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지(水滸誌), 108 두령 이야기

<수호지>를 보면서 피식 웃은 부분이 있다면, "108호걸들의 이야기를 의롭게 장하게만 꾸민 죄로 인해 저자 시내암의 5대가 눈 멀고 귀를 먹었다"는 전설과, 홍태위가 "전각 갇힌 108마리의 못된 귀신들이 달아나면 큰 해가 된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전각 대문을 부수며 청석판을 들췄다는 부분이다. 그로 인해 36 천강성과 72 지살성 귀신들이 풀려나와 훗날 양산박의 108 두령이 됐다는 이야기다.

시내암이 '의롭고 장하게만 꾸민 죄'를 의식하면서 내걸었던 일말의 장치였을까? 108 두령의 정체는 그렇다면 악독한 귀신이라는 뜻이다. 부패한 관료를 혼내주고, 백성들을 도왔다는 '의협'의 양산박 두령들의 행적을 생각해보자. 과연, 시내암이 '의롭게 장하게만 꾸민 것'일까? 아니면, 조정의 관점에서 '악독한 귀신'이기에 '전각에 갇힌 귀신'이 정체로 묘사된 것일까? 뫼비우스의 띠다.

그렇다면, 조개의 뒤를 이어 양산박의 총두령이 된 '급시우 송강'을 돌아보자. 그는 관료 출신이다. 도적의 무리에 가담할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꼬여 두령들과 친분이 돈독하다는 것을 기억하며 어쩔 수 없이 양산박에 들어갔다가, 소위 말하는 '덕망'을 인정받아 총두령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양산박을 몰락시킨 송강 일생 일대의 실수는, 바로 '조정'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양산박에 호의를 느낀 이들이 '다리'를 놓아주어 가게 된 것이지만, 총두령 송강의 결심도 못지 않은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조정에서, 과연 양산박 108 두령은 어떻게 됐을까?

요 정벌과 갖은 반란 속에서, 전사하거나 벼슬과 권력에 회의를 느껴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벼슬자리를 얻었어도 조정의 간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죽게 된다.

그뿐일까? 자신이 독주를 마셔 죽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되면 괄괄한 성격의 흑선풍 이규가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며 이규도 동반자살의 대열에 합류시킨다. 지다성 오용과 소이광 화영도 "깨끗한 이름과 의리를 위해" 마찬가지로 동반자살 대열에 합류한다. 허무하다. 인생무상이다. 날고 기던 이 두령들이 '정치'와 '충성'의 벽은 넘지 못했던 것이다.

이쯤 돼서 생각나는 이들이 있다면, 진나라 말기에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던 진승과 오광이다.

"왕후 장상의 씨가 따로 있더냐."

유교적 충성 논리에 얽매인 송강 때문에 썩어빠진 조정에 함부로 발을 디뎠다가 허무한 결말을 맞이한 양산박 108 두령에 비하면, 이 얼마나 화끈한가? 전략의 부재로 비록 난은 진압당했지만, 이 선언은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막대한 영향을 준다. 왕조 말기의 농민봉기에 지대한 명분을 준 것이다. 후한 말엽의 '황건적의 난'과 청 말기의 '태평천국의 난'은 종교적 외피를 둘러쓴 농민 봉기이기도 하다.

오는 31일에 개봉하는 <명장>은 이 태평천국의 난 속에서의 이야기를 그린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중국의 전통적인 민담들을 '리믹스'한 흔적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청나라판 '양산박' 이야기 <명장>

 이 '도원결의'가 알고보니 '악연'이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명장>은 그 이야기를 담는다.

이 '도원결의'가 알고보니 '악연'이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명장>은 그 이야기를 담는다. ⓒ 롯데쇼핑㈜롯데엔터테인먼트


'청나라판 양산박'에 패전장군이 들어온다. 그런데 이 사람, 썩어빠진 보통의 조정관료와는 다르다. 사내다우며, 용맹하다. 그래서 호감이 생겼으며, 의형제를 맺었다. 그러면서 이 '청나라판 양산박'도 조정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부터의 <명장>은 중국 소설의 리믹스 버전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수호지>의 리믹스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수호지>에서 송강이 감춰뒀을 법한 세속적인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야망과 의협의 충돌이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코드들이 충돌했으니, 파열음을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속에서 이들은 고뇌하고 '저지르며', 갈등하다가 눈물을 흘린다.

송강 역시 그랬을 것이다. 대개 선비란 그렇지 않던가? '충(忠)'이라는 명분 아래에서 자신의 야망을 담기도 하며, 그 야망 추구의 길로도 삼는다. <명장>에서의 '방청운(이연걸)'은 그점에서 솔직하다. 전장의 풍운을 몸소 겪은 장군이기에 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솔직함은 '협(協)'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전장에서 승리와 야망을 추구하는 길과, 조정에서 권모술수를 부려 살아남는 길은 협이 추구하는 인간에 대한 명분과 의리와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다. <명장>은 결국 만남과 헤어짐의 이야기다. 이성이 아닌 동성의 이야기라는 차이가 있을 뿐, 진가신 감독의 대표작 <첨밀밀>의 흔적이 이런 부분에서 느껴진다.

극단적으로 엇갈린 사내들의 이야기

 <명장>의 전투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의 전투 장면과 유사해보이기도 한다.

<명장>의 전투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의 전투 장면과 유사해보이기도 한다. ⓒ 롯데쇼핑㈜롯데엔터테인먼트


'방청운'은 대단히 솔직한 캐릭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중국 역사소설 속의 캐릭터들이 범벅이 돼 있다. <수호지>의 '송강'의 감춰둔 속내였을 수도 있으며, 비유하자면 <삼국지연의>의 유비가 아니라, 조조가 관우·장비와 의형제를 맺었을 때의 상황 같기도 하다.

'조조'라는 캐릭터가 관우에게 가진 호감이 "동경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가치관을 굳세게 고수하는 사내에 대한 호감"이었음을 감안해보자. 조조는 그러면서도 관우를 이용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방청운'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썩어빠진 조정의 암투 속에서 휘하 병사를 모두 잃고 위기를 겪었던 '방청운'으로서는, 이 사내들의 세계를 동경하며 투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정 관료로서의 본색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야망을 추구해 관직을 높이고 권력을 차지하는 것도 그의 할 일이다. 그렇기에, '조조가 관우·장비 형제와 의형제를 맺었을 때'라는 상황이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살고자 호위장군과 맏아들을 희생시켰으며, "내가 세상을 배신할 수는 있어도 세상은 나를 배신하지 못한다"고 결연히 외쳤던 그 조조 말이다.

극단적으로 엇갈린 것이다. 관우·장비가 유비와 의형제를 맺게 된 것은, 사실 일생 일대의 행운이었다. "인간의 재능에 대한 관심은 있어도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는" 조조와는 달리, 유비는 특별한 문무의 능력 없이도 인간을 바라보는 풍부한 눈과 '위장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조조는 유비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관우·장비로서는 '유비'였기에 평생동안 그 의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풍부한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잘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유비'는 야심만만한 사내이면서도 역사에 등장한 본질적인 계기를 '협'과 혈통으로부터 비롯되는 '대의명분'에서 찾았던 사람이다. 행운이라 할 만하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을 '악연'이라고도 한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을 '악연'이라고도 한다. ⓒ 롯데쇼핑㈜롯데엔터테인먼트


세상에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도 있다

"세상에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 있어요. 사람들은 그걸 악연이라고 하죠."

어느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다. <명장>의 이야기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추구하는 길이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만났으니,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쉽지 않음'이 좋은 결과를 유도하는 것은 어려운 길이다.

조정에 대한 관념을 잊지는 못했어도 '협'을 이해하고 실천했던 <수호지>의 송강, 그는 꽃동산에 묻혔고 꽃잎이 흩날리는 그 풍경 속에서 오용과 화영은 자살했다. 유·관·장 3형제가 의형제를 맺었던 복숭아 정원에서도 복숭아꽃은 그렇게 흩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흩날리는 꽃은, 인연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피의 향기와 무상함을 이야기한다.

<명장>에서는 흩날리는 꽃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에 대한 이야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직 피와 칼이 난무하는 전쟁만이 비춰질 뿐이다. 사소한 아름다움마저 묻힌 그 살벌한 세계에서, 사내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 선택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반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다양한 인연이 맺어지고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엇갈려, 수많은 피와 눈물이 오가는 와중에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싹 트는 다양한 감정들, 그게 바로 역사다.

<명장>은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보여준 것이다. 마치 연인의 만남과 헤어짐과도 같은 사내들만의 이야기, 그리고 그 진혼의 역사를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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