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날리다 우리는 또한 그리워한다. 별다른 기술도, 노련함도 없었던, 그래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분노가 고스란히 턱선으로 눈꼬리와 입꼬리로, 그리고 눈가의 물기로 드러나던 그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았던 시절을 말이다.

▲ 몸을 날리다 우리는 또한 그리워한다. 별다른 기술도, 노련함도 없었던, 그래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분노가 고스란히 턱선으로 눈꼬리와 입꼬리로, 그리고 눈가의 물기로 드러나던 그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았던 시절을 말이다. ⓒ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1998년 여름 고시엔 준준결승에서 PL학원과 맞붙은 요코하마고의 에이스는 17회까지 이어진 경기를 혼자서 완투하며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날 무려 250개의 공을 던진 어깨를 걱정하는 기자들에게 그는 "내일은 던질 수 없을 것 같군요"라고 짧은 한 마디를 던지고 웃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메이토쿠고와 맞붙은 준결승에서 전날의 피로를 이기지 못한 선수들이 초반부터 무너지며 6대 0으로 끌려가자 바로 그 요코하마의 에이스가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고, 9회 초에는 거짓말처럼 다시 마운드에 올라섰다.

고시엔 구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은 그 장면의 알 수 없는 마력에 끓어올랐고, 기세에 질린 메이토쿠고는 실책을 남발하며 추격을 허용했다. 결국 8회까지 6대 0으로 기울어있던 승부는 9회말 7대 6 역전이라는 드라마를 만들어냈고, 그 에이스는 마이크 앞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진다면, PL학원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 결승전에 다시 마운드에 올라 완투하며 요코하마고를 고시엔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날의 승리는 고시엔 결승전 사상 두 번째로 기록된 노히트노런이었다. 그 요코하마고 에이스의 이름이 마쓰자카 다이스케였고, 그 해 여름의 사건이 그에게 '괴물'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준 내력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젊음이란, 하나의 역설이다

누구에게나 젊음이란 하나의 역설이다. 그것은 '살아갈 날이 구만리 같은' 미완성의 시간이었던 동시에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듯', 내일 일을 지레 두려워하지 않았던 무모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몸관리 해가며 10년, 20년 기복 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지혜이자 미덕이자 인권인 오늘, 무려 닷새 동안 700개 가까운 공을 던지고(이광은) 부러진 발목 움켜쥐고 그라운드를 기어간 끝에(박노준) 홈베이스를 부여안고 정신을 잃었던(장효조) '야만의 시절'을 우리는 그리워한다.

별다른 기술도, 노련함도 없었던, 그래서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분노가 고스란히 턱선으로, 눈꼬리와 입꼬리로, 그리고 눈가의 물기로 드러나던 그 아련한 봄날의 아지랑이 같았던 시절을 말이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1987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군산상고는 연장 11회 격전 끝에 경남고를 상대로 2대 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명성을 재현했다. 마운드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투수 조규제(현 우리 히어로즈 투수코치)와 포수 이성일.

▲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1987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군산상고는 연장 11회 격전 끝에 경남고를 상대로 2대 1 역전승을 거두며 '역전의 명수'라는 명성을 재현했다. 마운드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것은 투수 조규제(현 우리 히어로즈 투수코치)와 포수 이성일. ⓒ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야구를 시작한 것이 인천이었고 50, 60년대 야구를 지배한 것도 인천이었다. 서양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이후 산업화의 세례가 영남권에 집중되면서 그곳으로 사람이 몰리고 학생이 몰렸고, 야구의 중심도 옮겨졌다.

1971년에는 남우식이라는 전설적인 투수가 이끄는 경북고가 주요 4개 대회(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를 모두 휩쓸었고, 73년에는 석주옥, 김한근, 장효조의 대구상고가 3개 대회를, 78년에는 두뇌파 투수 양상문이 2개 대회(화랑기까지 포함하면 3개 대회) 결승에서 완봉승을 거둔 부산고가 그 두 개 대회를 접수했다. 그들보다 한 발 뒤에서 달렸던 경남고 역시 김용희와 최동원이 활약한 73년과 76년에 각각 청룡기를 제패하기도 했다.

물론 1972년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부산고에게 4대 1로 뒤지다가 9회말에 극적으로 5대 4 역전을 이루어냈던 군산상고의 '역전의 명수' 신화가 있었고, 1975년에는 대통령배 결승 경북고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우승을 이끌어낸 김윤환의 광주일고가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호남과 충청지역의 고교들은 70년대 내내 영남 지역 고교들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개 철저히 무너지는 상대팀이 되어 영남 야구의 강함을 반증해주는 역할을 했고, 이따금 준결승쯤에서 소멸되는 돌풍이 되어 대회에 흥미를 모으는 배역을 맡게 될 뿐이었다.

고교야구의 전성기, 1981년

그런 점에서, 1980년과 1981년이 고교야구의 진정한 전성기였다. 그 두 해 동안 영호남과 충청권, 그리고 수도권의 고교들이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춘추전국시대를 열며 숱한 영웅과 드라마들을 낳았고, 그것은 그대로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의 기름진 밑거름이 되었다.

1980년, 고교야구무대의 주연은 선린상고와 천안북일고였고, 조연은 광주일고와 세광고였다. 그리고 영남권의 4대 명문인 경북고, 대구상고, 경남고, 부산고가 일제히 몰락했다. 사람들은 강자가 몰락하고 약자가 일어서는 드라마에 열광했고, 예측과 달리 돌아가는 매경기를 확인하기 위해 야구장으로 몰렸다. 그 해 보름동안 열린 봉황기 대회를 보기 위해 동대문야구장을 찾은 관객의 수가 43만 3천명이었다. 

그 해 선린상고에는 2년생 콤비 박노준과 김건우가 있었고, 광주일고에는 선동열과 차동철이, 천안북일고에는 이상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충청권에서조차 만년 들러리에 불과했던 청주의 세광고가 민문식이라는 투수를 앞세워 중앙무대에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눈물의 역투, 이형종 작년(2007년) 결승전에서 '눈물의 역투'로 유명해졌던 서울고 에이스 이형종(현 LG트윈스)

▲ 눈물의 역투, 이형종 작년(2007년) 결승전에서 '눈물의 역투'로 유명해졌던 서울고 에이스 이형종(현 LG트윈스) ⓒ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그 해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는 광주일고가 선수를 쳤다. 1회전에서는 군산상고를, 2회전에서는 선린상고를 넘은 뒤 대전고와 충암고를 연파하고 이순철을 앞세운 호남 라이벌 광주상고를 결승에서 꺾고 우승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배 1회전 결승타와 준결승 완봉승을 따낸 공수의 핵 선동열을 앞세워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광주일고는 그 해의 두 번째 대회인 청룡기(6월 15일~23일)에 나갈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그 해 5월 민주화운동이 무력진압되는 동안 내내 외부와 단절되어야 했던 광주지역의 모든 학교들이 마찬가지였다. 

광주일고가 자리를 비운 사이 떠오른 것은 선린상고였다. 2학년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던 탓에 미숙했고, 그래서 앞선 대통령배 대회에서 8개의 실책을 저지르며 무너졌던 선린은 청룡기에 임하며 모두 삭발을 하고 덤벼들었고, 준결승과 결승에서 대전고와 마산상고를 연달아 완봉하며 우승컵을 안았다.

그래서 그 해의 진정한 강자를 가리는 대회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봉황기였다. 7월 24일, 광주일고와 광주상고가 무대로 돌아왔고, 대회 첫 날, 광주일고의 선동열은 경기고를 상대로 무려 15개의 삼진을 빼앗아내며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사람들은 경기를 치를수록 세련미를 더해가던 선린상고가 결승전에서 '돌아온 강자'를 맞아 어떤 승부를 보여줄 것인지, 손에 땀을 쥐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부터 사람들의 예상은 엉뚱하게 빗나가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출발선을 떠나는 듯했던 광주일고가 폭우 속에서 진행된 2회전에서 중앙고에 3대 2로 불의의 일격을 당해 탈락했고, 선린상고 마저도 세광고의 민문식이라는 무명 투수에 막혀 2대 1로 지며 8강 진출에 실패하는 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그 대회 결승에서 만난 것은 천안북일고와 배재고였다. 당시 배재고 에이스 김진원이 11개의 삼진을 뺏는 역투를 펼쳤지만, 우승은 역시 무실점으로 버틴 이상군의 수훈을 바탕으로 배재고 유격수 안종만의 악송구 실책을 틈타 7회에 두 점을 얻은 천안북일고의 것이었다.

8월에는 부산과 대구에서 각각 전국대회인 화랑기와 대붕기대회가 열렸다. 그 중 화랑기에서는 선린상고와 맞서 다시 이상군이 결승전 완봉 역투를 과시한 천안북일고가 패권을 가져갔다. 대붕기대회에서는 앞선 봉황기 대회에서 선린상고를 1실점으로 봉쇄하며 화제에 올랐던 민문식이 다시 한 번 광주일고와 인천고전을 잡으며 세광고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세광고는 개교이래 첫 전국대회 우승을 달성한 것이었다.

역전과 돌풍, 비운과 파란

그리고 그 해 마지막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 대회. 그 한 해 동안 각종 대회의 우승컵을 나누었던 광주일고와 선린상고, 천안북일고와 세광고가 나란히 4강에 올라섰고, 말 그대로 그 해의 '왕중왕'을 가리는 대격돌이 시작되었다.

우선 광주일고는 북일고를 맞아 연장전까지 치른 끝에 10회초 무사 2,3루에서 연속 희생플라이를 성공시키며 4대 2승리를 얻어냈고 선린상고는 세광고를 10대 3으로 여유있게 꺾고 올라섰다. 봄부터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꿈의 결승전, 즉 광주일고와 선린상고의 맞대결은 결국 그 대회 결승에서 그렇게 성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승전이 열린 10월 5일. 박노준이라는 이름 앞에 '비운'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이 이듬해인 1981년 봉황기 결승이었다면, 그것에 따라붙은 '천재'라는 단어가 각인된 것은 바로 그 날이었다.

그 날, 선린의 박노준은 광주일고 선동열을 상대로 결승 2점 홈런을 포함해 4타수 3안타 3타점을 기록하는 한편, 투수로도 5회부터 등장해 광주일고의 타선을 4.2이닝동안 2안타 1실점(8삼진)으로 막으며 완벽하게 경기를 지배했다. 그 날의 경기는, '국보급 투수'로 일컬어지는 선동열의 야구인생에서 가장 처참한 패배이기도 했다.  

우승 지난해 우승팀 광주일고. MVP는 투수 정찬헌 (현 LG 트윈스)

▲ 우승 지난해 우승팀 광주일고. MVP는 투수 정찬헌 (현 LG 트윈스) ⓒ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1981년 봄, 전문가와 일반인 가리지 않고 선린상고가 일방적인 독주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난해 고교야구무대를 수놓았던 광주일고의 선동열, 천안북일고의 이상군이 대학으로 무대를 옮긴 반면, 청룡기 최우수선수와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을 석권했던 박노준과 1980년 한 해 동안 0.470의 무시무시한 방망이를 휘두르며 이영민타격상을 받았던 김건우가 비로소 3학년에 오르며 한층 성숙한 세련미를 과시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달마다 새로운 선수가 나타나고 자라나는 풋풋한 고교야구의 매력은 특유의 의외성에 있다. 그 해, 도저히 달리는 예상할 수 없었던 최강의 확신 선린상고는 결국 단 한 개의 우승컵도 가져가지 못했다. 그리고 봉황기 결승에서 발목 복합골절이라는 치명상을 입은 천재 박노준의 고통스런 얼굴과 그가 누워있는 병실 밖으로 장사진을 친 여학생들의 눈물로 기억되는 '비운'이라는 여운 긴 꼬리표만을 남기게 된다.

그 해 첫 대회였던 대통령배에서 선린상고는 1회전에서 탈락한 반면 군산상고가 천안북일고를 누르고 첫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그 주역은, 뒷날 선동열을 이어 해태 타이거즈 왕조의 '2대 황제'로 불리게 되는 조계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와 전국체전까지 4개 대회에서 4관왕에 오른 것은 성준과 문병권, 그리고 유중일의 경북고였다. 박노준이 이탈한 선린상고는 3번의 준우승, 그리고 그 핵이었던 박노준은 두 개의 감투상 트로피(청룡기, 봉황기)에 만족해야만 했다.

덧붙이는 글 올 해의 두 번째 전국규모 고교야구대회인 제 42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가 4월 25일부터 9일동안 목동구장에서 열린다
고교야구 김은식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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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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