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구, 1승 1패로 맞서있던 준플레이오프 3차전. 3회말, 2-1로 앞섰지만 1사에 주자를 3루에 남겨놓은 상황에서 들어선 자이언츠의 구원투수는 박동희였다. 타자는 라이온즈의 유중일. 날카롭게 시선이 모인 그 순간, 이미 1차전 선발로 나서 1패를 기록한 박동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안타 한 개면 동점을 허용하는 위기상황이었다.

볼 카운트는 2-3 풀카운트. TV화면 안팎을 진공상태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 박동희는 어이없게도 공을 쥔 손으로 허공을 갈랐고, 보크 판정이 내려지며 3루 주자는 유유히 홈을 밟고 말았다. 허무한 동점. 대구의 팬들은 호탕한 환호성을 울렸고, 부산의 거리에는 분노의 함성이 쏟아졌다. 묵묵히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씹는 박동희.

"그럴 줄 알았다. 저 놈 하는 짓이 만날 그렇지…."

아마도 그의 귓가에 선하게 울려댔을 그 야유, 그 아우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뜨거운 야구열기를 자랑하는 부산, 그곳에서 가장 격한 야유를 들어야 했던 선수가 박동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항상 예사롭지 않은 기대를 품게 했고, 대개는 허무한 뒷맛을 남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로 마무리로 등장했던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느리게 발동이 걸리는 스타일의 선수였고, 칼날같은 박빙의 승부를 ‘세이브’보다는 승리, 혹은 패전으로 결정짓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절대 팬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선수가 아니었으며, 긴장과 흥분, 그리고 열광 아니면 분노로 몰고 가는 선수였다.

부산이 낳은 또 하나의 천재 투수


70년대 후반, 양상문이라는 천재를 앞세워 전국을 휩쓸었던 부산고가 다시 한 번 부산 야구팬들의 마음속을 술렁이게 했던 것이 1983년이었다. 봉황기 1회전에서 시속 140km대 후반의 강속구로 성남고의 2,3학년 선배들을 1안타 완봉으로 농락한 1학년생 투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박동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비록 팀이 2회전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그 해에는 더 이상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두 해 뒤인 85년, 3학년이 되어 봉황기 무대로 돌아온 그 투수는 혼자 중앙고, 휘문고, 진흥고, 전주고, 북일고를 거쳐 결승 광주상고전까지 질주하며 34이닝동안 자책점 ‘0’을 기록하는 경악스런 활약으로 우승을 결정지어버린다.

이미 시속 150km를 넘어서고 있던 구속은 그 시절의 고교무대에서 요행으로나마 건드려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쯤 되자 당장 그에게는 ‘제 2의 아무개’라는 별명들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별명에 관한 논쟁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논쟁은, 박동희가 과연 별명으로 따라붙은 ‘아무개’에 견줄만한 자격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박동희가 진학하게 된 고려대의 동문과 팬들은 ‘제2의 선동열’이라는 별명이 마땅하다고 주장했고, 그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부산의 야구팬들은 당연히 부산야구의 계보를 이은 ‘제2의 최동원’일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단연 한국 최고의 유망주였고, 동급 최강의 선수였다. 선동열과 박노준에 이어 또다시 동세대 최고의 투수를 확보한 고려대는 ‘고려고등학교’라는 시샘어린 조롱을 기꺼이 감수하며 박동희를 ‘풀가동’ 시켜 대학무대를 평정했다. 이 당시 박동희의 활약은 오히려 선동열과 박노준을 능가할 정도였다.

특히 3학년이었던 박동희가 7경기에 모두 출격해 혼자 6승을 올렸던, 특히 8강전부터 결승까지 세 경기를 연속으로 완투했던 1988년 대학 봄철리그에서는 타선에서 불을 뿜은 김경기와 임수혁마저도 ‘박동희와 아홉 난장이들’중 하나로만 기억되어야 했다.

또한 국가대표로서의 활약 또한 부산 선배 최동원을 능가할 만했다. 대학 1학년 때 출전했던 네덜란드 세계 선수권대회에서는 이광우와 계투조를 이루어 대만전 승리에 이어 최종전 일본전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준우승의 공신이 되었고 89년 대륙간컵 대회에서는 대만전 1안타 완봉승을 포함해 3경기에서 0.56의 평균자책점으로 2승을 올렸다. 그리고 같은 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대만전 완투승을 거두며 공동우승을 일구어내기도 했다.

그는 같은 시기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종종 일본의 노모 히데오(뒷날 미, 일 통산 200승 투수)와 팽팽한 맞대결을 펼쳤고, 특히 아마추어 야구무대의 숙적 대만에 승승장구하며 ‘대만 킬러’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프로 데뷔전의 6연속 탈삼진


1990년 4월 11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원정경기가 벌어졌던 대구구장. 그날, 그곳에서 박동희의 프로 데뷔전이 치러졌다. 6회말, 전광판에 박동희의 이름이 새겨지자 관중들은 홈과 원정을 떠나 숨을 죽였다. 천하의 선동열과 최동원도 매 이닝 실점하며 고개를 떨구었던 프로 데뷔전. 그들보다 한 발 앞서 달려왔다는 엄청난 소문 속의 박동희는 과연 그 진땀 나는 시험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 

그 날, 삼성 라이온즈의 선발은 최동원이었다. 최동원, 부산 야구의 상징이자 자존심. 그러나 자이언츠를 거쳐간 숱한 ‘에이스의 비운’ 전설 첫머리가 되고 말았던 이름. 자이언츠 유니폼을 벗자 마치 머리털이 잘린 삼손처럼 힘을 잃은 그는 1회초부터 김민호에게 홈런을 맞는 등 3점을 내주고는 물러났고, 롯데 선발 김청수가 끌어온 3-1의 리드 상황에서 박동희가 구원등판한 것이다.

첫 타자 박승호 삼진. 그리고 이만수 내야 땅볼과 이현택 삼진으로 깔끔한 삼자범퇴. 그러나 7회가 시작되자마자 선두 김종갑에게 솔로홈런을 맞으며 얼굴이 굳어버리자 포수 한문연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짧은 대화. 묵묵히 끄덕거리며 이를 악무는 투수.

그로부터 전설적인 신인투수의 삼진쇼가 시작되었다. 유중일, 이종두, 강기웅. 누구를 만나도 두려울 것 없던 황금타선이 순식간에 세 개의 삼진을 헌납하며 타석과 더그아웃 사이를 맴돌았고, 8회에도 장태수와 김성래, 이만수가 마찬가지의 경로를 되밟아야 했다.

9회 들어 이현택이 땅볼을 치면서 연속삼진은 끝이 났지만 다시 두 타자를 연속 삼진으로 잡으며 마무리. 성적은 4이닝 1실점, 10탈삼진 세이브였다.  

그 경기에서 던졌던 최고구속 시속 155km는 역대 한국프로야구 최고 기록에 해당했고, ‘덜 다듬어진 듯한’ 느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이었던 결과와 상승하며, 오히려 더욱 경악스러운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한껏 부풀려놓기 시작했다.

어쩌면 최동원과 선동열이 밥 먹듯 기록했던 ‘20승’은 너무 싱거운 목표로 보였고, 국내파 최초로 30승의 벽을 다시 한 번 넘을 것이라는 예상도 억지스럽게 들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준수한 성적, 그러나 너무 높았던 기대

그러나 이미 최고라는 찬사 속에서만 십수 년의 투수인생을 걸어온 이에게 새삼 ‘다듬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신인이라고는 해도 대학무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이미 닳고 닳아버린 팔꿈치와 어깨는 꽤 단단한 한계선을 그려두고 있었다.

일년에 한 두 번 만나는 대학무대나 국제무대 타자들과 달리, 프로무대에서는 한 해에 열댓 번씩이라도 거듭 만나며 재대결을 거듭했고, 그러자니 단기전의 필살기인 강속구와 커브도 노리고 긴장하면 때려낼 수 있는 평범한 무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몸쪽 공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 한 템포씩 굳어버리는 ‘새가슴’. 더구나 하늘 끝까지 치솟은 기대로 노려보는 사직구장의 녹아버릴 듯한 열기. 그러고 보면, 최동원만큼 담대하지도, 선동열만큼 영악하지도 못했던 그의 무른 심성과 두뇌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첫 해 그가 거둔 성적은 딱 기대치의 절반쯤에 해당할 10승이었다. 145이닝을 던지면서 평균자책점 3.04. 지금이었다면 신인왕 경쟁에 나설 만한 호성적이었지만, 부산 팬들은 불편한 헛기침을 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프로무대에 적응한 그는 189.2이닝을 던지며 14승과 2.47의 평균자책점으로 대활약했지만 부산팬들의 마음은 여전히 어딘가 부족한 듯 했다.

“아직은 2년차니까… 곧 나아지겠지…”

그러나 드디어 20승대로 올라서는 원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1992년, 그는 100이닝도 채우지 못하며 4.13, 7승의 평범한 투수로 추락하고 말았다. 박동희에게 본격적인 야유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시즌 초반, ‘의사 장티푸스’로 진단 내려졌던 병이 문제였다. 결국 세균 감염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유 없이 열이 오르고 설사를 계속하며 전반기 내내 2경기 밖에 뛰지 못하는 그에게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고, 고졸신인 염종석이 17승을 거두며 또 다른 ‘제 2의 선동열, 혹은 최동원’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나마 관심의 밖으로 밀려나는 서러움마저 맛보아야 했다.

야유 속에서, 한 번 더 앙다물었던 어금니

확실히 박동희는, ‘위대한 선수’라기보다는 ‘아쉬움을 남긴 선수’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쉬움이 유독 길게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가 그저 ‘잘 할 수 있었는데 못한 선수’였던 것이 아니라, 내리막길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한 번씩 차고 올라 존재감을 심어놓았던 선수였기 때문이다.

1992년. 롯데 자이언츠는 믿었던 박동희가 시즌 초반부터 이탈한 대신 터줏대감 윤학길과 신예 염종석이 나란히 17승씩을 올려준 데 힘입어 정규시즌 3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발휘했다. 후반기에 자리를 털고 나선 박동희가 부랴부랴 7승을 채웠지만 연습생 출신 윤형배의 8승과 무명신인 김상현의 7승에도 앞서지 못하는 팀내 4, 5인자에 불과했다.

사상 최초로 120만 관중을 돌파하는 열광을 모아준 부산 팬들에게 박동희는 이미 ‘버린 카드’였다. 그들의 기대는 온통 염종석과 윤학길, 그리고 타선의 ‘남두오성’, 즉 김응국, 김민호, 전준호, 이종운, 박정태에 집중되어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와 맞선 준플레이오프. 역시 1차전은 성준과 선발 완투 맞대결을 벌인 염종석의 5안타 완봉투와 박정태의 결승타점으로 맺음되었다. 그러나 2차전 선발로 나선 것은 의외로 박동희였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윤학길을 대신해 유독 대구 구장에서 성적이 좋았던 박동희를 투입한 모험이었고, 박동희는 그 기대에 부응해 5안타 7삼진 무실점으로 4-0 완승을 이끌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환호성. 오랜만에 느껴본 부활의 느낌.

해태 타이거즈와 맞선 플레이오프에서는 윤학길과 염종석을 모두 털어넣어 잡은 1차전과  윤형배와 김상현으로 버티다가 포기한 2차전을 거쳐 승부의 분수령이 될 3차전에 투입한 것이 박동희였다. 그러나 준플레이오프 2차전 이후 충분한 휴식시간을 주기 위해 2차전을 포기하면서까지 던졌던 그 승부수에서, 박동희는 다시 한 번 실망을 안기고 말았다. 5회 급격히 제구력이 흔들리며 4실점. 결국 1-8의 대패였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다시 염종석의 완봉 역투로 4차전을 잡아낸 뒤 5차전에서 윤학길이 6회까지 5-4의 살 떨리는 리드를 유지하자 강병철 감독은 준비를 마치고 있던 박동희를 건너뛰고 염종석을 다시 한 번 투입하는 승부수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짓고 만다. 자이언츠 선수단과 사직구장은 8년만의 한국시리즈 진출로 열광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멋쩍은 미소를 흘리며 돌아서서 어금니를 깨물어야 했던 것은 박동희였다.

다시 한 번, 정상에 서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5차전까지 치러진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만신창이가 된 자이언츠로서는 버릴 경기를 버리고 따낼 경기를 따내는 전략이 필수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박동희가 선발 등판한 한국시리즈 1차전은, ‘버리는 경기’였다. 1, 2선발인 염종석과 윤학길은 지쳐있었고, 맞상대는 그 해 다승왕과 구원왕을 석권한 빙그레 이글스의 송진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생각지 않은 자이언츠의 승리였다. 1회 초 번트수비를 하며 중심을 잃고 주자와 부딪히는 바람에 ‘주루방해’로 무사 1, 2루를 만들어주며 흔들리기 시작한 송진우가 3회까지 6실점하며 무너진 반면에 박동희는 8피안타, 그리고 무려 3개의 폭투를 하면서도 시속 150km 가까운 직구로 8이닝동안 10개의 삼진을 잡아낸 것이다.

그리고 1승의 여유를 안고 2차전을 다시 한 번 ‘버리는 승부’로 가져갔던 ‘만만디’ 강병철 감독은 8승 투수 윤형배가 14승 투수 정민철과의 맞상대를 생각지 않은 승리로 이끌면서 우승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비가 찾아온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첫 두 판을 ‘버리는 카드’로 버티며 아껴왔던 윤학길과 염종석, 그들이 탈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3차전 선발 윤학길은 언제나처럼 묵직하고 성실하게 공을 던졌다. 그러나 고질적인 초반 난조와 결정적인 순간의 유약함이 문제였다. ‘1회만 무실점이면 완봉’이라는 안타까운 별명마저 달고 있던 그는 아니나 다를까, 3회까지 먼저 3점을 헌납했고, ‘남두오성’의 꾸준한 추격전 끝에 8회 2사 2루에서 전준호의 역전타로 4-3 리드를 잡고도 9회초 마지막 수비에서 지화동과 임주택의 연속 적시타로 재역전을 허용하며 1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4차전 선발은 염종석이었다. 어쩌면 그 해 그가 걸어간 영광의 길에 화룡점정할 수 있었던 그 날을 위해 어머니는 그에게 장어탕을 끓여 먹였다. 그러나 그것이 탈이 나 밤새 설사를 했던 염종석은 6회초 집중안타를 맞고 3점을 허용하며 무너져내렸다. 6회초 5-3, 박빙의 리드. 2사에 주자는 1, 3루.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믿을 것은 박동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 순간, 비록 팀은 2승을 비축해두고 있었지만 모래알처럼 무너질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 자리까지 팀을 이끌어온 윤학길과 염종석이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박동희의 분발이 시작되었다.

4차전 6회초, 박동희는 염종석이 남겨놓은 1,3루의 주자를 더그 아웃으로 돌려보낸 것을 시작으로 그 경기를 마무리했고, 이틀 뒤 5차전에서도 4회부터 윤형배를 구원해 4-2 승리를 지켜내며 한국시리즈 우승의 순간을 만끽했다.

한국시리즈 2승 1세이브의 성적. 그리고 한국시리즈 MVP의 영광이 보상으로 주어졌다. 그가 프로무대에서 가장 높이 올라간 순간이었다.

이대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다시 91년 준플레이오프 3차전으로 돌아가보자. 그 날, 상대팀 라이온즈 역시 선발 성준이 1회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자 마운드에 오른 ‘부시맨’ 김성길은 조성옥에게 홈런을 허용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고, 자이언츠 선발 김태형을 구원해 3회부터 등장한 박동희도 어이없는 보크로 동점을 허용하며 팬들의 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경기는, 그 때부터 모두의 예상을 깬 역사적인 투수전으로 이어졌다. 무려 4시간 37분. 연장 13회까지의 완주. 그동안 김성길은 12.1이닝동안 무려 198개의 공을 뿌리며 9안타 1실점으로 버텼고, 박동희는 10.2이닝동안 5안타 1실점. 그리고 무려 15개의 삼진을 뽑아내는 묘기를 선보였다. 경기 초반의 야유와 한숨은 탄성과 환호로 바뀌었고, 미간으로 모여들어 잔뜩 잔주름을 만들어내던 신경은 곧 기립박수로 길을 바꾸었다.

그것이 바로 박동희였다. 때론 나약했고, 종종 무너져내렸던 미숙아. 그러나 팬들의 야유를 격려삼아, 끝없이 밀려드는 자괴감을 연료삼아, 눈 질끈 감고 내달리기 시작하면 막아서는 자 누구든 추풍낙엽처럼 연속삼진으로 휩쓸어버리곤 했던 고독한 영웅. 

그 뒤로도 박동희에게 영광의 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끝내 선동열과 최동원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끝내 ‘역시 박동희’라는 인정을 얻어내지 못했다. 94년에 31세이브를 올리기도 했지만, 같은 해 40세이브를 돌파한 정명원이나 ‘노송’ 김용수와 비교하면 두 수 쯤 아래로 평가받았을 뿐이었고, 그 뒤로는 길고 긴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1997년 삼성 라이온즈로 보내진 뒤로는 5년간 단 7승만을 거두며 잊혀져가야 했다.  

뒤늦게, 박수를 보내다

지난 3월 22일. 교통사고로 그가 떠났다는 소식은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묵직한 아픔을 심어놓았다. 그렇게 끝내 떠나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리고 진작에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는 자리가 그에게 예비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공평치 않은 야유 대신에 그의 노력과 업적에 마땅한 박수를 쳐줄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후회와 미안함 말이다.

그래서, 무리한 기대와 인색한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일어서고 다시 일어서준 그에게, 그래서 ‘박동희’라는 이름 석자를 떠올려 새기는 것만으로 운명과 재능과 피와 땀에 관해 한 걸음 멀어진 곳까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그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뒤늦은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