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정규시즌 마지막 2연전은 여러 모로 관심을 모으는 경기였다. 전기 리그 우승팀과 후기 리그 우승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그 시절, 라이온즈는 이미 전기 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행을 확정해놓고 있었고, 자이언츠도 그 두 경기를 모두 잡을 경우 베어스를 제치고 후기 리그를 우승해 한국시리즈에 나설 수 있었다.

그리고 라이온즈의 이만수는 이미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 1위를 굳힌 채 타율부문마저 1위에 나서며 초유의 '타격 트리플크라운'을 가시권에 두고 있었고, 그를 위협하는 유일한 존재는 단 1리 차이로 맹렬히 추격해온 자이언츠의 재일교포 타자 홍문종 뿐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한국시리즈의 상대로 원년의 숙적 베어스 대신 '최동원 빼면 볼 것 없는 만만한 자이언츠'를 낙점해놓고 있었다.

그래서 그 두 경기에서 '이기기를 포기'한 데서 더 나아가 '적극적인 져주기'라는 고약한 퍼포먼스를 벌였고, 타격왕 경쟁에서도 그 못지않은 고약한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그 두 경기에서의 안타 한 개 차이로 결정되어야 했을 타격왕 경쟁의 두 당사자 중 한 치 앞선 후보 이만수는 끝내 타석에 나서지 않았고, 라이온즈의 투수들은 홍문종에게 '9연타석 고의사구'를 던지며 추격을 원천봉쇄했던 것이다.

한국프로야구의 기름진 밑거름, 재일교포

한국에서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 현해탄 건너 일본의 프로야구는 환갑을 맞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막 싹을 틔운 한국프로야구와 이미 수많은 기록과 드라마와 전설로 아름드리 굵어진 일본프로야구의 수준차이는, 마치 다른 세상을 살아온 환갑노인과 신생아 사이의 세대차이만큼이나 아득하고 먼 것이었다.

물론 공을 던지고 치고 달리는 기술의 차이야 오히려 별 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야구하고, 그걸로 몸값을 흥정하며 내년에 또 야구하는' 프로리그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한국의 선수들에게 여전히 야구는 투혼이고 근성이고 헌신이며 승부였다. 그런 한국야구의 '아마추어리즘'이, 자기관리이고 절제이며 끊임없는 배움이자 연구로서 벼려져온 일본의 야구와 마주선 거리는 결코 좁은 것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현해탄'이라고 했던 장명부. 왼쪽은 김무종. '내 고향은 현해탄'이라고 했던 장명부. 왼쪽은 김무종.
 '내 고향은 현해탄'이라고 했던 장명부. 왼쪽은 김무종.
ⓒ 한국야구위원회
그 일본 야구무대에서도 가장 독한 근성으로 무장하고 있던 이들이 바로 재일교포들이었다. 400승 투수 김정일과 3000안타 장훈을 비롯한 그들 재일교포 선수들은 차별이라는, 남들보다 한 겹 더 세워진 장벽과 맞서 오로지 실력과 근성으로 일본 프로야구사에 위대한 업적을 만들어갔고, 그들 중 일부는 막 걸음마를 뗀 한국프로야구에 '프로근성'이라는 유전자를 이식해준 전도사집단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들은 프로라는 무대의 속성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바탕한 노련한 기술과 마인드로 한국 야구계를 초토화시켰고, 그들에게 자극받고 훈수받은 한국프로야구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60년 세월을 넘어 일본에 정면도전할 수 있을 만큼의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전무후무할 시즌 30승의 장명부, 그리고 역사상 유일하게 한국시리즈를 생략해버린 라이온즈 '전후기 통합우승'의 주인공 25승 투수 김일융은 그야말로 한 어깨로 리그를 들었다 놓은 영웅들이었다. 김신부·주동식·최일언 등도 각기 팀의 에이스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빈약한 선수 공급구조 탓에 연고지역간의 뻔한 전력 차를 안고 가야 했던 한국프로야구에서, 재일교포의 선발과 영입은 팀의 성적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에 남는 활약이 대개 투수들의 것이었고, 그만한 존재감을 보여준 타자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짚어볼 만 하다.

83년, 김재박의 아성에 유일하게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공수겸비형 유격수' 이영구라든가, 해태 타이거즈에서 포수로 활약하며 '미트질의 새로운 영역'을 경험하게 해주었던 김무종이 있었고, 이듬해 들어와 타격왕 경쟁에 나섰던 홍문종이 있었지만 '타선의 장명부와 김일융'을 기대했던 팀의 기대를 충족시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무후무한 재일교포 출신 타격왕, 고원부

물론 같은 야구선수라지만 투수와 야수에게 주어지는 역할과 임무는 다르다.

투수란 어쨌거나 그라운드 위에 우뚝 솟은 고독한 마운드에서 최종적으로는 혼자 결단하고 혼자 움직이며 책임지는 존재지만, 야수란 전후좌우와 유기적으로 협력하고 조화함으로써만 작동하며 타석에 섰을 때 역시 누상의 주자, 그리고 후속타자와의 보이지 않는 연결 속에서 때로는 당기고 때로는 밀며, 때로는 희생타를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쉽사리 파고들 수 없는 이질적인 팀 속에서라도 어느 정도 실력발휘를 할 수 있는 것은 투수 쪽이었다. 외국 리그에 진출하는 우리 선수들이 대부분 투수들이라는 것 역시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재일교포들, 그들은 한국인의 피를 받은 탓에 바다 저편에서 2등 시민 대접을 받아야 했고, 몸에 깊이 배인 일본의 말과 문화 탓에 모국에서마저 이물질 취급을 받곤 했다. 그들은 두 개의 땅에서 만들어졌지만 어느 땅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경계인'들이었으며, '내 고향은 현해탄'이라고 했던 장명부의 넋두리가 바로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80년대는 단일민족의 순혈신화에 대한 의심이나 거부감이란 찾아볼 수 없었던 순진하고도 격렬했던 민족주의의 시대였다. 그 못난 열정 속에서 재일교포들에 맞서 '순수혈통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한일전에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고, 84년 홍문종에게 던져졌던 '9연속 고의사구'라는 씁쓸한 기록은 그런 시대와 문화의 한 단면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89년 '고원부'라는 이름의, 그리 비싸지도 않은 몸값의 한 재일교포 선수가 타격왕을 차지했던 것은 우리 프로야구사 속에 작지 않은 의미를 가지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87년과 88년 민주화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그만큼 유연해졌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만한 장벽을 뛰어넘을 만큼 뛰어난 타격기술과 친화력과 팀플레이 정신을 가진 선수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의 퇴출, 그리고 한국에서 새 출발

89년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고 환호하는 이글스 선수들. 제일 왼쪽이 고원부. 89년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고 환호하는 이글스 선수들. 제일 왼쪽이 고원부.
 89년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짓고 환호하는 이글스 선수들. 제일 왼쪽이 고원부.
ⓒ 한국야구위원회
고원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난카이 호크스에서 4년간 뛰면서 1군 무대에서는 딱 다섯 번 출장기회를 잡았을 뿐인 무명의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시간동안 철저한 기본기와 자기관리법을 익힌 모범생이었고, 2군 올스타전에서 MVP로 선정된 적이 있을 정도의 유망주였다.

그러나 운명의 84년, 그는 재일교포 선수들이 흔히 겪는 설움과 차별 앞에서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팀 코치를 폭행하는 사고를 저지르고 영구퇴출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대선배 장훈의 배려 덕분에,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한국행이었다.

초창기 '재일교포 신화'의 주역 장명부와 김일융은 각기 일본 무대에서 투수부문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는 1급 투수였지만, 그들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전성기를 한참 넘겼을 무렵이었다. (물론 김일융은 한국무대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아 일본무대에 화려하게 복귀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연봉으로 보나 이름값으로 보나, 가능성으로 보나 한국의 신생리그에 비해 수십 배 큰 매력을 가진 것이 일본 프로리그였기에 한국에서 한창 나이의 재일교포 선수들을 구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원부는 불미스런 사고 탓에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국무대를 밟았고,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활약을 보여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투수를 분석하는 두뇌파 타자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한국 땅에 내려선 85년, 그는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멤버로 한국에서의 야구인생을 시작했지만, 팀이 아직 리그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기에 훈련만 하며 해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86년, 아직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던 그는 2할 4푼 대의 초라한 성적을 내는 데 그쳤다. 그러나 생소한 사회와 팀 분위기에 어느 정도 적응해간 87년, 그는 곧장 3할 2푼대의 타격솜씨를 뽐내며 신생팀의 '탈꼴찌'에 기여했다.

그는 배트 스피드나 파워, 혹은 주루능력 두루 특출난 것은 없었지만 상대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예리함과 센스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선수였다.

장효조나 강기웅처럼 타고난 반사 신경과 동체시력으로 공을 맞추는 능력은 없었지만, 투수의 투구패턴을 빠르게 분석해 특정한 구질을 예측하고 노려 쳐서 안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투수와 포수의 움직임과 습관을 분석해 그 빈틈으로 달려 그리 빠르지 않은 다리로 해마다 10개 이상의 도루를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는 말하자면 '두뇌파' 타자였다.

아직 충분히 세련되지 못한 한국무대에서 고원부의 분석야구는 충분히 먹혀들었고, 드디어 89년에는 재일교포 선수 최초의 타격왕에 오를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야구실력에 덧붙여 민주화 시대를 경과하며 몇 해라도 프로의 맛을 경험한 한국사회가 외국인도 아닌 재일교포의 개인타이틀 하나에 야박하게 굴지 않을 만큼 그나마 유연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애초에 그를 한국으로 건너오게 만들었던 사고의 전력 때문에 그에게 가장 우려되었던 '인간관계능력' 면에서 문제가 없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원부는 주변의 후배 선수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많이 주는 선수였다. 예컨대, 아직 키가 계속 자라고 있던 미완의 홈런왕 장종훈은 뒷날 가장 큰 은인 중 하나로 고원부를 꼽았다. 중거리타자가 아닌 홈런타자로 방향을 잡아주고 타격기술을 조언했을 뿐 아니라,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때로 부진 때문에 방황하는 날에는 새벽까지 같이 배트를 휘둘러주며 붙들어준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타격코치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다

89년도 골든글러브 시상식. 김재박·선동열·한대화 등 오늘날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제일 왼쪽이 고원부. 89년도 골든글러브 시상식. 김재박·선동열·한대화 등 오늘날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제일 왼쪽이 고원부.
 89년도 골든글러브 시상식. 김재박·선동열·한대화 등 오늘날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제일 왼쪽이 고원부.
ⓒ 한국야구위원회
90년을 정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걸었던 과정에는 두루 아쉬움이 남는다. 부상이 있었고, 순식간에 최약체팀을 최강의 반열까지 수직 상승시킨 이정훈과 장종훈이라는 후배들의 도전이 있었으며, 작은 부진을 길게 기다려줄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국외자'의 불리함이 있었다.

92년까지 3년을 더 뛰었지만 더 이상 기회를 잡지 못하고 옷을 벗은 그는 잠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94년부터는 태평양 돌핀스의 타격코치로 복귀하기도 했다.

한국야구에서 그가 타격코치로서 남긴 흔적 역시 선수로서 남긴 것 못지않은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최약체팀, 그 중에서도 극악한 공격력의 팀 돌핀스에 무모한 목표를 우겨넣는 획일적인 구령 대신 그나마 선수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장단점을 활용해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팀타율을 대폭 끌어올린 것은 아니었지만 짜임새 있게 점수를 뽑아내는 타선으로 '업그레이드'시켰고, 없는 자원 속에서 김경기와 김동기, 그리고 이숭용이라는 중심타선을 건설해냈다. 그리고 그 타선은 94년 돌핀스의 준우승 돌풍의 진원지가 되었다.

선수시절부터 그랬듯, 투수의 볼 배합을 읽어내는 능력으로 그는 결정적인 순간이면 타석으로 향하는 타자에게 무언가를 짚어주었고, 그 다음 순간 결정타로 경기를 마무리 지은 수훈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고원부 코치님이 찍어준 대로 노려 쳤다"는 소감을 늘어놓곤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족집게 코치'였다. 구보대열 앞에서 뛰고 솔선해 얼음계곡에 들어가는 것을 미덕으로 삼던 '훈육관'에 가까웠던 초창기의 코치들이 나름대로 분석의 기술과 노하우를 축적해가며 '전문가'로 탈바꿈하던 시기, 고원부가 보여준 모델과 자극은 중요한 참고점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제 재일교포 선수들이 뜸해졌지만

한국야구가 제 힘으로 걷기 시작하고,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문호가 열리면서 한국을 찾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발길은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새 스물여섯 해나 나이테를 더하고 이제는 거꾸로 적지 않은 선수들을 외국 무대로 내보내는 시대를 맞으며, 그런 장한 성장에 가장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 바로 그들이었음도 희미해져가고 있다.

고원부는 우리 야구사에서 가장 가볍게 잊혀지고 있는 중요한 은인들의 시대를 기억하게 하는, 작은 책갈피 같은 존재다.

덧붙이는 글 김은식 기자는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음식을 매개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우장춘, 씨앗의 힘 씨앗의 희망>(봄나무)을 펴냈고, CBS라디오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연재중인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 있다>(뿌리와이파리)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도 <야구의 추억, 그의 141구는 아직 내 마음을 날고있다>등의 책을 펴냈다.

top