 몇 해를 두고 팀 전력에 멍이 들게 했다. 송구홍의 보직 문제를 놓고 이광환 감독에게 천보성 수비코치가 맞섰고, 결국 이광환 감독을 해임한 구단이 천보성 코치를 감독으로 앉히자 선수들 일부가 반발하며 팀의 뼈대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98년 일본으로 무대를 옮긴 에이스 이상훈이 구단과 정을 떼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이상훈과 함께 트윈스의 차세대 원투펀치를 구축하리라던 임선동 역시 애초에 마음이 붙어있지는 못했다. 법정싸움 끝에 97년부터 2년간 트윈스 유니폼을 입어야만 했던 그는 11승으로 체면치레를 한 첫 해를 지나 98년에는 노골적인 태업으로 시간을 보내더니, 약속된 2년을 넘긴 99년에 냉큼 현대로 옮겨 2000년과 2001년에 18승과 14승을 올리며 트윈스를 조롱했다. 94년의 10승 신인 인현배가 부상과 군복무를 거치며 그 뒤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은퇴한 것도 예상 밖의 악재였다. 그렇게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마운드는, 끈질기게 버텨낸 김용수마저 시들어버린 2000년대 이후의 황폐기를 피해가지 못했다.

야수 쪽도 그랬다. 군복무를 마친 송구홍이 부상을 겪으며 너무 일찍 시들기 시작했고, 허문회가 끝내 자리를 잡지 못했다. 경악스런 손목 힘으로 거침없이 홈런을 퍼올리며 95년 초반기 '괴물신인'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조현이 스윙폼의 허점을 고치지 못해 변화구에 속수무책 무릎을 꿇으며 사라져갔고, 서용빈이 부상과 병역 파문에 얽히며 2년씩, 두 번이나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도저히 무너질 수 없을 것 같던 90년대 초중반 최강의 팀 트윈스가 평범한 팀으로, 다시 평범하지도 못한 팀으로 주저앉았다. 망해도 10년은 갈 것 같았던 든든한 선수진이 밑 빠진 독에 채워놓은 물처럼 사라져갔고, 차명석과 김동수의 은근한 저력에 힘입어 97년과 98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로 한 고비를 찍은 트윈스는 이후 길고 긴 침체의 늪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감정을 가지고 관계하며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로 구성된 야구팀이, 숫자로만 구성된 컴퓨터 게임 속의 팀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라는 듯 말이다.

무너져가는 팀에서 유지현은 입단동기 김재현과 더불어 가장 단단한 기둥의 역할을 해냈다. 데뷔 이후 2002년까지의 8년간, 트윈스 타선과 수비진에서 가장 중추적이고 역동적인 위치에서 움직이는 것은 항상 유지현이었다. 그러나 체격이 작은 선수는 장수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이 서른을 넘기며 그의 페이스가 급격히 꺾였다. 당혹스런 성적 앞에서 거듭 교체되어 들어서던 감독들이 거의 해마다 새로이 시작했던 '리빌딩' 시도 속에 그는 순식간에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트윈스에 입단하고 트윈스에서 은퇴하다

2004년 10월 5일. 유지현은 누구의 예상보다도 빨랐던 그 시점에 유니폼을 벗었다. 남들이 '대박인생'의 첫 발을 내딛는 선수생활 11년차, 즉 FA 첫 시즌의 마지막 날이었다. 다년계약과 선수생활 연장의 꿈이 있었지만, 그가 택한 것은 '트윈스에 입단해 트윈스에서 은퇴식을 갖는 첫 선수'의 영예였고, 지도자로서의 새출발이었다.

그는 유난히 앳된 얼굴 탓에 항상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또 그래서 아직 갈 길이 길게 남은 것으로만 느껴지는 선수였다. 그리고 항상 웃고 있는 선수였기에 가슴아린 그리움의 느낌과도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던 은퇴식이 몇 해를 지났음에도 아직 트윈스 타순과 내야 한 쪽에서 느껴지는 그의 빈자리를 느끼며 다시 생각한다. 그 자신만만하고 천진난만하던 웃음 속에 온갖 열등감으로 들쑤시는 운명 앞에서 이 악물고 버텨냈던 끈질긴 투혼이 있었음을. 그래서 비로소 떠난 뒤에 더 쓸쓸하게 저려오는 아쉬움을 남기곤 하는, 그런 묵직한 사내가 그였음을 말이다.

덧붙이는 글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도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 <126, 팬과 함께 달리다>, <돌아오지 않는 2루주자>(이상 풀로엮은집) 등이 있다.
김은식 유지현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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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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