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가 있다. 가족에게도 차마 이야기하지 못하는 고민을 털어놓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단짝.

스포츠에서도 유명한 단짝 선수들이 많다. 작년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고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던 김원형과 박경완은 전주중앙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죽마고우'고, 황선홍과 홍명보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2002년 한·일 월드컵까지 오랜 기간 뜨거운 우정을 나누며 한국 축구의 공수를 책임졌다.

그러나 이토록 쟁쟁한 단짝들도 삼성화재 블루팡스의 최태웅과 석진욱만큼 화려한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인하부고 43연승, 한양대 51연승, 삼성화재 77연승

 한국 배구 '컴퓨터 세터'의 계보를 잇고 있는 최태웅

한국 배구 '컴퓨터 세터'의 계보를 잇고 있는 최태웅 ⓒ 양형석

최태웅과 석진욱은 인천 주안초등학교에서 처음 만나 인하사대부속 중·고등학교를 거쳐 한양대, 삼성화재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하고 있다(또 한 명의 단짝이었던 장병철은 인하부고 졸업 후 성균관대로 진학하며 잠시 이들과 떨어져 있었다).

인하부고 시절에 장병철(삼성화재 블루팡스)과 함께 이룬 43연승은 '단짝 신화'의 시작이었다.

최태웅과 석진욱은 한양대 진학 후에도 손석범(LIG손해보험 그레이터스), 이영택(대한항공 점보스), 백승헌(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공익근무) 등 쟁쟁한 동료들을 만나 연승 숫자를 '51'로 늘렸다.

양 선수는 1999년 삼성화재에 입단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미 김세진과 신진식(이상 은퇴)이라는 독보적인 '쌍포'를 보유하고 있던 삼성화재는 최태웅과 석진욱이 가세하면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을 구축했다.

삼성화재는 2001년 1월 7일 대한항공전을 시작으로 2004년 3월 28일 현대캐피탈에게 패할 때까지 무려 3년 2개월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77연승의 신화를 썼다.

최태웅과 석진욱은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도 나란히 대표 선수로 선발돼 무려 24년만에 한국 남자배구에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들이 가는 길엔 오로지 '우승'뿐이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준 '단짝'의 도움

 배구 센스가 뛰어난 석진욱은 '돌도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배구 센스가 뛰어난 석진욱은 '돌도사'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다. ⓒ 삼성화재 블루팡스

최태웅과 석진욱은 한 명씩 떼어 놓아도 충분히 뛰어난 선수들이지만, 만약 이들이 서로 다른 팀에서 뛰었다면 지금처럼 각자의 포지션에서 '최고'가 되진 못했을 것이다.

최태웅의 포지션은 공을 배급하는 세터. 중앙에서 토스를 준비하고 있는 세터에게 정확히 공이 올라오지 않으면, 그만큼 토스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좋은 토스를 위해서는 반드시 안정된 서브 리시브가 우선돼야 한다.

석진욱의 리시브는 단연 국내 최강이다. 이번 시즌 석진욱의 서브 리시브 성공률은 무려 77.09%로 수비 전문 선수 여오현(72.38%·삼성화재)이나 최부식(69.92%·대한항공)을 능가할 정도로 정확하다.

어린 시절부터 석진욱의 정확한 리시브를 받았던 최태웅은 언제나 안정된 자세에서 토스를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김호철(현대캐피탈 감독), 신영철(전 LIG 감독)의 뒤를 잇는 '컴퓨터 세터'로 성장하게 됐다.

석진욱의 포지션은 레프트 공격수. 그러나 석진욱의 신장은 공격수로는 턱없이 작은 186cm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석진욱이 마낙길(은퇴)이나 신진식처럼 작은 신장을 극복할 수 있는 탄력과 파워를 겸비한 것도 아니었다.

'단신 공격수' 석진욱이 2m가 넘는 '장대'들이 즐비한 코트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시간차, 퀵오픈, 이동공격 등 상대 블로킹을 속일 수 있는 '세트 플레이'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석진욱 역시 최태웅의 도움을 받는다. 석진욱의 빠른 몸놀림을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단짝' 최태웅이 있었기에, 석진욱은 신장의 약점을 극복하고 '수비만 잘하는 반쪽짜리 선수'가 아닌 '공수 겸장 레프트'가 될 수 있었다.

지난 27일에 있었던 LIG전은 '단짝'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경기였다. 석진욱은 무려 93.75%(30/32)의 경이적인 리시브 성공률로 최태웅 세터를 편안하게 만들었고, 최태웅은 자로 잰 듯한 토스로 석진욱에게 완벽한 공격 기회를 만들어 줬다.

최태웅이 세트당 13.67개의 토스를 성공시키고, 석진욱이 18개의 스파이크 중 14개를 득점으로 연결하는 맹활약 속에 삼성화재는 LIG를 세트 스코어 3-0으로 꺾고 정규리그 우승에 한 발 더 다가갔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의 약점을 채워 주며 최고의 자리에 오른 최태웅과 석진욱을 보면, 어린 시절 "친구 잘 만나야 한다"라고 하시던 부모님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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